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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법철학 - 상식에 대항하는 사고 수업
스미요시 마사미 지음, 책/사/소 옮김 / 들녘 / 2020년 12월
평점 :

철학은 우리 인간과 사회를 살아가는 근본 원리와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법철학은 그 중에서도 법에 관해 철학적 사고를 하며 그 목적과 정의를 잘 실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런 법철학을 저자는 왜 ‘위험하다’고 표현했을까. 더불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도 표현한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지키고 있는 법의 본질과 원리에 대해 사고할 법철학에 대해서 왜 그런 비유를 했는지 의문을 가졌으나 책을 읽어가면서 법에 대한 굳건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한 바대로 책을 읽고 법률에 대해 회의감이나 의문이 처음으로 들게 된 것이다.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률에 대한 회의심을 갖게 하는데서 시작하기에 성공한 셈이다. 법률을 지키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성격을 이야기하며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질문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으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거듭해서 묻고 이래도 괜찮은 지를 확인한다. 현대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사고를 흔들어 놓는 점이 좋았고 법률은 도덕과 달리 그 내용의 도덕성보다 제정의 절차성만 정당하게 확보된다면 문제가 없는 점은 우리가 간혹 마주하게 되는 법 정서와 실제 법 집행 간의 괴리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교육과정 속에서 법을 배우며 법의 배경이 되는 정신을 살펴보다보면 대부분 ‘천사의 얼굴’을 한 형태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또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법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해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책은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서 보다 쉽게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다소 극단적일 수도 있지만) 일상 속 사례와 권위를 내려놓은 친근한 화법, (비록 일본 내에서 보다 이해하기 쉬운) 문화적 밈들을 활용해 법철학에 대한 허들을 낮추고 ‘사고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흔치 않게 ‘악마의 얼굴’을 하며 우리가 사회 속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아니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의존하고 있었던 상식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이 책을 읽어보며 많은 자극이 되길 바란다.
법률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갖게 만드는 1장과 마지막으로 자유의 범위에 대한 담론을 제외하면 크게 순서에 상관없이 인상적인 느낌이 오는대로 책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 각 챕터 내에서는 가벼운 사례를 통한 의문에서부터 점차 질문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에 걸맞는 개념과 이를 나타내는 다양한 사례 그리고 의문의 다양한 답이 될 수 있는 철학적 이론들을 살펴보다보면 어느새 혼란스러워지고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할 수 없게 된다. 가령 ‘나의 목숨, 팔 수 있습니까?’ 당연히 안되지만 왜 되지 않는가에 대해서 다양한 이유로 토론할 수 있겠으나 책에서 자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말해본다면 안될 이유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인정한다면 다음 수순은 개인이 자신의 신체의 자유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이다. 가령 매춘이나 장기매매 등의 합법성에 관한 의제가 이에 해당하겠다. 다만, 자유인 것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따라가면 노동이나 다른 요소들에 비해 매춘이나 장기매매의 경우 자신의 결정에 타인의 개인이나 강제를 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에서 첫 번째 이유를 침해받을 가능성이 크고 설령 완전한 자유의지였다하더라도 현재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는다는 자유의 두 번째 정의에서 벗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것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인상적이었던 점은 ‘평등’을 다루는 파트 중에서 현재의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는 롤스의 정의론을 근거로 삼아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소득 재분배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는 ‘무지의 베일’에 싸인 사람들이 최대한 리스크를 피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안전 장치를 설정하는데 합의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나 또한 학창 시절 윤리 시간에 롤스의 정의론만 배웠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보다 자연권을 강조하고 어디까지나 호의에 의한 분배에만 동의하는 노직의 의견을 듣고 서로 대립하는 주장과 근거를 함께 읽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고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아 좋았다. 그럼에도 아직은 롤스의 정의론에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절대적인 하나의 생각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더불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가 편의에 의해 사람들을 선별해버리는 방법을 너무나 쉽게 변질되어 이용되는 과정은 끔찍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같은 인격체를 지닌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게 만든다. 최대 다수의 행복을 규정하는 것이 어려워 불행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 결국 소수자들을 선별해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모양새가 되기 쉽다. 이로 인한 끔찍한 피해는 우리가 이미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는 어쩌면 우리에게도 전조현상처럼 이미 찾아온 건 아닐까. 어제 EBS다큐프라임 포스트 코로나 3부를 잠시 보며 알게 된 ‘위생독재’라는 표현처럼 우리도 코로나 초기 환자들의 개인정보를 방역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익을 위해 너무나 상세하게 제공한 것에 대해 쉽게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고 문제삼지 않은 건 아닐까. 다행히 지금은 개인정보 제공이 필요한 부분만 제한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소수자가 되는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그제야 서늘한 공리주의의 위험성을 절감하더라도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해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행동하는 것을 옹호해서는 당연히 안될 일이다. 효율과 공익이라는 미명 아래 정작 인간의 행복을 도외시하는 건 아닐지 경계하며 균형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교육심리학을 공부할 때 알게 된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의 6단계 중 4단계인 ‘법과 질서지향의 도덕성’을 나의 도덕성 발달의 목표 지점으로 지향했다. 궁극의 단계인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단계까지는 언감생심이고 적어도 타인에 따라 휘둘리지 않고 사회 내에서 합의된 법과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주로 나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인정에 따라 나의 행동이 좌지우지되는 단계에서 머물고 어쩌면 그보다 낮은 욕구 충족, 벌과 복종 단계까지 내려갈 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향점만은 법과 규칙을 존중하는 것을 목표료 했다. 하지만 책에서 밝힌 대로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자 절대적 선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정당한 절차를 밟고 제정된 법이라 하더라도 법을 따를지 판단하는 건 개인의 몫이라는 것. 사고 없이 법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잘못의 책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