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북성로의 밤(체험판)
조두진 / 한겨레출판 / 2012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최근 ‘대구 근대 골목’이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골목도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좀 의외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구의 도심 골목 곳곳마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성로 또한 근대가 남긴 유명한 골목이다. 그 시절 대구에서 가장 번성하던 골목이 바로 북성로였다.
이 책 <북성로의 밤>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북성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성로는 남성로 동성로 서성로와 함께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난 뒤 생겨난 거리 명칭이다. 대구 읍성은 1906년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인 경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이 일본거류민단과 짜고 허물었다. 성벽을 경계로 성내는 조선인이, 성밖에는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인이 성내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성벽이 커다란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성벽이 허물어지자 이재에 밝은 일본상인들이 대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건물이 미나카이 백화점이다.
책은 미나카이 백화점 사장인 마카에 도미주로가 백화점 앞을 비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카에 도미주로는 처음엔 포목점부터 열었으나 일본군의 위세와 경부선 개통으로 인한 교통발전에 힘입어 북성로에 미나카이 백화점을 세우고 전국에 수많은 지점까지 세운 대재벌로 성장한다. 이야기는 그 미나카이 백화점의 조선인 배달부 노정주와 그의 사촌형인 노태영과 노치영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내몬다. 자신과 제 가족의 배를 채워주지 못한 나라 ‘조선’에 ‘분노’를 느낀 형 태영은 일본 순사가 되었고, 내 나라 조선을 빼앗은 일본에 ‘분노’한 동생 치영은 독립운동조직에 가입한다.
“어리석은 놈들이 총이나 몇 방 쏘아대고, 만세나 외치면 독립이 되는 줄 안다. 나라가 망하고 서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놈들이야말로 여러 사람 고생만 시키는 것이다. 제 놈이야 좋아서 그런다 치자. 제 한 몸뚱이야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다 죽는다고 치자. 가족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천날만날 경찰서에 불려다니며 욕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야?” -31쪽. (태영의 말).
“조직과 연결된 뒤로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잃은 적이 없었다. 제 한 몸을 태워 조선의 앞날을 밝힐 수 있다면 얼마든지 횃불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때때로 그런 결기가 사무치는 날이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207쪽 (치영의 말)
“형님, 돈이 없으면 제 집도 적막강산이고, 돈이 있으면 어디라도 금수강산입니다. 돈만 있으면 개도 첨지가 되는 세상 아닙니까? 저는 일본인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니라 돈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69쪽 (정주의 말)
이 세 주인공들의 말에서 그들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신념은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서 형성된 자신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상황과 조건이 다르면 선택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들의 선택이나 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확정지을 수 없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예전에 이런 류의 질문들이 마치 심오한 철학적 명제처럼 세간에 유행한 적 있다. 만약 누가 또다시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대답 또한 개운치 않은 건 사실이다. 나는 밥을 벌기 위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지금도 얼마나 허덕이고 있는가 말이다.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처음부터 밀려나 허기진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오로지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비참하고 비루한 인생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아무튼, 사람에게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래. 먹어야 산다. ‘나’도 ‘너’도 먹어야 사는 동물이다. 모든 개체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진리다. 그렇다면 나는 오로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아니다. 사람은 먹어야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긴 하지만 단지 먹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사는가?
‘무엇 때문에’, 혹은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은 삶에서 철학과 신념과 삶의 가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밥’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즉 그 질문을 할 때부터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사회는 생물학적 개체인 수많은 ‘나’들이 모인 ‘우리’다. 그것은 달리 말해 수많은 신념/가치가 모여 만들어진 어떤 덩어리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결국은 다양한 신념/가치의 흐름이고 그 역동성이다. 그래서 개인에게는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고, 사회에선 신념/가치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빵을 달라”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어떤 차원에선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간단히 말해,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란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와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신념의 ‘자유’가 늘 부딪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어쩌면 그 두 ‘자유’가 싸우는 곳이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역사라는 것도 상호작용하는 이 두 힘들의 역동적인 변화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랄까. 이 두 힘은 서로를 견제하거나 밀어내면서 혹은 서로를 되먹임하면서 균형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틈새에 음모와 투쟁이 기생하고 증오가 범람한다. 때로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도 불사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먹을 것(재화)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도 있지만 신념/이념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도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언제나 이 두 힘들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 운명은 개인의 것이지만 역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개인의 운명이 더 격하게 휘둘리게 된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일제의 순사를 할 수도 있고,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만주 땅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후대를 사는 우리들 중 누가,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이 책 <북성로의 밤>은 독자인 우리에게 그것을 시종일관 묻고 있다.
“신념을 팔아서 배를 채우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배를 채우는 것이 내 신념이다.”
형제간에 주고받은 이 두 문장의 대화는 이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 두 문장에 압축되어 있는지 모른다.
“배를 채우는 것이 내 신념이다”라는 태영의 말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무 전망도 희망도 없는 세월을 살아내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으니까. 그런 때일수록 더욱 더 가족의 생존과 안위가 절실하니까. 태영에게 지켜야 할 ‘우리’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동생 치영에게 지켜야 할 ‘우리’는 조선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집단을 긍정함으로써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잠재의식이 있지만, 형제간에도 그 동일시하는 ‘우리’가 이처럼 다르다. 비극이 탄생하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마침내 신념의 차이는 극에 달하여 형제간에도 서로를 죽여야 할 정도로 커진다. 독립운동가 치영은 친형인 태영에게 폭탄을 보낸다. 형이 일제의 순사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안주머니를 더듬어 펜을 찾을 때 치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로 싼 폭탄 상자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펜을 받아든 치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토록 오래 생각하고 결심하고 다짐한 일이었다. 망설이던 치영은 선물 봉투에 ‘야마모토 쇼시 순사부장님께’라고 썼다. 손이 떨려 글씨가 비뚤비뚤했다. 214쪽
동생은 친형에게 폭탄을 보내면서 부디 이것이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형이 알 수 있도록 ‘야마모토 쇼시 순사부장님께’라고 메모해서 보낸다. 친형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고뇌와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를 보면 그가 아무리 명분과 신념으로 살고 있다고 하지만 혈연으로 엮여진 존재임을 숨길 수가 없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 산다고 믿고 있지만 사람은 이처럼 신념이나 이념만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란 뜻이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인의 약점을 만회하는 길은 조선이 사상범을 잡는 일뿐이었다. 태영은 발 아래 꼬꾸라진 학생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젖은 몸에서 물이 튀었다. -124쪽
태영도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순사를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했지만, 이처럼 자신이 조선인이라서 받아야 하는 수모와 굴욕을 만회하려는 수단으로 동족을 힘들게 했다.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불행한 결말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혈연과 가족을 버렸고, 형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족을 핍박했다. 둘 다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노정주는 어떠한가? 정주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사람들 중의 하나다. 순응주의자며 기회주의자다. 그에게는 치영의 ‘신념’도 없고 태영의 ‘분노’도 없다. 상황과 조건에 역행하지 않고 함께 묻혀 흘러가게 되는 보통사람들의 표본이다. 그는 순사인 사촌형의 도움으로 백화점 배달부로 취직하게 된다. 그는 일본인이 가져온 화려한 도시 문명에 아무런 의식 없이 잘 적응하면서 산다. 그리고 백화점 사장 딸인 아나코를 사랑한다. 사장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지만, 상황이 달라지자 정주를 사위로 삼아 백화점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결국 허사가 되고 만다. 6.25가 지나고 한일협정이 이루어진 훗날, 22년만에 미나카이 백화점을 찾은 아나코는 정주를 만난다.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그는 언제나처럼 주어진 현실에 묵묵히 순응하면서 살고 있다. 정주와 아나코를 통해 우리는 사랑도 맹세도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서는 한낱 보잘것 없는 물거품임을 알 수 있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다시 한 번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지만, 그러나 먹기 위해서 사는 것만은 아니다. 먹는 문제는 개개인의 생존의 문제이고 사는 것은 신념과 가치의 문제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생존과 신념이 싸우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세상은 불가능할 것인가?
‘나’는 중하다. ‘나’가 없으면 국가도 없으니 그 ‘나’는 ‘국가’보다 중하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금 그어진‘ 공간인 ’국가‘에 소속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나의 생존도 중요하고 내 생존을 보호하고 지켜줄 토대인 국가/구조도 중요하다.(국가라는 게 없으면 사람은 생존할 수 없는가?라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개인적 존재로서의 ‘나’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국가’도 다 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개인과 국가, 개인과 구조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서로 없는 듯 있는 듯 살아갈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렵다. 그것을 찾지 못했기에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늘 피투성이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역사에서 이것 하나만은 배운다. 개인의 문제와 구조/국가의 문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바탕이 되므로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국가는 나와 내 가족의 생존과 존엄을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개인은 ‘사회'와 ’국가‘를 위한 공공선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 둘 중 어느 한쪽에서라도 자신의 책무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개인은 물론 구조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어쨌든 이 책은 ‘나’와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줄곧 생각하게 한다. 개인과 국가는 어떤 관계인가? 개인은 무조건 국가에 종속된 존재인가? 국가는 신성한가? 개인이 국가를 모독하는 것은 신성모독 같은 큰 죄인가? 그 시절 독립운동이 아니라 순사질을 하는 게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언젠가 TV구술사에서 일제시대 순사를 했던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순사한테 따귀 맞은 게 분해서 순사가 됐죠.” 즉 그는 민족을 배신하거나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 순사를 한 게 아니라 개인적 울분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순사직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선택에는 동기가 있다. 그 다양한 동기를 무시하고 오로지 흑백을 가리듯 친일과 반일을 판단하고 죄를 묻는다는 것은 무지한 짓이다. 이 무지한 논리와 잣대가 격랑의 세월을 만나 좌익과 우익을 만들어내고, 그 무모한 양날의 칼 아래 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었는가?
세상은 참으로 단순하다. 단순해서 무섭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세상은 단번에 뒤집어진다.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빼앗기고 자기 나라로 도망가기 바쁘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상인이건 뭐건 폭력을 휘두르는 조선사람들. 그것은 애국운동도 독립운동도 아니다. 태영도 그 와중에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치영 또한 해방 후 ‘좌익’이라는 이유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상처 아닌 곳은 거의 없다. 상처의 연속이 바로 역사다. 그런데도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 상처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과거 상처의 무덤까지 파내어 ‘능지처참’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선택의 동기, 그 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폭력적인 논리일 수밖에 없는 단순무지한 이분법적 잣대가 여전히 21세기를 사는 이 땅에서 활개치고 있다. 종북이니 종미니, 빨갱이니 메카시즘이니 하는 말들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창을 꼬나쥐고 겨누고 있다. 왜 우리는 연민의 가지고 이 모두의 상처를 함께 볼 수 없을까? 작가의 말처럼, 우리 역시 한때 북성로에서 살다간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무심한 흐름에 휩쓸려 가버릴 텐데.
흔히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철저한 반성없는 기록은 또 다른 혼란과 이기심의 시발점이 된다. 역사는 그래서 되풀이된다. 과거의 상흔이 찍혀 있는 현재의 이 땅에 무엇을 심어 가꿀지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아직도 맹목적인 신념이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 서로를 증오하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를 고통과 혼란으로 내몰아서 결국 나도 죽이고 사회도 죽이고 국가도 죽인다. 물질이 이토록 풍부한 세상에서, 과학과 기술이 이토록 발전한 세상에서 왜 아직도 공존의 철학 하나 우리는 가지지 못하고 있을까? 나를 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하는 삶이 되고, 세상을 위하는 것 또한 나를 위한 일이 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곳은 왜 없을까?
이 책 <북성로의 밤>은 거대한 역사의 전환기, 그 혼란한 세월 속에서 저마다 주어진 현실과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교호해가면서 살다 갔는지를 세 사람의 주인공을 통해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개인의 생존과 신념이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얼마나 극과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그리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급박하게 바뀌기기도 하는지를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섣불리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이기도 한 역사에 대한 통념을 저만치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 어느 시대를 살든, 어떤 삶을 선택하였든, 그 선택의 동기가 어떠하였든, 작가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산다. 그와 동시에 개인의 삶이란 그가 몸담고 있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영향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입증해 보이고 있다.
type=text/java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