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돈을 손에쥐기도 전에 잃어버렸음을 깨달았고, 오래전부터 예감한 일이사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는 떠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의 그늘 속으로 숨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 바깥, 마을 외부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몹시 낯설고 불확실한 무엇일 따름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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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가 덧붙였다. "물론 네 아버지는 그사이에 내가 너한테 구혼해서 네 생각을 돌려놓길 원해."
"그건 불가능해요!" 게르다가 간신히 내뱉었다.
"그래, 우리 사이엔 불가능한 일이지." 울리히가 부드럽게 반복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될 수도 없어. 난 너무 멀리 갔어." 그는 웃으려고했다. 그러는 자신이 너무 역겨웠다. 이 모든 건 그가 정말 원치 않는일이었다. 문득 영혼의 우유부단함을 느끼며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영혼의 우유부단함이 그의 내면에 잔인함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순간 게르다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가너무 가깝게 다가간 불꽃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형체는 없고 의지를마비시키는 온기만 있는 불꽃이었다.
"언제 한번 날 찾아와!" 그가 제안했다. "여기서는 편하게 얘기할 수가 없어." 그의 눈에 수컷의 무자비한 공허함이 흘렀다.
"싫어요." 게르다는 거부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렸다. 울리히는 그녀가 마치 이렇게 눈을 돌린 뒤에야 자기 앞에 다시 솟구쳐오르기라도한 것처럼 그녀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힘겹게 숨을 쉬고 있는, 아름답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아가씨를.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 P256

특별한 구원이 필요할 거라고 덧붙였다.
리오티마의 이 말은 아른하임의 가슴에서 솟아난 것만 같았다.
리오티마가 이 말을 했던 순간은 어떤 음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꽉박힌 트럼펫처럼 피가 거꾸로 솟는, 자아와 대상을 동시에 뛰어넘는 순가들 중 하나였다. 이럴 때는 의미가 없는 것이란 없었다. 반 고흐의 그림처럼 방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특별한 대상이 된 벽선반 위의작은 컵에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에 부풀려지고 뾰쪽해진 채 공간 속을 밀고 들어가는 것 같은 인간의 몸에 이르기까지.
당시 디오티마는 자기 말에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농담으로 한말이에요. 유머는 참 멋져요. 온갖 욕망에서 벗어나 모든 현상들 위에무심하게 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아른하임은 싱긋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디오티마를 갈기갈기 찢는다면, 내가 포효하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면, 내가 목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위해 내가슴속의 심장을 끄집어낸다면 혹시 기적이 일어날까?‘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다 감정이 식어가면서 생각도 멈췄다.
이 장면이 지금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발밑의 거리를 또다시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진정으로 구원의 기적은 일어나야 해!‘ 그는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런 생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선 먼저 새로운유형의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야 해.‘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는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어쨌든 전부 달라져야했다. 아른하임은 반시간 전에 편지와 전보를 보내기 위해 앉아 있던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벨을 눌러 졸리만을 부르더니 비서를 데비슷한 일이 일어나다 201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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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되어갑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어떤 분이 뭘 원하는지, 거기에 뜻는 책은 무엇인지 척 보면 알게 되었지요‘
‘이보시오‘ 내가 말했소 ‘그래도 난 내가 찾는 책이 어떤 건지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가 없소!‘
이 말에 노인이 뭐라고 한 줄 아시오? 노인은 겸손하게 나를 바라보.
•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소. 외람된 말씀이오나, 장군님, 문득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장군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장군님께서도 아시는 분일 듯합니다. 외무성에 근무하시는 투치 국장님의 부인이시죠‘
자, 이제 뭐라 하시겠소? 나는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소.
노인도 그걸 눈치챘는지, 디오티마가 예약해둔 책을 모두 가져다주었소. 내가 이제 도서관에 가게 되면 우리 둘은 남들이 모르는 정신적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소? 나는 가끔 책장 가장자리에연필로 조심스럽게 어떤 신호나 말을 써둘 거요. 그러면 디오티마가 다음날 그걸 보겠죠. 그게 무슨 뜻인지 고민하는 동안 누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지 전혀 모른 채 말이오."
장군은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쉬고는 곧 다시 힘을 냈다. 얼굴에서 씁쓰레한 진지함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 최대한 집중해서 들어주시오. 우리 시대가역사적으로 가장 질서정연한 시대라는 점에 대해선 다들 꽤 확신하고있소. 언젠가 난 디오티마 앞에서 그런 생각을 선입견이라고 했소. 물론 나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런데 정말 믿을 만한정신적 질서가 유일하게 도서관 하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 P204

었다. "당신의 친구, 장군이에요! 대체 그 인간은 원하는 게 뭐죠? 여긴왜 나타나는 거죠? 게다가 왜 항상 날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거죠?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사촌이 대답했다.
•디오티마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 사람을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 걸 알아요? 난 그 사람을 보면 죽음이 생각나요!"
"선입견 없이 보면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죽음입니다!"
"난 선입견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거나, 내가 ‘탁월한‘ 이념들을 ‘탁월한‘ 모임에서 ‘탁월하게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패닉 상태에빠져요 뭐라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몽환적인 공포가 밀려든다고요!"
"그 사람에 대한 공포인가요?"
"그럼 누구겠어요? 그 사람은 하이에나예요."
울리히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마구 비난을 쏟아냈다. "그 사람은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면서 우리의 아름다운 노력들이 완전히 붕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게 그건가보군요! 위대한 사촌, 혹시 기억하십니까? 내가 예전부터 당신한테 그 붕괴를 예언해온 걸? 붕괴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당신도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디오티마는 오만한 표정으로 울리히를 노려보았다. 예전에 울리히가 했던 그 말은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자신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했던 말도 이 순간 똑똑히기억났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그때 그녀는 한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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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많은 사람이 날마다 똑같은 연인의 얼굴을 보면서도 눈을 감는 순간 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하지 못하는가! 혹은 사랑과 미움이 없변하는가! 기쁨은 얼마나 쉽게 가라앉고, 깨지지 않는 슬픔의 씨는 얼마나 불쑥불쑥 싹을 틔우는가?! 또 인간은 평화롭게 내버려둘 수 있는타인을 얼마나 태연히 때리곤 하는가! 삶은 지금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표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밑에서는 여러 사물는 경우는 어떤가? 사물은 습관과 기분, 관점에 따라 얼마나 끊임없이이 어지럽게 서로를 몰아대고 밀친다. 모스브루거는 갈라진 두 땅을 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서서 그 땅을 붙이려고 애썼다. 자신을 혼란스럽게하는 것들을 피하려고 이성적으로 노력하면서. 그러나 간혹 그의 입에서 한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그러면 떡갈나무고양이나 장미 입술처럼차갑게 식은 이중적 단어에서 사물들의 혁명과 꿈이 어찌나 강렬하게샘솟던지!
그는 잠자리 겸 탁자로 쓰는 길쭉한 침상에 앉아 교육을 받지 못해자기 경험조차 적절히 표현할 줄 모르는 자신을 한탄했다. 벌써 오래전에 땅 밑에 누워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심한 불쾌감을 유발하는E의 작은 여자 때문에 화가 났다. 모두가 그 여자 편만 들고 있었나는 굼뜨게 일어났다. 다 타버린 나무처럼 온몸이 푸석푸석한 느ㅣ었다. 또다시 배가 고팠다. 감옥의 음식은 건장한 남자에게는 턱도이 적었다. 그렇다고 더 나은 식사를 가능하게 해줄 돈도 없었다. 이상태에서는 남들이 알고 싶어하는 일을 기억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어・쨋든 변화는 며칠, 몇 주에 걸쳐 3월이 가고 4월이 가듯 찾아왔고, 그러다 그 일이 일어났다. 그는 그 일에 대해 경찰조서에 기록된 것 말고는 - P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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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특성 없는 남자는 남자 없는 특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날 저녁 울리히는 오지 않았다. 피셸 이사가 서둘러 떠난다시 청년기의 물음이 그를 사로잡았다. 왜 세상 사람들은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져 있고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진실이 아닌 말을 그렇게소름 끼치게 선호하는 것일까? ‘거짓말을 하면 항상 한 걸음을 앞서는거야.‘ 그는 생각했다. ‘피셸 이사한테도 이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울리히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열정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항상 되풀이해서 그를 그런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있었다. 그것도 열정이겠지만, 흥분 상태와 흥분에 찬 행동에서 나타나는 그의 태도는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무관심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무언가 자신의 행위 충동을 자극하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해도 언제든 미친듯이 달려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라서 그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별로 과장은아닌듯하다. 그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그의 것이라기보다 삶을구성하는 것들 서로의 것이라고. A 다음에는 항상 B가 왔다. 그 결과를낳은 것이 다툼이건 사랑이건 간에. 그래서 그도 그 과정에서 획득한개인적 특성들이 자기 것이라기보다 특성들 서로의 것에 가깝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져보면, 개별적 특성 하나하나는 그것들을 갖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자신과 더 내밀한 관계에 있다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그 특성들로 규정되고 그 특성들로 이루어졌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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