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최인호 지음, 김점선 그림 / 열림원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청산과 세상은 어느 것이 옳으냐

봄볕이 이르는 것마다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

                                               <경허>


 

꽃밭은 다채로운 우리네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다.

아빠하고 함께 만든 자그마한 꽃밭은 사시사철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새순이 돋고, 줄기를 뻗어, 잎이 나오고, 꽃을 피우고 씨앗으로 다음 생을 약속하는 생동감 가득한 아주 시끄러운 공간이다.

그 작은 공간속에서 다투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그 생명이 사그라질 무렵엔 후손을 퍼뜨리려 안간힘을 쓰고, 영토를 넓히려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 식물들은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자연이기에 이치에 순응하고 인간은 순리대로 살지 않고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더욱 위대해지고자 하는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 차이점이랄 수 있겠다.

글을 시작하며 적어 놓은 시는 최인호의 “길 없는 길” 속의 주인공 경허의 선시(禪詩)로 작가의 말을 빌면

봄볕이 있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고 내 마음속에도 봄볕을 깃들게 하면 꽃은 자연적으로 피어날 수 있으니 굳이 봄에 피는 꽃을 찾아 청산으로 숨어 들어갈 필요가 없다.

는 것이란다.

그러니 결국 내가 앉은 이곳이 바로 나의 꽃밭이고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들은 다양한 색깔의 꽃처럼 끊임없이 피고지고하면서 나를 표현해 주는 것이지 싶다.

 

 


어린 시절 신문지상에 연재되던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훔쳐 읽으며 자란 나는 후에 알게 된 “술꾼”이라는 단편으로 그를 통속작가가 아닌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작가로 새롭게 인식했었고 우연히 접하곤 하였던 잡지 ‘샘터’ 속 가족이야기로 그도 나와 같이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동질감을 느꼈었는데 “꽃밭”을 읽으면서는 이제 그도 늙었구나 하는 생각 이전에 우주의 질서 속으로 순응하며 들어오는 한 창조물로 여겨진다.

그런 생각으로 책을 보니 그의 꽃밭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불친절하다고 느낀 은행 직원에게 건물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는 양 당당했던 젊은 시절의 그가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이 했던 행동이 소인배적 행동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가톨릭에 귀의한 시간을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내적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 그 때문인지 이후로 그의 글엔 종교적 표현과 산문도 여럿 눈에 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계절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그의 꽃밭에서 일어나는 느리고도 아주 작은 변화들인 것이다.

조금씩 변해가는 그의 꽃밭에서 그는 아직도 기다린다고 한다.

“그 님이 누구신지 아직 나는 모르지만 그 님은 마침내

내 생애의 ‘꽃밭’에 내가 바라던 손님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오실 터이니 눈부신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고” 기다린다고 한다.


 

책 말미에는 암투병을 하고 있는 화가 김점선의 꽃밭 이야기도 나온다.

혼수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아주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그녀는 정신만 차리면 베란다의 제라늄 화분을 걱정했다고 쓰고 있다.

급기야 수술 후 첫 번째 항암 주사를 맞는 날의 이른 아침엔 링거병을 한손에 받쳐 들고 몰래 병원을 빠져 나와 제라늄 화분들 밑으로 물이 줄줄줄 흐르도록 흠뻑 물을 주었단다.

제라늄이 살아나니 자신도 살아나고 있다고 믿은 그녀의 거룩한 임무 완수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끈질긴 애착이었을 것이고, 책임감, 그리고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힘든 시간을 보낸 후 그녀의 제라늄은 본래의 자유를 되찾았고 김점선도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였다.

 

올가을 들어 나의 꽃밭엔 때 이른 서리가 내렸다.

주변 분들이 하나씩 둘씩 기력을 잃어가고 예전의 화사한 빛깔을 잃어가니 꼭 내가 아니어도 그 분들로 인해 나의 꽃밭도 활기를 잃고 한동안 많이 부대끼었다.

조그마한 나의 꽃밭은 누구에게나 위안을 주는 향기로 가득 찼으면 좋겠지만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을 맞서 감내할 만큼 강건하였던 그것은 이제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도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 소리를 내고 있다.

제 아무리 화려한 꽃과 너른 잎을 자랑하고 깊은 뿌리를 묻고 있어도 외부로부터 오는 찬바람이나 건조한 열풍에는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나의 꽃밭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행형이라 그 여파가 심했다.

어서 이 시련의 계절이 가고 다시 꽃피는 봄이 돌아와 평등한 봄볕을 이웃과 함께 나눠 받으면서 벌도 불러오고, 나비의 날개도 쉬게 하면 좋으련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어찌 그리도 농염한지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네.
청명한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푸른 하늘이여.
풀어놓은 쪽빛이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 최한경 / 꽃밭에 앉아서


 

최한경은 조선시대 세종조때 유생으로 성균관 유생 시절에 박소저란 여인을 사랑해서 지은 연애시 한 수를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반중일기'에 남겼다 한다.

~~~~~~~~~~~~이런 발견이 책을 읽는 즐거움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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