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 1941
조두진 지음 / 이정서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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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두진 작가의 책을 접했다.

그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도모유키’와 거의 버금갈 정도로 이 책도 감동적인 수작이다. 거친 역사의 격랑 속에서 물거품처럼 생겨났다 소멸하는 개인들의 사랑과 운명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두 책은 닮아 있다. 마지막 장까지 숨 막히는 속도감으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분명 작가의 탁월한 역량 덕분이리라.


1941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시절이 시대적 배경이다. 김구 주석과 스탈린도 등장한다. 물자와 무기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김구는 소련 스파이에게 군사정보를 넘긴 일본 고위관료인 오자키를 데려오는 대가로 소련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며 남기는 무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인계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스탈린은 미소를 띠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도쿄배달조’가 꾸려졌다. 오자키를 충칭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부여받은 이는 유상길, 최윤기. 서우진. 김지언 네 사람이다. 유일한 여성대원 김지언은 전투대원이 아니었으나 선발된 이유는, 만약 일이 여의치 않을 경우 미인계를 써볼 윗선의 계획 때문이다. 서우진과 김지언은 연인 사이다.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하는 시점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마치 순식간에 바뀌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묘사가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한다. 오자키를 데리고 충칭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험난하다.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는다. 최윤기는 그의 고향 합천에서 일본군 총에 맞아 쓰러지고, 김지언 또한 서우진의 등에서 최후를 맞는다.


작가는 김지언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했다. “김지언은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지금 미소 짓고 있다고 느꼈다. 양쯔강 하늘로 울려 퍼지던 서우진의 맑은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귓가에 맴도는 것은 서우진의 거친 숨소리였다. 안개 짙은 이른 아침처럼 눈앞이 흐릿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최후는 고통스럽지만 하늘처럼 충만하고, 그것은 순간이지만 영원처럼 깊다. 그래서, “한순간만이라도 영원처럼 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영원하다. 한 순간만이라도 털끝만큼의 빈틈도 없이 충만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라는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문장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도쿄배달조는 오자키를 스탈린에게 넘겼다. 임무는 완수되었다. 서우진은 임시정부를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몇 년간 중국 흑룡강성 일대와 소련의 북부 산림지역을 떠돌며 살다가 우연히 옛 동지를 만나 스탈린이 무기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는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허탈하게 되묻는다. “그럼 우리가 수행했던 임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시대와 상황을 만난다. 그 구체적 역사성 속에서 개인은 때로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다.

“누구보다 대한독립을 소망하는 것도 사실이다.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작전에 임했다. 임무 수행 중에 죽을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작전 참가를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살고, 김지언이 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라고 했던 서우진은 이 어이없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그러나 거친 역사의 파도 속에서 한 개인의 이런 질문은 물거품보다 가볍게 스러지게 마련이다. 소수 권력자의 가벼운 약속과 결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운명을 망가뜨려도 그저 역사라는 거대 서사 속에 파묻히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모든 파도가 물거품으로 이루어졌듯 거친 역사의 주재자도 역시 인간이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 뜨거운 피를 지닌 인간. 자각과 자존을 가진 인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가진 인간.....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것을 기억하라고 시종일관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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