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존 머레이의 구속 ㅣ Coram Deo 코람데오 시리즈 6
존 머레이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11년 9월
평점 :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러나 조금만 질문을 바꾸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정확히 무엇을 이루었는가? 십자가는 단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사건인가, 아니면 실제로 구원을 성취한 사건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1955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것이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개혁주의 구원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국내에는 장호준의 번역으로 2011년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에서 출간되었다.
저자인 존 머레이는 20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사역했다. 그의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을 개혁주의 신학의 틀 안에서 치밀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구속> 역시 그러한 그의 신학적 특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책 가운데 하나다.
책의 구조는 비교적 분명하다. 머레이는 구속을 크게 '구속의 성취'와 '구속의 적용'으로 나눈다. 전반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역사 가운데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 사역을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그렇게 성취된 구속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죄인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먼저 머레이는 속죄의 필요에서 출발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설명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본성이 십자가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머레이가 말하는 '결과적 절대적 필요'는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자유로운 뜻에 따른 것이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결코 무시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속죄의 본질에 대한 설명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희생이나 감동적인 자기희생의 모범이 아니다.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중심으로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면서 제사, 속죄, 화목, 구속이라는 네 가지 측면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셨다.
이러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속죄의 완전성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미완성의 사역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은 역사 속에서 단번에 성취된 객관적인 사건이며, 인간의 보속이나 추가적인 공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머레이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완전성'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인간이 다시 완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머레이의 제한속죄에 대한 논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실제적인 구원을 성취한 완전한 사역이라면, 그 속죄의 효력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대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생긴다. 머레이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속죄가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실제로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열어 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백성을 실제로 구속하신 사건이다.
그러나 이 책의 논의는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구속>의 중요한 특징은 '성취된 구속'과 '적용되는 구속'을 분명하게 연결한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성취하셨다면, 그 구원은 실제 죄인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머레이는 이를 '구원의 서정'이라는 틀을 통해 설명한다. 유효한 부르심, 거듭남,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라는 흐름 속에서 구속이 어떻게 개인에게 적용되는지를 살핀다.
특히 거듭남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개혁주의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은 스스로 영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성령께서 죄인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고, 그 결과로 믿음과 회개가 나타난다. 그렇다고 인간의 믿음과 회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믿음과 회개는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인격적인 행위다.
칭의에 대한 설명에서도 머레이의 개혁주의적 성격은 분명하다. 칭의는 인간의 내면이 점차 거룩해지는 성화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다.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믿음 역시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방편이다.
그렇다고 머레이의 구원론이 칭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칭의 이후에는 양자됨과 성화가 이어진다. 특히 성화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순종을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신자는 성령의 은혜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실제 삶에서 죄와 싸우며 순종해야 한다. 따라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한 인간의 노력도 아니며, 인간의 순종을 제거한 수동적인 과정도 아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머레이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여러 항목 중 하나가 아니다. 선택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구원의 적용, 그리고 최종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 전체를 관통하는 토대다.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택에 참여하며,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구조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화' 역시 의미가 크다. 구원은 단지 죽은 뒤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머레이는 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의 갱신까지를 구속의 최종적인 완성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와 피조 세계의 회복을 포함하는 종말론적 소망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구원론의 각 항목을 따로 설명하지 않음에 있다. 속죄, 칭의, 성화, 견인 등을 각각의 교리로 암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에서 시작되어 성령의 사역으로 신자에게 적용되고 마침내 영화에 이른다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구원론의 여러 교리가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 사건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물론 접근성이 높은 책은 아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결과적 절대적 필요', '속죄의 범위', '구원의 서정',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같은 개념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신학적 논증이 상당히 밀도 있게 전개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책의 큰 구조를 먼저 파악한 뒤 세부적인 논의를 따라가는 편이 좋다.
그럼에도 이 책이 지금까지 읽힐 가치가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오늘날 구원은 쉽게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사건' 정도로 축소되곤 한다. 그러나 <구속>은 구원의 시작과 중심과 완성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며, 성령께서 적용하시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완성하시는 하나의 은혜의 역사다.
결국 <구속>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나의 구원은 누구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머레이의 대답은 분명하다.구원의 근거는 인간의 결단이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구속이다. 그리고 그 완성된 구속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회개, 칭의와 양자됨, 성화와 견인을 거쳐 마침내 영화에 이르게 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고 싶은 사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실제로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쉽지는 않지만, 한 번 제대로 읽어 두면 이후 구원론을 공부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계속해서 기준점이 되어줄 만한 책이다.
레고!
#존머레이 #구속 #복있는사람
#개혁주의신학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