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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1941
조두진 지음 / 이정서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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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두진 작가의 책을 접했다.

그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도모유키’와 거의 버금갈 정도로 이 책도 감동적인 수작이다. 거친 역사의 격랑 속에서 물거품처럼 생겨났다 소멸하는 개인들의 사랑과 운명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두 책은 닮아 있다. 마지막 장까지 숨 막히는 속도감으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분명 작가의 탁월한 역량 덕분이리라.


1941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시절이 시대적 배경이다. 김구 주석과 스탈린도 등장한다. 물자와 무기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김구는 소련 스파이에게 군사정보를 넘긴 일본 고위관료인 오자키를 데려오는 대가로 소련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며 남기는 무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인계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스탈린은 미소를 띠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도쿄배달조’가 꾸려졌다. 오자키를 충칭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부여받은 이는 유상길, 최윤기. 서우진. 김지언 네 사람이다. 유일한 여성대원 김지언은 전투대원이 아니었으나 선발된 이유는, 만약 일이 여의치 않을 경우 미인계를 써볼 윗선의 계획 때문이다. 서우진과 김지언은 연인 사이다.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하는 시점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마치 순식간에 바뀌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묘사가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한다. 오자키를 데리고 충칭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험난하다.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는다. 최윤기는 그의 고향 합천에서 일본군 총에 맞아 쓰러지고, 김지언 또한 서우진의 등에서 최후를 맞는다.


작가는 김지언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했다. “김지언은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지금 미소 짓고 있다고 느꼈다. 양쯔강 하늘로 울려 퍼지던 서우진의 맑은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귓가에 맴도는 것은 서우진의 거친 숨소리였다. 안개 짙은 이른 아침처럼 눈앞이 흐릿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최후는 고통스럽지만 하늘처럼 충만하고, 그것은 순간이지만 영원처럼 깊다. 그래서, “한순간만이라도 영원처럼 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영원하다. 한 순간만이라도 털끝만큼의 빈틈도 없이 충만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라는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문장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도쿄배달조는 오자키를 스탈린에게 넘겼다. 임무는 완수되었다. 서우진은 임시정부를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몇 년간 중국 흑룡강성 일대와 소련의 북부 산림지역을 떠돌며 살다가 우연히 옛 동지를 만나 스탈린이 무기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는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허탈하게 되묻는다. “그럼 우리가 수행했던 임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시대와 상황을 만난다. 그 구체적 역사성 속에서 개인은 때로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다.

“누구보다 대한독립을 소망하는 것도 사실이다.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작전에 임했다. 임무 수행 중에 죽을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작전 참가를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살고, 김지언이 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라고 했던 서우진은 이 어이없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그러나 거친 역사의 파도 속에서 한 개인의 이런 질문은 물거품보다 가볍게 스러지게 마련이다. 소수 권력자의 가벼운 약속과 결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운명을 망가뜨려도 그저 역사라는 거대 서사 속에 파묻히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모든 파도가 물거품으로 이루어졌듯 거친 역사의 주재자도 역시 인간이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 뜨거운 피를 지닌 인간. 자각과 자존을 가진 인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가진 인간.....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것을 기억하라고 시종일관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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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의 밤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미덕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섣불리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이기도 한 역사에 대한 통념을 저만치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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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북성로의 밤(체험판)
조두진 / 한겨레출판 / 2012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최근 ‘대구 근대 골목’이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골목도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좀 의외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구의 도심 골목 곳곳마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성로 또한 근대가 남긴 유명한 골목이다. 그 시절 대구에서 가장 번성하던 골목이 바로 북성로였다.

 

이 책 <북성로의 밤>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북성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성로는 남성로 동성로 서성로와 함께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난 뒤 생겨난 거리 명칭이다. 대구 읍성은 1906년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인 경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이 일본거류민단과 짜고 허물었다. 성벽을 경계로 성내는 조선인이, 성밖에는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인이 성내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성벽이 커다란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성벽이 허물어지자 이재에 밝은 일본상인들이 대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건물이 미나카이 백화점이다.

 

책은 미나카이 백화점 사장인 마카에 도미주로가 백화점 앞을 비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카에 도미주로는 처음엔 포목점부터 열었으나 일본군의 위세와 경부선 개통으로 인한 교통발전에 힘입어 북성로에 미나카이 백화점을 세우고 전국에 수많은 지점까지 세운 대재벌로 성장한다. 이야기는 그 미나카이 백화점의 조선인 배달부 노정주와 그의 사촌형인 노태영과 노치영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내몬다. 자신과 제 가족의 배를 채워주지 못한 나라 ‘조선’에 ‘분노’를 느낀 형 태영은 일본 순사가 되었고, 내 나라 조선을 빼앗은 일본에 ‘분노’한 동생 치영은 독립운동조직에 가입한다.

 

“어리석은 놈들이 총이나 몇 방 쏘아대고, 만세나 외치면 독립이 되는 줄 안다. 나라가 망하고 서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놈들이야말로 여러 사람 고생만 시키는 것이다. 제 놈이야 좋아서 그런다 치자. 제 한 몸뚱이야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다 죽는다고 치자. 가족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천날만날 경찰서에 불려다니며 욕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야?” -31쪽. (태영의 말).

 

“조직과 연결된 뒤로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잃은 적이 없었다. 제 한 몸을 태워 조선의 앞날을 밝힐 수 있다면 얼마든지 횃불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때때로 그런 결기가 사무치는 날이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207쪽 (치영의 말)

 

“형님, 돈이 없으면 제 집도 적막강산이고, 돈이 있으면 어디라도 금수강산입니다. 돈만 있으면 개도 첨지가 되는 세상 아닙니까? 저는 일본인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니라 돈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69쪽 (정주의 말)

 

이 세 주인공들의 말에서 그들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신념은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서 형성된 자신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상황과 조건이 다르면 선택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들의 선택이나 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확정지을 수 없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예전에 이런 류의 질문들이 마치 심오한 철학적 명제처럼 세간에 유행한 적 있다. 만약 누가 또다시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대답 또한 개운치 않은 건 사실이다. 나는 밥을 벌기 위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지금도 얼마나 허덕이고 있는가 말이다.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처음부터 밀려나 허기진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오로지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비참하고 비루한 인생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아무튼, 사람에게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래. 먹어야 산다. ‘나’도 ‘너’도 먹어야 사는 동물이다. 모든 개체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진리다. 그렇다면 나는 오로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아니다. 사람은 먹어야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긴 하지만 단지 먹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사는가?

 

‘무엇 때문에’, 혹은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은 삶에서 철학과 신념과 삶의 가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밥’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즉 그 질문을 할 때부터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사회는 생물학적 개체인 수많은 ‘나’들이 모인 ‘우리’다. 그것은 달리 말해 수많은 신념/가치가 모여 만들어진 어떤 덩어리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결국은 다양한 신념/가치의 흐름이고 그 역동성이다. 그래서 개인에게는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고, 사회에선 신념/가치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빵을 달라”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어떤 차원에선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간단히 말해,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란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와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신념의 ‘자유’가 늘 부딪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어쩌면 그 두 ‘자유’가 싸우는 곳이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역사라는 것도 상호작용하는 이 두 힘들의 역동적인 변화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랄까. 이 두 힘은 서로를 견제하거나 밀어내면서 혹은 서로를 되먹임하면서 균형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틈새에 음모와 투쟁이 기생하고 증오가 범람한다. 때로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도 불사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먹을 것(재화)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도 있지만 신념/이념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도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언제나 이 두 힘들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 운명은 개인의 것이지만 역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개인의 운명이 더 격하게 휘둘리게 된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일제의 순사를 할 수도 있고,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만주 땅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후대를 사는 우리들 중 누가,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이 책 <북성로의 밤>은 독자인 우리에게 그것을 시종일관 묻고 있다.

 

“신념을 팔아서 배를 채우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배를 채우는 것이 내 신념이다.”

 

형제간에 주고받은 이 두 문장의 대화는 이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 두 문장에 압축되어 있는지 모른다.

 

“배를 채우는 것이 내 신념이다”라는 태영의 말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무 전망도 희망도 없는 세월을 살아내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으니까. 그런 때일수록 더욱 더 가족의 생존과 안위가 절실하니까. 태영에게 지켜야 할 ‘우리’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동생 치영에게 지켜야 할 ‘우리’는 조선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집단을 긍정함으로써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잠재의식이 있지만, 형제간에도 그 동일시하는 ‘우리’가 이처럼 다르다. 비극이 탄생하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마침내 신념의 차이는 극에 달하여 형제간에도 서로를 죽여야 할 정도로 커진다. 독립운동가 치영은 친형인 태영에게 폭탄을 보낸다. 형이 일제의 순사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안주머니를 더듬어 펜을 찾을 때 치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로 싼 폭탄 상자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펜을 받아든 치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토록 오래 생각하고 결심하고 다짐한 일이었다. 망설이던 치영은 선물 봉투에 ‘야마모토 쇼시 순사부장님께’라고 썼다. 손이 떨려 글씨가 비뚤비뚤했다. 214쪽

 

동생은 친형에게 폭탄을 보내면서 부디 이것이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형이 알 수 있도록 ‘야마모토 쇼시 순사부장님께’라고 메모해서 보낸다. 친형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고뇌와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를 보면 그가 아무리 명분과 신념으로 살고 있다고 하지만 혈연으로 엮여진 존재임을 숨길 수가 없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 산다고 믿고 있지만 사람은 이처럼 신념이나 이념만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란 뜻이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인의 약점을 만회하는 길은 조선이 사상범을 잡는 일뿐이었다. 태영은 발 아래 꼬꾸라진 학생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젖은 몸에서 물이 튀었다. -124쪽

 

태영도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순사를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했지만, 이처럼 자신이 조선인이라서 받아야 하는 수모와 굴욕을 만회하려는 수단으로 동족을 힘들게 했다.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불행한 결말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혈연과 가족을 버렸고, 형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족을 핍박했다. 둘 다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노정주는 어떠한가? 정주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사람들 중의 하나다. 순응주의자며 기회주의자다. 그에게는 치영의 ‘신념’도 없고 태영의 ‘분노’도 없다. 상황과 조건에 역행하지 않고 함께 묻혀 흘러가게 되는 보통사람들의 표본이다. 그는 순사인 사촌형의 도움으로 백화점 배달부로 취직하게 된다. 그는 일본인이 가져온 화려한 도시 문명에 아무런 의식 없이 잘 적응하면서 산다. 그리고 백화점 사장 딸인 아나코를 사랑한다. 사장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지만, 상황이 달라지자 정주를 사위로 삼아 백화점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결국 허사가 되고 만다. 6.25가 지나고 한일협정이 이루어진 훗날, 22년만에 미나카이 백화점을 찾은 아나코는 정주를 만난다.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그는 언제나처럼 주어진 현실에 묵묵히 순응하면서 살고 있다. 정주와 아나코를 통해 우리는 사랑도 맹세도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서는 한낱 보잘것 없는 물거품임을 알 수 있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다시 한 번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지만, 그러나 먹기 위해서 사는 것만은 아니다. 먹는 문제는 개개인의 생존의 문제이고 사는 것은 신념과 가치의 문제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생존과 신념이 싸우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세상은 불가능할 것인가?

 

‘나’는 중하다. ‘나’가 없으면 국가도 없으니 그 ‘나’는 ‘국가’보다 중하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금 그어진‘ 공간인 ’국가‘에 소속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나의 생존도 중요하고 내 생존을 보호하고 지켜줄 토대인 국가/구조도 중요하다.(국가라는 게 없으면 사람은 생존할 수 없는가?라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개인적 존재로서의 ‘나’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국가’도 다 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개인과 국가, 개인과 구조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서로 없는 듯 있는 듯 살아갈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렵다. 그것을 찾지 못했기에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늘 피투성이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역사에서 이것 하나만은 배운다. 개인의 문제와 구조/국가의 문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바탕이 되므로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국가는 나와 내 가족의 생존과 존엄을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개인은 ‘사회'와 ’국가‘를 위한 공공선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 둘 중 어느 한쪽에서라도 자신의 책무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개인은 물론 구조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어쨌든 이 책은 ‘나’와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줄곧 생각하게 한다. 개인과 국가는 어떤 관계인가? 개인은 무조건 국가에 종속된 존재인가? 국가는 신성한가? 개인이 국가를 모독하는 것은 신성모독 같은 큰 죄인가? 그 시절 독립운동이 아니라 순사질을 하는 게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언젠가 TV구술사에서 일제시대 순사를 했던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순사한테 따귀 맞은 게 분해서 순사가 됐죠.” 즉 그는 민족을 배신하거나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 순사를 한 게 아니라 개인적 울분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순사직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선택에는 동기가 있다. 그 다양한 동기를 무시하고 오로지 흑백을 가리듯 친일과 반일을 판단하고 죄를 묻는다는 것은 무지한 짓이다. 이 무지한 논리와 잣대가 격랑의 세월을 만나 좌익과 우익을 만들어내고, 그 무모한 양날의 칼 아래 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었는가?

 

세상은 참으로 단순하다. 단순해서 무섭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세상은 단번에 뒤집어진다.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빼앗기고 자기 나라로 도망가기 바쁘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상인이건 뭐건 폭력을 휘두르는 조선사람들. 그것은 애국운동도 독립운동도 아니다. 태영도 그 와중에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치영 또한 해방 후 ‘좌익’이라는 이유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상처 아닌 곳은 거의 없다. 상처의 연속이 바로 역사다. 그런데도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 상처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과거 상처의 무덤까지 파내어 ‘능지처참’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선택의 동기, 그 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폭력적인 논리일 수밖에 없는 단순무지한 이분법적 잣대가 여전히 21세기를 사는 이 땅에서 활개치고 있다. 종북이니 종미니, 빨갱이니 메카시즘이니 하는 말들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창을 꼬나쥐고 겨누고 있다. 왜 우리는 연민의 가지고 이 모두의 상처를 함께 볼 수 없을까? 작가의 말처럼, 우리 역시 한때 북성로에서 살다간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무심한 흐름에 휩쓸려 가버릴 텐데.

 

흔히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철저한 반성없는 기록은 또 다른 혼란과 이기심의 시발점이 된다. 역사는 그래서 되풀이된다. 과거의 상흔이 찍혀 있는 현재의 이 땅에 무엇을 심어 가꿀지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아직도 맹목적인 신념이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 서로를 증오하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를 고통과 혼란으로 내몰아서 결국 나도 죽이고 사회도 죽이고 국가도 죽인다. 물질이 이토록 풍부한 세상에서, 과학과 기술이 이토록 발전한 세상에서 왜 아직도 공존의 철학 하나 우리는 가지지 못하고 있을까? 나를 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하는 삶이 되고, 세상을 위하는 것 또한 나를 위한 일이 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곳은 왜 없을까?

 

이 책 <북성로의 밤>은 거대한 역사의 전환기, 그 혼란한 세월 속에서 저마다 주어진 현실과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교호해가면서 살다 갔는지를 세 사람의 주인공을 통해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개인의 생존과 신념이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얼마나 극과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그리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급박하게 바뀌기기도 하는지를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섣불리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이기도 한 역사에 대한 통념을 저만치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 어느 시대를 살든, 어떤 삶을 선택하였든, 그 선택의 동기가 어떠하였든, 작가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산다. 그와 동시에 개인의 삶이란 그가 몸담고 있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영향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입증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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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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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이라는 무대는 다양하고 넓은 것 같아도 우리가 맡아야 할 배역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친구나 애인. 누군가의 선배나 후배, 누군가의 아비나 어미.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 복잡한 것 같아도 배역으로 보자면 인생이라는 것도 이렇듯 단순하게 요약된다. 이 연극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애초에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무대에 오른 이상 어쩔 수 없이 정해진 배역(일인다역)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극본의 서사처럼 무대에서 연기해야 할 희로애락은 다양하리라. 그러나 느닷없이, 어느 순간 무대 밖으로 퇴장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엄혹하다. 그렇다. 누구나 연극 같은 인생 일막을 살뿐이다.

여기 한 사내가 무대에 등장했다. 이 소설은 그 사내가 연기한 '아버지'라는 배역에 초점을 맞춰 놓았다. (물론 그 사내 또한 일인다역을 한다. 그는 두 아들의 아버지였지만 한 아낙의 남편이었고 또 누군가의 친구였다). 그는 가난했다. 세상에서 '처자식이 밥 굶는 것'이 가장 두려울 만큼 그는 가난에 쥐여살았다. '아비된 자의 손은 궂은 일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처자식을 먹이고 입히느라 손을 잠시도 놀리지 않았다. 더구나 큰아들은 장애아였다. 병원이나 시설에 보내 뒷바라지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막노동도 했고 함바집을 하면서 술과 밥도 팔았다. 노름판을 벌려 판돈을 빌려주고 이자도 악착같이 챙겼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고 손가락질 받았다. 어쨌든 갖은 굴욕과 모멸감을 견디면서 그는 돈을 모았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큰아들 종석이 입원해 있는 시설에 갔다. 오토바이를 타고서. 정신지체인 종석은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면 즐거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아들에게 먹일 컵라면을 사러 가다가 아버지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배수로를 기어 나온 아버지는 몸 속의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안간힘으로 버티다 죽었다.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 종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6개월 전 회사에서 실직 당했다. 그는 젊고 유능했지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내부 '적'들에 의해 도태되고 말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초조함이 점차 그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는 시골로 내려온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친구 장기풍을 만난 종세는 그를 통해 아버지의 살아온 내력을 자세히 듣는다. 아버지의 메모와 일기도 본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어서야 겨우 아버지의 존재감을 실감한다. 그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한 존재였던 아버지였지만, 사람들에게 온갖 원망을 들었던 자린고비 악덕 고리대금업자(?)였지만, 그는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훌륭히 완수해냈던 아버지였다. 자신 또한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버지된 자로서의 책임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던 아들은 그제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의 삶은 아들인 자신에게는 결코 부끄러운 것도 부도덕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늦게야 수긍한다.

이 책은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배역에서 보면 그 어떤 비판도 불허하는 듯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아버지는 이해 받고 감사받아야 할 존재이지 비판받거나 지탄받아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 몇 가지 의문이 따라붙는다. 그토록 자신의 책무를 다한 아비였는데, 아들은 왜 그 아비가 죽어서야 만나러 온 걸까? 가족을 위해서 그토록 '희생'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왜 가족과 하나 되지 못하고 외롭게 홀로 겉도는가? 이 가정에 무엇이 빠진 것일까? 그 아비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란 평생 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 자식 사랑인가! 그런데 그 '사랑'이 왜 이렇게 메마르고 쓸쓸한가? 왜 이들 부자는 행복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삶은 왜 이다지도 빈약하고 소외되어 보일까? 아무리 봐도, 책무만으로 지탱되는 삶이란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어쩌면 세대를 막론하고 인간을 내리누르는 두려움, '생존 강박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빼앗아 버리는 게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생존에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도 한때 불안하고 두려운 시대를 거쳐왔다. 배고픔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 눈 돌릴 겨를도 형편도 아니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랬다.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 때만 해도 그러했다. 밥을 굶지 않는 것. 이것보다 더 절실한 명제가 필요치 않아 보였던 시절이었다. '잘 살아보세'가 모두의 꿈이었다. 그래서 들불처럼 번진 '새마을 운동'을 있었으며 지친 줄 모르고 밤낮을 잊고 일을 했던 '산업역군'들이 있었다. 아들 세대인 우리는 그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풍요로울 수 있었다. 덕분에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세대에 대해 우린 고마워한다. 그분들의 피땀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혹시 놓치거나 잃어버린 건 없을까? 그렇지 않다면 풍요로운 세상이 왜 이토록 불안하단 말인가? 왜 여전히 행복하지 않더란 말인가? 아들 엄종세는 실직은 했지만 적어도 밥은 해결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결 할 수 있는, 최고 교육까지 받는 사회의 엘리트이며 한 가정의 성실한 가장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이유가 뭘까?

이 소설에서 아버지 엄시헌의 삶과 아들 엄종세의 삶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정확히 겹쳐진다. 흔히들 산업화 시대라고 하는 '박정희 시대'는 오로지 잘 살기 위한, 먹고살기 위한, 경제개발과 물질적 성장을 위한 세월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였으며, 그래서 모든 가치가 거기에 맞춰진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는, 그 시대를 이해한다. 마치 이 소설에서 아버지 엄시헌의 삶을 이해하듯이. 판단이나 비판이 아니라 이해가 먼저다. 왜냐하면 '밥'이 절체절명인 시대였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지나온 그 시대를 섣불리 극단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시대가 있어 우리가 이나마 살게 되지 않았냐며 예컨대 '박정희 시대'를 극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오직 물질적 성장만 추구하던 군부 독재시절 때문에 물신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오늘날 이 사회에 이렇게 번성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나없이 이기적인 '경제동물'이 되었으며, 생태 환경 또한 이처럼 황폐하게 되었다고 그 시대를 비난하는 쪽이 있다. 과거의 적실한 평가란 이처럼 어렵다.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거쳐왔고, 그것을 '피상적 근대화' 혹은 '압축적 근대화'라는 말로 요약하기도 한다. 근대화는 근대화인데, 너무 빨리 근대화를 이루려다 왠지 껍데기만 근대화 비슷하게 닮아있으나 알맹이는 여전히 전(前)근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이 책에 엄시헌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그는 처자식의 밥을 굶기지 않으려고 오로지 일만 한다. 타인에게 해가 되든 어찌되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돈을 벌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돈이 삶의 토대이지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돈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 돈이 전부가 아님을 알지 못해 보인다. 아비로서 그토록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그가 빈약하고 외롭게 보이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삶에 누구보다 충실했으나 타인과의 삶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내도 친구도 사랑도 우정도 없이 오로지 아버지의 의무로서만 사는 삶을 어떻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소설엔 ' 여자', '아내', '어머니'가 있어도 이들간의 대화와 소통은 보이지 않는다. 전근대적 가부장 사회의 전형처럼 여성성은 없고 오직 남성성만 가득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수직적인 응답은 간혹 있어도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인 소통과 대화는 없다. 오로지 '살기 위한' 의무와 역할뿐이다. 바로 그것 또한 이 소설이 남성적 속성근대화의 시대, 그 상징처럼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엄시헌은 돈을 벌어서 처자식을 안전하게 부양했으나 자신을 나누거나 스스로 누리지 못했다. 그는 아비의 배역으로선 우수했지만 다른 역할에서는 낙제로 살았다. 그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를 찬양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 시대(박정희 시대)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찬양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무튼 물질적인 성장과 정신적 성숙의 괴리가 빚어낸 무서운 허방들은 그 시대에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 도처에서 불협화음과 불행의 씨앗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음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밥'은 생존의 필수 배경이다.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변치 않을 진리다. 세상의 모든 두려움은 이 '밥'에 대한 두려움이 변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소설의 아버지 엄시헌은 오로지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평생 애썼던 강인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흔히 그 시대의 아버지들처럼 자식을 지배하려 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자식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에게 베풀었고, 되려 자식을 세심하게 배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존재했으나 늘상 부재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보다 더 이상적인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다. 사르트르도 이랬다지 않은가. "자식을 제 소유처럼 가지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인가! 나의 아버지가 살았더라면, 그는 반드시 나를 깔고 길게 누워서 짓눌렀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젊은 나이에 죽어 버렸다."라고.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그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 행운을 아버지의 부재 덕분으로 돌렸다니, 자식을 부양하는 것을 마치 권리처럼 내세워 자식들의 생명기운과 창조성을 마음대로 잘라버리는 폭군 아버지가 그 시절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경산 어디에 있는 못에 가서 가시연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온 몸에 가시를 달고 '무섭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시는 제 몸조차 비켜가지 않고 불쑥불쑥 찌르고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잎의 가시들이 다른 잎을 뚫고 올라오기도 했다. 그 피투성이 속에서도 옹곳이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가히 경이롭기까지 했다. 갑자기 가시연꽃이 생각난 것은 작가의 후기에 있는 이 말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우리 아버지 세대가 피투성이 속에서 길러낸 것이 독버섯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독버섯 그늘 아래에서 자란 우리가 약초를 기르려 애쓰고 있으니 감사하고 다행한 일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또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그 역할에 대해 새삼 숙고하게 만든다. 나는, 우리는, 어떤 아버지를 가졌으며 어떤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책 속의 장기풍의 말대로, 아버지의 역할이란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족의 부양은커녕 자신의 한 몸도 부양하지 못해 쩔쩔매는 아버지도 세상엔 아직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온갖 굴욕과 모멸을 인내하면서 오늘도 '삶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을 아버지, 그들은 모두 용감하고 훌륭한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세상의 아들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런지? "아버지. 이제 당신 인생도 좀 돌보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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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2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 근저에는 성욕이 있다는 이론을 세웠는데, 나는 인간의 욕망 근저에는 식욕(밥)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식욕이 아버지에게는 자식의 식욕까지 책임져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고 보면 밥보다 중요한게 어딨을까 생각중입니다. ~~

글샘 2009-07-2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
조두진은 저도 마음에 담아두었던 작가입니다. 한번 읽고 싶네요;.

replica watches 2010-03-2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replicawatches 2010-08-1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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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화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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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화 / 조두진

지나간 역사의 비극은 단지 몇 줄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른 먼지 폴폴 날리는 메마르고 희미한 과거의 시공간이 뿐이다. 그곳에다 물을 대고 꽃을 피우는 건 오직 상상력만이 해낼 수 있다. 작가의 무한하고 경계 없는 상상력은 그곳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창조해내고, 그 안에서 실핏줄까지 끄집어낸다.

이 책은 임란 당시 왜군에게 잡혀 일본으로 붙들려간 안철영과 그의 아내 유이화의 삶을 독특한 프리즘을 통해 실감나게 비춰보인다. 작가의 한겨레 문학상 당선작인 <도모유키>가 조선 땅에서의 '왜군의 수난기'라면, <유이화>는 일본 땅에서의 '조선인 수난기'인 셈이다. 얼추 짝이 맞다.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러 몰려오고 조선 선비 안철영은 안절부절못한다. 어린 아들이 열병에 걸려 있고 의원은 피난 가고 없다. 아이를 지키자니 백성 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고 참전하자니 아픈 아이와 아내가 걸린다. 아내는 아이가 정신이라도 차리면 떠나라고 남편을 잡는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말을 남기며 기어이 떠난다.

"위로는 군왕과 아래로는 부모님이 계시는 나라요. 나라가 이 지경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마당에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기 위해 화급을 다투는 일을 미룬다는 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오. 나는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소."

진주성은 무너진다. 철영은 포로로 잡히고 그의 아내도 잡힌다. 철영은 먼발치에서 아내의 모습을 보지만, 결국 아내는 왜국의 농노로 팔려가 버린다. 철영은 높은 문장과 글 솜씨 덕에 일본 무장의 아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발탁되었고, 아내를 찾으려는 일념으로 왜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세월이 지나, 아무리 찾으러 다녀도 없던 아내가 어느 날 우연히 일본인의 처가 되어 나타난다. 아이도 이미 둘이나 달려 있다. 철영의 아이는 자신이 떠난 지 사흘만에 죽었다는 소식도 듣는다. 기막힌 운명에 그들은 통곡한다. 이윽고 철영이 말한다.

"당신의 허물을 용서하겠소. 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당신이 마지못해 겪어야 했던 일과 도리 없이 선택해야 했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겠소. 난세였소. 난세의 일을 잊고 이제 새로 태어난 것이라고 믿으며 살고 싶소." 아내는 대번에 "허물이라고 하셨습니까?"라고 날카롭게 받는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일본인 남편과 아이들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말한다. 아내는 차라리 다 죽여달라고 한다.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 아이를 버리지 않겠다 한다. 그러면서, 아픈 자식을 버리고 떠난 당신은 나라를 구했느냐고 묻는다. 철영은 할 말을 잊는다.

이 책에서 '철영'은 그 당시 '시대정신'을 집약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忠이라는 대의명분이야말로 처자식의 안위보다 먼저이던 시대. 그러나 그 충을 심지처럼 받들던 조선 선비도 아내를 찾기 위해 일본의 사무라이라는 칭호까지도 받는 걸 보면 그 강건한 이데올로기도 인간의 한계상황에선 얼마나 어이없이 무너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도 말한다. 조선선비들의 그러한 절개는 '미숙아의 그리움' 같은 것이라고. 그것이 현실에선 얼마나 허약한지를.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의 힘은 막강하다. 지금은 충과 효 대신 '돈'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물론 그것 또한 얼마나 맹목적이며 모순적이며 허술한지 지금은 모른다. 그 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밝혀질 때쯤이면 우리들의 현재적 삶 또한 무미건조한 역사책 속의 두어줄 기록으로만 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까뮈가 말했다던가. "나는 정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정의가 나의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누면 나는 어머니 편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어느 시대든 개인과 공동체. 혹은 안과 밖, 그것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것을 알맞게 조율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이 대변하고 있듯이 조선 시대에 꽃피웠던 유교는 나라를 위해 개인을, 밖을 위해 안을 과도하게 희생시킨 시대였다. 작가는 그것을 '삐딱하게' 표현한다. 삐딱함은 작가의 전략이다. 그래서 조정 대신들과 나랏님 등 소위 '윗분'들의 무능을 싸잡아 희화화하고 있다.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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