유탄으로 화지 위에 엷은 밑그림을 그리듯 한강님의 책을 읽는다. 절반을 넘어서야 먹선을 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새로 출간하는 시점에 굳이 사서 보는 책이 많지 않다. 내게 김연수와 한강은 그래야하는 작가이다. 갓 나온 책의 기름냄새 같은 것이 낯설게 후각을 자극하면 다시 읽는 지점에서 매번 낯설게 되는 소격현상(이화현상)을 경험한다. 주인공들의 아픔에 동화 되다가 낯설어지기를 반복한다.제주 4.3 사건의 고통을 상상하기 힘든 입장에서도 어슴어슴, 스며드는 밀물처럼, 두터운 겨울옷이 찬 바닷물에 공간을 내어주는 것처럼 시리고 생경한 고통의 예감이 엄습한다. 보드랍게 떨어지는 눈꽃이 죽은 것들 위에서는 녹지 않고, 살아있는 것들 위에서는 녹는다는 섬세하며 극명한 차이를 짚어내는 작가의 터치로 보드랍게, 조심스럽게, 아프게 그 시절을 함께 상상한다. 슬픔과 고뇌에서 통으로 건져올린 작가의 옆모습이 최근에 본 작가들의 사진과 달라 한참을 들여다 봤다.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지. 그러나 중단된 동안에는 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기억하여 애도해야할 역사가 있다. 통사의 한 부위가 움푹, 살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파해야할 것을 충분히 아파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고 한 작가의 마음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