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장석주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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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이 시선집은 1979년부터 2019년까지 시인이 펴낸 시집 가운데 절판된 아홉 권의 책에서 가려 뽑은 시로 엮었다.”(알려두기 中)

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내가 시인이 될 운명이라 믿고 지내던 몇 날이 있었다. 일상의 모든 일이 낯설고 새삼스러웠다. 벅찬 해가 떴다가 무장 슬프게 지는 날도 있었다. 그냥 그런 날들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처럼 나에게 왔다. 실감 나지 않은 일은 나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 뒤 잘 읽지 못하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시인이 말한 “눈꺼풀만큼 가벼운 우울로 빚은 시”를 몇 달에 걸쳐 곱씹다가는 바위만큼 무거운 우울로 가득 찬 이제야 내뱉게 되었다. 하도 오래 씹어 단물이 빠진 글자들이 이제야 마구 달려온다.

시를 짓는다는 것과 시를 먹는다는 것은. 아마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는 일. 내주는 자리에 엉덩이 온기 꾹 눌러놓고 가는 것, 넘겨받은 자리의 온기를 느끼며 기꺼이 앉는 일. 어제의 나는 “함부로 몸을 버려 오늘의 물속에 휘어져 숨”었고 오늘의 나는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하며 내일의 나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울 것” 이다. 아프고 적확한 시의 배치는 나의 입을 벌려 시를 먹게했다. 나는 순서대로 성실하게 씹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물 빠진 글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고 나는 또 읽는다.

시 없이 살아온 날보다 시와 살아진 날이 긴 시인은 말한다. “나는 문장노동자다, 라고 뻥을 쳤으나 / 두루마리 휴지 기백 기천 개나 쓰고 / 떠날 자들에 속할 따름이다 / 구두 밑창 몇 개도 닳아없앨 예정이다.” “노동으로 등이 휜 적이 없”는 절박한 문장노동의 증거를 4부에 남긴 단상으로 증명한다. 애써 알아봐 주어라 한 일 없지만 깊이 살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고라니의 울음 따위를 숙성시켜” 시로 빚어내는 시인의 둥그런 등을 본다. 시를 시인 줄 모르고 만지던 열다섯 소년의 등이 맞닿는다. 그들은 이제 막 서로를 기대어 앉는다.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다.

시는 제때 온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111쪽)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4쪽)
시가 내 차가운 이마를 콕 찍어 호명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내 안에 시의 싹이 조그맣게 돋아났으니 그건 우연의 일이고 신기한 사건이었다.(4쪽)
눈꺼풀만큼 가벼운 우울로 빚은 시를 골라 엮은 시집 한 권을 펴낸다.(5쪽)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13쪽)
(나의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어제의 물은 함부로 몸을 버려 오늘의 물속에 휘어져 숨고(17쪽)
(태안 저녁바다) 과거가 된 시간은 결코 돌아갈 수 없다(79쪽)
(물오리 일가) 나는 문장노동자다, 라고 뻥을 쳤으나 / 두루마리 휴지 기백 기천 개나 쓰고 / 떠날 자들에 속할 따름이다. / 구두 밑창 몇 개도 닳아없앨 예정이다.(108쪽)
138. 어둠 속의 울부짖는 고라니의 울음 따위를 숙성시켜 질박한 몇 줄의 언어를 얻겠다.(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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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픈 여자들 - 건강 문제를 겪는 젊은 여성들은 일, 우정, 연애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앳(at) 시리즈 2
미셸 렌트 허슈 지음, 정은주 옮김 / 마티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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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나 가장 반가웠던 것은 그 시절 내가 느꼈던 모든 종류의 상실감에 대해 나 대신 증언해주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질병 휴직 후 돌아간 직장에서는 "살 쪘다. 활기가 없어졌다. 텐션이 떨어졌다. 그래서 임신은 언제 할거냐. 엄마가 피부병이 있으면 아이한테도 그게 간다더라." 는 말이 마구 밀려왔다. 아픈 것에 대한 신체적 괴로움은 물론, 정신적인 어려움을 이해해 줄 사람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지혜롭게도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순서대로 배치해주었다. 활기를 강요받는 젊은 여성들과 여성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여성들. 또한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 체력의 한계를 넘어 무리하는 여성들. 의료진에게마저 공감받지 못하는 여성들은 또한 임신에 대한 강요와 두려움을 따라 읽어가다보니 그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든든한 "젊고 아픈 여성들"의 커뮤니티에 속하게 된 마음이 들었다.

1년 전, 남편과 함께 대학병원에 갔다. 무릎 관절 수술을 앞둔 시어머니를 모시고 수술 방법에 대한 설명과 입원 날짜를 지정받으러 간 것이었다. 대기하던 중 우리는 내 나이또래의 젊은 여성이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지나가기 무섭게 "젊은데 어쩌다가." 라고 말했던 내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하다.

"책을 읽게 되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된다." 글쓰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몰랐던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이유이다.

📎57쪽. 그러나 젊은 여성이 의학적인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반짝이는 청춘의 화사한 불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젊고 활기차 보이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고장 나 있다. 우리는 매력적이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61쪽. 건강에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든 아니면 그냥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든 간에 나는 그러지 않기를 선택했다.

📎 117쪽. 그래서 나는 다른 누구 못지 않게 나도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내가 받는 보수에 비해 더 열심히, 내 몸 상태에 비해 더 열심히,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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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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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었다. 사각거리는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9살의 내가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골라준 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팔꿈치와 무릎이 닳아 솜이 드러나있었다. 진한 분홍의 원래 색이 다 빠져버린 연분홍의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었다.

나는 이불을 비집고 들어가기 전 차가운 겨울 이불 위에 누워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 위에서 팔다리를 가위처럼 벌렸다 좁혔다 하며 시원한 이불의 촉감을 발과 손으로 더듬었다. 발을 까딱거려보기도 하고, 누운 채로 양발을 벽에 올려보기도 했다. 발꿈치와 발가락에 와닿는 벽지의 촉감이 이불의 버석거림과 닮아있었다.

신용목 시인의 소설 <재>를 읽고 아직 9년밖에 살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생각은 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리던 그때의 내가 했던 생각들. 이불 겉의 감촉과 벽의 질감을 느끼던 시간. 다급하게 잠뜻으로 향하던 길.

할머니는 내가 밤새 온 방을 굴러다닌다고 했다. 한방에서 함께 자는 언니들까지 발로 차고 다닌다고, 할머니는 그런 나를 잡으러 다니느라 깊은 잠을 들지 못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나를 벽과 당신 사이로 눕혀 재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 후 대학생이 되어 따로 방을 쓰게 될 때까지 그곳에서 잠들고 깼다.

"니는 잠뜻이 심해야." 할머니는 잠꼬대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심한 잠뜻으로 할머니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 벽지에 달라붙어 잠을 자려 노력했다. 나중에는 잠들기 전 이마에 닿는 시원한 벽의 온도가 나를 재워줬다.

다음날 눈을 뜨면 틀림없이 벽에 이마를 붙인 채로 잠에서 깨던 나는 어제저녁도 발을 굴렀다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갸우뚱했다. 어제의 잠이 먼 미래의 일인 것 같이 느껴져 이상했다.

꾼 적 없는 꿈속에 갇힌 듯했다.

그 무렵의 나는 잠뜻과 현실의 경계를 자주 옮겨 다녔다. 잠들기 전 할머니가 이부자리를 펴주고 화장실에 소변 누러 간 사이 내가 서걱거리는 이불 위에 누워있던 것인데.

벽지에 발을 올리고 벽을 타고 올라간 천장을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나는 누구지' 하고 다시 묻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이불 위의 차가움이 무서워졌다. 천장에서 시선을 돌리고 이불 안으로 숨어들면 될 텐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머니가 볼일을 보고 화장실 문을 닫는 소리가 나면 일순간 모든 것이 깨어졌다. 나는 따뜻한 이불 안으로 냉큼 들어가 눈을 감고 잠뜻을 하러 길을 떠났다.

아홉 살의 나에게 드는 이상한 궁금증이 무서워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시인이 "시의 마음을 담보로 소설의 몸을 빌렸"다고 한 이 이야기가 나의 아홉 살을 떠올리게 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다만 소설 속의 '나'를 둘러싼 이야기들과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이야기를 부족함 없이 들었기에 확실하게 슬퍼졌을 뿐이다. 화자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지난 일을 나에게만 들려주었기에 나 또한 그에게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일까 가늠해본다.

그리고 저만치 밀어두었던 이상한 아홉 살의 나를, 벽을 바라보고 잠뜻을 누르려 애썼던 나를 떠올린다.

너무 멀어 감히 그게 나였는지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는 그때의 나는 정말 있었을까. 내가 잠뜻을 하며 달리던 그곳은 정말 있었을까.

시인의 소설을 읽고 지금의 나는 먼 과거의 나와 그보다 더 먼 미래의 나를 동시에 마주하는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변해갈 것이고 우리의 시간도 달라지겠지"만 분명 나는 그곳에 있었다.

모와 현, 섭과 수의 이야기 가운데 놓인 화자가 갈지자를 그리며 얼기설기 온몸으로 엮어가는 이야기를 눈만 따라 쉽게 읽어버린 내가 금방 미안해졌다.

함께 발을 동동 구르고 잠뜻을 향해 내달리다가는 미리 꾼 꿈인지 이미 꾼 꿈인지 몰라 갸우뚱하고 싶다.

"대지를 잃어버린" 화자의 등을 두드려 재워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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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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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치에 앉아 있는데 무릎으로 툭, 떨어지던 노란 은행잎 한 장 - 무릎에 노란 멍이 들게 한, 그 멍을 보고 비로소 가을이 왔구나, 가슴 철렁하게 만든 - 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박연준 산문집, 《소란》, <겨울 바다, 껍질> 중)

•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불쑥 돋아난 이후로, 내 생은 저 떨어지기 직전 '가을 나뭇잎의 소란' 같다고.(박연준 산문집, 《소란》, <일곱 살 클레멘타인> 중)

🙏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노란 잎을 줍는다. 작고 예쁘거나 크고 색이 선명한 놈들을 골라 줍는다. 그러고는 그맘때 읽고 있는 책에 끼워 넣는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면서도 '난 기억할 거야' 장담하며 책장을 숭텅숭텅 넘기며 적당해 보이는 중간쯤에 끼워 넣는 것이다.

올해의 노란 잎은 소란과 함께 왔다. 시인의 산문은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하고 '무릎에 노란 멍이 들게'하고 '가을 나뭇잎의 소란'을 알아차리게 한다. 박연준 시인의 시보다 산문을 먼저 마주한 일이 아쉽기까지 하다.

나는 오늘도 노란 잎을 주워왔다. 차가 지나는 길 옆에서 주워온 잎이라 물휴지로 닦아 말렸다. 잎 앞면과 뒷면에서 까만 때가 묻어 나온다. 5년 전의 나였다면 노란 잎을 닦았을까 닦지 않았을까. 5년 후의 나도 여전히 노란 잎을 줍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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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 안온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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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때로 이 '기본'이라는 지나치게 확고한 단어는, '기본' 바깥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맥락과 상황을 쉽게 지우기도 한다.(김혼비, 다정소감 103쪽)
• 게다가 '기본'이라는 단어에는 기본에 미치지 못하는 한 부분을 그 사람의 전체로 확장해버리는 힘이 있다.(김혼비, 다정소감 103쪽)

🙏

수학을 잘 하지 못했다. 문제 풀이의 1단계까지는 어찌어찌 다가가는데도 2단계 3단계까지의 깊은 사고가 필요한 응용 수학은 나로 하여금 문제 풀이집을 펼치게 했다. 나중에 공학을 전공하면서도 자주 문제 풀이를 엿보고 훔쳐보고 외워보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며 사유하는 과정이 자유자재로 깊게 넓게 멀리 나아가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게 되는 날에는 참지 못하고 그들의 문제풀이집을 미리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김혼비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사유의 겹이 1단계에서 2단계, 3단계로 나아가는데 매번 그 과정에 생각지 못했던 감동과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홀쭉한 입구에 들어섰다가도 어느새 넓은 광장을 만났다가 다시 홀쭉한 정반대의 출구로 나오는 기분이랄까.

결론은 김혼비 작가에게 축구도 배우고 싶고 책 읽는 법도 배우고 싶고 생각하는 법도 배우고 싶다. 미래의 그녀가 할 생각도 그녀가 쓸 글도 모두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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