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얼마나 자주 책장에 꽂힌 문고본들로 돌아가라스티냐크와 펠리시 카르도와 보트랭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가. 지금 보트랭은 어디 있지?" 언젠가 어머니는 잠에서 막 깨어나, 누구와 대화하는지도 모르는지 비몽사몽 상태로 내게 물었다. 아서 코난 도일은 발자크의 소설을 절대로 읽지 않는다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주요 인물들이 어디에서, 언제 처음 등장하는지 찾기도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인간 희극‘ 총서 전체를 꿰고 있었다.
나는 그 총서 가운데 어느 책에서 어머니가 기록되지 않은 자기 삶을 발견했을지 궁금해졌다. 그 소설들 속 흩어진 인물들중 누구의 인생을 통해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인간 희극‘에서 「소의 무도회에는라스티냐크가 나오지 않으며, 그럼에도 끊임없이 언급된다는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소의 무도회」를 책장에서 꺼내 훑어보았다. 그런데 122쪽과 123쪽 사이에누군가 손으로 그린 지도가 꽂혀 있었다.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 종이에, 백악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지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종잇조각일지도 모른다. - P230

그러다 마시의 가족이 다시 누워 있는 그를 날라서 수레에태워 사라졌다. 로즈의 집 안에 다시 정적이 들어찼다. 이후몇 달 동안 로즈와 부모는 펠론가 남자들이 새로 둥지를 틀숲을 발견한 까마귀들처럼 멀리 떨어진 마을로 가서 또 다른집 지붕을 고치고 있다는 소식을 왕왕 들었다. 그러나 막내마시는 자유 시간만 주어지면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고치려고노력했다. 어둠 속에서 깨어나 자기 가족이 이엉을 올린 집들을 지나쳐 걸어가거나, 어둠이 흩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리버 밸리로 내려가곤 했다. 마시 펠론은 바로 그렇게 긴장감이흐르는 새로운 빛이 번지는 시간에 대한 묘사를 책에서 찾기시작했다. 작가들이 줄거리에서 벗어나 그처럼 특별한 시간을묘사하려 하는 걸 보면 이 역시 작가들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저녁마다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형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엉을 엮고 이는 기술을 알면서도 자신은 가족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237

마시 펠론이라는 사람은 주변 세상을 공부하고 흡수하고 싶어 했다. 이 년 뒤 청년이 된 그를 다시 만난 로즈의 가족은 마시를 못 알아볼 뻔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벌써 진중해졌고, 더 넓은 세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찬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로즈의 부모는 그가 어린 시절 부상을 입고 고독을 누렸을 때처럼 그를 다시금 거둬 주었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대학 교육에 드는 비용을 지원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자기 가족을 근본적으로 떠난 셈이었다. - P238

두운 도로를 따라 차를 몰다가 옆자리에 앉은 그의 담뱃불을붙여 주느라 희끗한 손이 속도계 아래에서 황금빛으로 빛날때, 팰론은 그녀를 욕망했다. 그녀의 구석구석을 그녀의 입,
귀, 푸른 눈, 허벅지의 떨림, 걷어 올려진 채 구겨진 치맛자락까지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걸까? 그는 자신의 손이그런 부위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한 떨림을 제외한 모든 것이머릿속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자신에게 용납하지 않은 한 가지는, 그녀에게 어떻게보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지성이든 인품이든 자신의 무엇인가가 여자를 끌어당겼다면 그걸로 그녀를 유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남자로서 유혹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느꼈다. 망설임도 동의도 없이 그녀를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각에 잠긴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그렇다면 로즈, 내 어머니는?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펠론이 그녀를 이 모험으로 끌어들인 걸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선생과 학생으로서 이 떨리는 우주에 들어섰다고 믿고 싶다. 이는 단지 육체적인 사랑과 욕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일과 관련된 기술과 가능성들을 아우르는 문제였다. 서로 연락이 끊어지면퇴각하는 방법. 열차에서 상대방이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에무기를 은닉하는 기술, 사람에게서 비이성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부숴야 하는 손뼈나 얼굴뼈. 이런 모든 것, 더 나아가어둠 속에서 둘 사이에 모스 부호가 교신된 듯이 그녀가 깨어나기를소망하는 그의 바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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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룻밤 자자"
그녀가 말했다. 개들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자 우리는 옆 바닥에 누워 잤다. 우리를 둘러싼 동물들이 우리가 동경하던 삶이자, 우리가 원하던 친구이며, 그 시절 런던에서 불필요하고도필수적이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순간이라는 듯이 깨어나 보니 개 한 마리가 갸름한 얼굴을 내 얼굴 옆에 누인 채 꿈속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차분히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다 잠에서 깬 나의 숨소리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고눈을 뜨더니, 자세를 바꾸고는 앞발을 내 이마에 살짝 내려놓았다. 나를 향한 세심한 연민이나 우월감을 뜻하는 제스처 같았다. 그 손짓이 지혜롭게 느껴졌다.
"넌 어디서 왔어? 어느 나라? 말해 줄래?"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애그니스가 옷을입은 채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서서 내가 하는 행동을지켜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榮輝월즈엔드의 애그니스. 애그니스 스트리트의 애그니스 밀힐의 애그니스 칵테일 드레스를 잃어버렸다던 라임버너 야드의 애그니스. 내 삶에서 이 부분은 화살도 나방도 공유해서는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라진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애그니스의 세상은내가 홀로 도피하는 곳이었다. - P119

그는 애그니스의 부모님과도 잘 지냈지만 애그니스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애그니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화살의 눈으로 그녀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면면을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식사 후 애그니스는 우리를 배웅하러 아파트 계단을 함께 내려가 차 앞까지 갔다. "그럼 그렇지! 저번에 개들을 데려왔던 그모리스네!" 화살에게 아버지 행세를 시키면서 내가 느꼈던 초조함은 그녀의 한마디에 잦아들었다. 그날 이후로 애그니스와나는 내 아버지의 과장스러운 예의를 언급하며 킥킥거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가짜 아버지가 빌린 바지선을 누나와 함께타고 강을 떠다닐 때면 우리 셋이 그럴듯한 가족으로 보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P139

화살은 신문이나 개 경주 소식지를 볼 때면 다리를 꼬고앉아 한쪽 허벅지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피곤한 사람처럼 한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늘 똑같은 자세였다. 어느 날 오후 배를 탈 때 애그니스가 일요 신문의 흥미진진한 기사들에파묻혀 있는 화살을 스케치하는 것 같길래, 나는 일어나서 그녀 뒤를 지나쳐 걸어가며 그림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폭풍이불던 날 정육점 포장지에 그려 준 그림을 제외하고 내가 본 그녀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그림에 담긴사람은 화살이 아니라 나였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자기 자신을 아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타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그 사람이 내 진짜 모습, 혹은미래의 내 모습인 듯했다. 그때도 나는 그 그림이 진실을 담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에 대해 그린 그림이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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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하기 전, 어머니는 내게 수학 과외를 해 달라고 나방을 설득하는 데 꽤나 시간을 들였다. 수학은 내가 못하는 과목이었고, 사실 나방이 나를 가르치려는 노력을 접은 뒤에도 오래도록 그렇게 남았다. 우리의 후견인은 내게 기하학의 정리를이해시키기 위해 삼차원에 가까운 그림들을 그렸는데, 그가 지넌 내면의 복잡성을 엿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때뿐이었다. - P20

 우리가 새 학교로 떠나기 얼마 전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거실 구석에서 우리 셔츠를 다림질하고, 나방은 어디 나가려는 것처럽 계단 아래에 서서, 반쯤만 우리 가족에 속한 듯한 모양새로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열더니, 통금 시간에 어둠 속에서 남자들을 싣고서 ‘버크셔 부대‘로 데려가려기 위해 해안을 향해 야간 운전을 하던 어머니의 운전 기술이 어땠는지 이야기했다. 그때 어머니가 졸음을 피한 건 순전히 ‘초콜릿 몇 조각과 열린 차창에서 들이치는 찬바람‘ 덕분이었다고했다. 나방이 이야기를 이어 가는 동안 어머니는 그의 묘사에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칼라를 태우지 않으려고 오른손에 쥔 다리미를 허공에 든 채, 그늘이 드리운 그 이야기에완전히 집중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뛰어넘었다. 언젠가는어머니가 베드퍼드셔의 칙샌즈 수도원, 그리고 그로스브너 하우스 호텔 옥상의 "새 둥지"에서 헤드폰을 끼고 이쯤에서누나와 나는 이곳이 ‘화재 감시‘와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나오는 복잡한 주파수에 귀를 바싹 기울이며 독일군의 메시지를 가로채 영국 해협너머로 전송하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지닌 존재임을 알아 가고있었다. 그 아름답고 흰 팔과 섬세한 손가락으로, 명확한 의]아래 사람을 쏘아 죽인 적도 있었을까?  - P21

하게 뛰어 올라가는 모습에선 운동에 익숙한 몸놀림이 엿보였다. 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점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부터 학기 시작을 앞두고 자신도 떠나기 전까지 한 달 동안,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더욱더 놀랍고 개인적인 면모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지난날을 회고하는 나방을 지켜보며 뜨거운 다리미를 허공에 들고 있었던 짧은 순간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인상을 남겼다. - P22

그는 서늘한 지하실에서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나는그를 뿌리치고 위층으로 돌아가, 불 꺼진 거실의 가스난로 앞에 앉았다. 곧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거실을 지나쳐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만약 내 유년 시절에서 제일 먼저 기억나는 장면을 하나 들라고 한다면, 나는바로 그날 누나가 사라진 뒤 밤의 어둠에 잠겨 있던 집안 정경을 꼽을 것이다. - P39

10월의 돌풍이 몰아치는 저녁,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어둠에 잠겨 있노라면 담장이 부르르 떨며 동해의 바람을 머리위로 몰아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 더욱 따뜻해진 이어둠 속에서, 그 무엇도 내가 발견한 고독을 침범하거나 부술 수없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과거로부터 보호받는 듯하다. 나방에게 연이어 질문을 던지며 미지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애쓰던 때, 가스난로 불빛이 비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아직두려웠던 시절의 과거. 혹은 십대 시절 연인을 움직여 깨우던과거. 비록 그 시절을 돌이켜 보는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말이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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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라도 더 벌려고 했다. 작업의 주문은 도시에서 얻어 왔다. 돈은 주조된 자유였으며,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귀중한 것이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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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게 비추고 있고, 숨막힐고 좁고 후텁지근한 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10여 년을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상위에 나의 몫이란 세 장의 판자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나의 모든 공간이었다. 이 방 안의 평상에만도 30명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겨울에는 일찍 빗장을 지르는 까닭에 모두들 잠들 때까지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웃음, 욕설, 쇠사슬리, 악취와 그을음, 삭발한 머리들과 낙인 찍힌 얼굴들, 남루한 의복, 이 모든 것이 욕설과 혹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다.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 P22

폐지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단지 일반 군 죄수 중대 하나만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물론 관리들도 이러한새 제도와 함께 경질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아마도 나는 이미지나가버리고, 흘러가 버린 옛일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이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나는지금 이 모든 것을 꿈꾼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던 때가 기억난다. 10월의 어느 저녁 무렵,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터에서 돌아와 검사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콧수염을 기른 하사관 한 명이 마침내 내가 몇 해를 보내야 하고, 실제로 내가 체험하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그런 감각을 가져다 주는, 이 이상한 집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유형살이를 해야 할 10년 동안 결코 한 번도, 결코 1분도 나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가공스럽고 고통스러운 사실을조금도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터에서는 항상 감시병의 눈길 아래, 옥사에서는 2백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있어서한 번도, 결코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직 이 일에만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었을까!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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