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6
처리되지 않은 감정들의 뭉텅이가 곧잘 짜증으로 표출됐다. 강하지 못하고 허약한 마음인라 감정에 휘둘리는 내가 미웠다. 나의 몸과 마음은 허기졌다.
그럴 때면 음식이 주는 위로에 온전히 나를 맡겼다. 권태인 지. 무력감인지 피곤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두고 질겅질겅 음식을 씹었다. 씹는 동안 감정들이 같이 씹히다 옅어졌다. 음식은 가장 친근하고 편안한 위로였다. 나에게 잘 맞는. 군더더기없는 가장 완벽한 위로.
p118~119
내 마음의 가장 큰 줄기는 '너'란다.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겠니? 엄마가 흔들릴 때 너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주겠니? 우왕좌왕하며 길을 고잘 헤매는 엄마가 너의 미소와 생각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너의 뒤에서 조그만 등이 점점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네 속도보다 앞서가지 않게. 아무리 고민해봐도 마음은 돌아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구나. '아이의 속도대로 차분차분 걸어봐. 네가 놓치며 산 세상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보며 너도 함께 걸어가봐'라고.
p124
아이들은 온화했던 엄마가. 자신들을 위해 수 없는 노고를 묵묵히 행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밑바닥을 내보일 때 당황한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기들 때문에 엄마가 힘들다고 자신들을 탓한다. 내가 견디기 힘든 부분은 여기다. 내 일상의 힘겨움과 감정을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전가해버리는 것. 살면서 내 밑바닥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왜 엄마가 된 지금 부정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분출하게 되는 걸까.
p125
어떤 기억을 더 많이 안고 아이들은 살아갈까. 나는 어떤 기억을 주로 남기고 노년에 곱씹고 살고 있을까. 나도 앙ㆍ들도 모를 일이다. 다만 아이들이 스쳐 지나갈 일까지 굳이 끌어안고 상처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상처라고 이름붙이고 나면 마음이 그 기억에 오랴 머물게 되므로. 나 역시 상처라고 이름 붙인 기억들을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 기억이 부풀려지고. 발목 잡힌 세월이 길었기 때문에.
p132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평가 절하했던 날들. 힘들게 애써 길러온 나의 능력과 자격들은 실은 우연으로 얻어진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살아온 날 들. 내가 기대한 값을 받지 못할 때의 상실감과 무력감. 깊어지는 열등감을 겪으며 나는 노력이 부족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들인 노력의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 시간에 담긴 노력은 나만의 경험과 노하우가 된다. 어떤 일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도망가고 싶은 일이 되기도 하고. 억지로 시작했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면 계속하는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해보는 것이다. 담대한 마음으로 버티며. 변수에 전전긍긍하지 않으며. 스스로 수긍할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며.
p190
엄마는 종종 엄마의 방법으로 내게 삶을 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살아보니 인생이 재밌는 날들의 연속도 아니고 좋은 일들의 연속도 아니다. 그날 그날 비슷한 듯 흘러가는 인생에 뭐 그렇게 특별한 재미가 있겠느냐. 삶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는 재미를 점같이 찍어보는 거지. 찍다 보면 계속 좀 재밌는 날도 있는 거지'
엄마는 이미 엄마의 일상에 점 같은 재미를 뿌려놓고 있었다. 점 같은 재미들 사이사이에서 엄마와 내가 찍힌다. 돌고 돌아왔지만. 지금도 헤매고 있지만 엄마가 지금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엄마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하면서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