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삶이라는 무대는 다양하고 넓은 것 같아도 우리가 맡아야 할 배역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친구나 애인. 누군가의 선배나 후배, 누군가의 아비나 어미.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 복잡한 것 같아도 배역으로 보자면 인생이라는 것도 이렇듯 단순하게 요약된다. 이 연극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애초에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무대에 오른 이상 어쩔 수 없이 정해진 배역(일인다역)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극본의 서사처럼 무대에서 연기해야 할 희로애락은 다양하리라. 그러나 느닷없이, 어느 순간 무대 밖으로 퇴장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엄혹하다. 그렇다. 누구나 연극 같은 인생 일막을 살뿐이다.

여기 한 사내가 무대에 등장했다. 이 소설은 그 사내가 연기한 '아버지'라는 배역에 초점을 맞춰 놓았다. (물론 그 사내 또한 일인다역을 한다. 그는 두 아들의 아버지였지만 한 아낙의 남편이었고 또 누군가의 친구였다). 그는 가난했다. 세상에서 '처자식이 밥 굶는 것'이 가장 두려울 만큼 그는 가난에 쥐여살았다. '아비된 자의 손은 궂은 일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처자식을 먹이고 입히느라 손을 잠시도 놀리지 않았다. 더구나 큰아들은 장애아였다. 병원이나 시설에 보내 뒷바라지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막노동도 했고 함바집을 하면서 술과 밥도 팔았다. 노름판을 벌려 판돈을 빌려주고 이자도 악착같이 챙겼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고 손가락질 받았다. 어쨌든 갖은 굴욕과 모멸감을 견디면서 그는 돈을 모았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큰아들 종석이 입원해 있는 시설에 갔다. 오토바이를 타고서. 정신지체인 종석은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면 즐거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아들에게 먹일 컵라면을 사러 가다가 아버지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배수로를 기어 나온 아버지는 몸 속의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안간힘으로 버티다 죽었다.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 종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6개월 전 회사에서 실직 당했다. 그는 젊고 유능했지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내부 '적'들에 의해 도태되고 말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초조함이 점차 그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는 시골로 내려온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친구 장기풍을 만난 종세는 그를 통해 아버지의 살아온 내력을 자세히 듣는다. 아버지의 메모와 일기도 본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어서야 겨우 아버지의 존재감을 실감한다. 그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한 존재였던 아버지였지만, 사람들에게 온갖 원망을 들었던 자린고비 악덕 고리대금업자(?)였지만, 그는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훌륭히 완수해냈던 아버지였다. 자신 또한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버지된 자로서의 책임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던 아들은 그제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의 삶은 아들인 자신에게는 결코 부끄러운 것도 부도덕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늦게야 수긍한다.

이 책은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배역에서 보면 그 어떤 비판도 불허하는 듯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아버지는 이해 받고 감사받아야 할 존재이지 비판받거나 지탄받아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 몇 가지 의문이 따라붙는다. 그토록 자신의 책무를 다한 아비였는데, 아들은 왜 그 아비가 죽어서야 만나러 온 걸까? 가족을 위해서 그토록 '희생'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왜 가족과 하나 되지 못하고 외롭게 홀로 겉도는가? 이 가정에 무엇이 빠진 것일까? 그 아비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란 평생 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 자식 사랑인가! 그런데 그 '사랑'이 왜 이렇게 메마르고 쓸쓸한가? 왜 이들 부자는 행복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삶은 왜 이다지도 빈약하고 소외되어 보일까? 아무리 봐도, 책무만으로 지탱되는 삶이란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어쩌면 세대를 막론하고 인간을 내리누르는 두려움, '생존 강박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빼앗아 버리는 게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생존에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도 한때 불안하고 두려운 시대를 거쳐왔다. 배고픔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 눈 돌릴 겨를도 형편도 아니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랬다.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 때만 해도 그러했다. 밥을 굶지 않는 것. 이것보다 더 절실한 명제가 필요치 않아 보였던 시절이었다. '잘 살아보세'가 모두의 꿈이었다. 그래서 들불처럼 번진 '새마을 운동'을 있었으며 지친 줄 모르고 밤낮을 잊고 일을 했던 '산업역군'들이 있었다. 아들 세대인 우리는 그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풍요로울 수 있었다. 덕분에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세대에 대해 우린 고마워한다. 그분들의 피땀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혹시 놓치거나 잃어버린 건 없을까? 그렇지 않다면 풍요로운 세상이 왜 이토록 불안하단 말인가? 왜 여전히 행복하지 않더란 말인가? 아들 엄종세는 실직은 했지만 적어도 밥은 해결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결 할 수 있는, 최고 교육까지 받는 사회의 엘리트이며 한 가정의 성실한 가장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이유가 뭘까?

이 소설에서 아버지 엄시헌의 삶과 아들 엄종세의 삶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정확히 겹쳐진다. 흔히들 산업화 시대라고 하는 '박정희 시대'는 오로지 잘 살기 위한, 먹고살기 위한, 경제개발과 물질적 성장을 위한 세월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였으며, 그래서 모든 가치가 거기에 맞춰진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는, 그 시대를 이해한다. 마치 이 소설에서 아버지 엄시헌의 삶을 이해하듯이. 판단이나 비판이 아니라 이해가 먼저다. 왜냐하면 '밥'이 절체절명인 시대였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지나온 그 시대를 섣불리 극단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시대가 있어 우리가 이나마 살게 되지 않았냐며 예컨대 '박정희 시대'를 극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오직 물질적 성장만 추구하던 군부 독재시절 때문에 물신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오늘날 이 사회에 이렇게 번성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나없이 이기적인 '경제동물'이 되었으며, 생태 환경 또한 이처럼 황폐하게 되었다고 그 시대를 비난하는 쪽이 있다. 과거의 적실한 평가란 이처럼 어렵다.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거쳐왔고, 그것을 '피상적 근대화' 혹은 '압축적 근대화'라는 말로 요약하기도 한다. 근대화는 근대화인데, 너무 빨리 근대화를 이루려다 왠지 껍데기만 근대화 비슷하게 닮아있으나 알맹이는 여전히 전(前)근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이 책에 엄시헌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그는 처자식의 밥을 굶기지 않으려고 오로지 일만 한다. 타인에게 해가 되든 어찌되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돈을 벌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돈이 삶의 토대이지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돈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 돈이 전부가 아님을 알지 못해 보인다. 아비로서 그토록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그가 빈약하고 외롭게 보이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삶에 누구보다 충실했으나 타인과의 삶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내도 친구도 사랑도 우정도 없이 오로지 아버지의 의무로서만 사는 삶을 어떻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소설엔 ' 여자', '아내', '어머니'가 있어도 이들간의 대화와 소통은 보이지 않는다. 전근대적 가부장 사회의 전형처럼 여성성은 없고 오직 남성성만 가득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수직적인 응답은 간혹 있어도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인 소통과 대화는 없다. 오로지 '살기 위한' 의무와 역할뿐이다. 바로 그것 또한 이 소설이 남성적 속성근대화의 시대, 그 상징처럼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엄시헌은 돈을 벌어서 처자식을 안전하게 부양했으나 자신을 나누거나 스스로 누리지 못했다. 그는 아비의 배역으로선 우수했지만 다른 역할에서는 낙제로 살았다. 그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를 찬양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 시대(박정희 시대)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찬양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무튼 물질적인 성장과 정신적 성숙의 괴리가 빚어낸 무서운 허방들은 그 시대에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 도처에서 불협화음과 불행의 씨앗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음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밥'은 생존의 필수 배경이다.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변치 않을 진리다. 세상의 모든 두려움은 이 '밥'에 대한 두려움이 변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소설의 아버지 엄시헌은 오로지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평생 애썼던 강인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흔히 그 시대의 아버지들처럼 자식을 지배하려 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자식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에게 베풀었고, 되려 자식을 세심하게 배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존재했으나 늘상 부재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보다 더 이상적인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다. 사르트르도 이랬다지 않은가. "자식을 제 소유처럼 가지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인가! 나의 아버지가 살았더라면, 그는 반드시 나를 깔고 길게 누워서 짓눌렀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젊은 나이에 죽어 버렸다."라고.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그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 행운을 아버지의 부재 덕분으로 돌렸다니, 자식을 부양하는 것을 마치 권리처럼 내세워 자식들의 생명기운과 창조성을 마음대로 잘라버리는 폭군 아버지가 그 시절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경산 어디에 있는 못에 가서 가시연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온 몸에 가시를 달고 '무섭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시는 제 몸조차 비켜가지 않고 불쑥불쑥 찌르고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잎의 가시들이 다른 잎을 뚫고 올라오기도 했다. 그 피투성이 속에서도 옹곳이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가히 경이롭기까지 했다. 갑자기 가시연꽃이 생각난 것은 작가의 후기에 있는 이 말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우리 아버지 세대가 피투성이 속에서 길러낸 것이 독버섯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독버섯 그늘 아래에서 자란 우리가 약초를 기르려 애쓰고 있으니 감사하고 다행한 일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또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그 역할에 대해 새삼 숙고하게 만든다. 나는, 우리는, 어떤 아버지를 가졌으며 어떤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책 속의 장기풍의 말대로, 아버지의 역할이란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족의 부양은커녕 자신의 한 몸도 부양하지 못해 쩔쩔매는 아버지도 세상엔 아직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온갖 굴욕과 모멸을 인내하면서 오늘도 '삶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을 아버지, 그들은 모두 용감하고 훌륭한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세상의 아들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런지? "아버지. 이제 당신 인생도 좀 돌보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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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2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 근저에는 성욕이 있다는 이론을 세웠는데, 나는 인간의 욕망 근저에는 식욕(밥)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식욕이 아버지에게는 자식의 식욕까지 책임져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고 보면 밥보다 중요한게 어딨을까 생각중입니다. ~~

글샘 2009-07-2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
조두진은 저도 마음에 담아두었던 작가입니다. 한번 읽고 싶네요;.

replica watches 2010-03-2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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