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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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풍경이 낯선 나를 만든다

여행하지 않은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 오랫동안 품어왔던 멋진 환상과 그와 일치하지 않는 현실. 여행의 경험이 일천한 이들은 마치 멀미를 하듯 혼란을 겪는다. 반면 경험 풍부한 여행자들은 눈앞의 현실에 맞춰 즉각적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수정한다_36


난 여행 경험이 많지 않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때 떠났던 단 한 번의 기차 여행으로도, 내 삶에 있어 여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백지 같은 시절에 떠났던 기차 여행이 곧 내 삶의 밑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난 동네와 학교 바깥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기차를 타고 전국 곳곳을 일주일 간 돌아다닌 경험은 가히 인생 최고의 탐험이었다. 그랬기에 수도권을 벗어나 마주하게 된 지방 소도시의 풍경들이 더욱 충격적으로 와닿았는지 모른다.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첫 여행의 환상과 일치하지 않는 황량한 현실에 멀미를 하듯 혼란을 겪었던 걸지도.


두 발로 직접 누비며 보게 된 지방 소도시의 풍경은 상당히 삭막한 느낌이었는데, 각 지역의 중심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고 도시 인프라 자체도 수도권과 상당한 격차를 보였다. 수도권에서는 흔하디 흔한 편의점과 찜질방 같은 편의시설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수도권에서는 늘 편리하게 이용하던 대중교통 또한 배차간격이 너무 길어 애를 먹곤 했다. 더욱이 여행을 할수록 이 도시나, 저 도시나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들.


당시 국문학과였던 난 그 한 번의 여행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도시들을 제각각 차별화된 정체성과 매력을 지닌 멋진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도시계획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단 한 번의 여행에서 마주하게 된 낯선 풍경들이 인생을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 것이다.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는 생각과 경험의 관계를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에 비유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가는 개와 주인처럼, 생각과 경험 역시 서로가 서로를 이끄는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_81


여행에서 마주하는 낯선 풍경과 경험은 낯선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그 낯선 생각이 때로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킨다. 나의 생애 첫 기차여행은 일주일 간의 대장정이었고, 그 때문에 친구와 꽤나 꼼꼼하게 여행 계획을 세웠던 기억이 난다. 실제 여행 역시 대부분 그 계획을 따라 이뤄졌으니 생각을 따라 경험한 격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고, 국문학과에서 과감하게 도시계획으로 전공을 바꾸게 됐다. 여행에서의 경험이 날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든 것이다. 여행이 주는 낯설음은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자 새로운 자아실현의 가능성이다.



일상과 책임의 부재에서 나를 되찾는 자발적 방랑의 즐거움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_206


여행을 꿈꾸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바로 무료한 일상에 넌더리가 날 때쯤 아닐까. 대학교 때 나에게 여행이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면, 어느덧 사회생활에 찌든 지금의 나에게 여행은 그저 단비 같은 휴식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한 회사의 직원,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사실 평범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백조가 물 밑에서 쉼 없이 발길질해야 물 위에서 우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한 회사의 일원으로서 주어지는 업무와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주어지는 책임을 쉼 없이 다 해내야만 평온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매번 반복되어 무료함이 커지는 순간에도, 매번 치열하게 버텨내야만 하는 일상이 끝없이 계속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에너지 소모가 큰일이다. 때로는 모든 책임으로부터의 무책임해질 수 있는, 오로지 매 순간에 충실하며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탈을 자연스레 꿈꾸게 된다.


매일 똑같이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 문득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찾아들 때. 평범한 일상 자체가 목을 죄어와 숨 막힐 듯한 갑갑함을 느낀다면, 그때야말로 일상을 과감히 팽개치고 떠나야 할 때다. 늘 하루에 대한 아쉬움과 내일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한 무게감에 뒤척이던 일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삶에 있어 큰 위안이 된다. 내가 가보고 싶은 곳, 먹어보고 싶은 음식, 해보고 싶던 일을 여유로운 시간 속에 별다른 걱정 없이 누리는 것만으로도 매 순간이 즐거움과 행복으로 충만하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 속에서 만끽하는 일상의 부재는 계란 노른자 마냥 퍽퍽했던 일상에 사이다 같은 해방감을 안겨준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무뎌졌던 감성과 감각이 낯선 자극에 마구 환호성을 지르며 활기를 되찾는다. 일상과 책임이 부재한 시공간에서 온전한 나를 되찾음으로써 누리는 휴식의 달콤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안전한 일상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떠도는 자발적 방랑을 자처하는지 모른다.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_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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