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유죄 -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
김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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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강제되는 사회규범이고, 법을 둘러싸고 무수한 사람들의 삶과 이해가 교차한다. 나는 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법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변화를 언제나 비교적 늦게, 보수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쉽게 고칠 수 없고, 쉽게 변화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법이고 그래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가 의심스러운 상황들이 많기도 하다.

이 책은 20년 이상 여성의 인권에 관한 활동들을 해온 김수정 변호사의 책이다. 남성으로 페미니즘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조금은 불편한 지점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스스로를 갱생해야 하는 주문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도중에는 변명의 여지없이 무력하고 참담한 기분을 느끼게 됐다. 이 공고하고 강압적이며 넓고 깊게 국가와 사회에 심겨있는 폭력들의 증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는 데에는 더 이상 덧불일 말이 없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 법은 여성의 편인가 라는 프롤로그에 이어 디지털 성범죄, 미투, 직장 내 성희롱, 미성년자 성착취, 가정폭력, 호주제, 이주 여성, 낙태죄, 미혼모, 입양, 난자 채취, 일본군 위안부, 기지촌, 군대 내 성차별, 여성 노동자 등의 이슈를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설명한다. 키워드로만 보면 아, 그런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지 정도로 생각할 만한 문제들이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저자의 사례를 들으며 한 겹만 더 깊게 바라보아도 아주 끔찍해진다. 거기에는 물론 법의 문제를 넘어선 남성 중심의 사고체계가 근간이 되어 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에 이 모든 이슈를 몰아봄으로써 대한민국을 둘러싼 껍질의 감촉을 온전히 느낀다.

저자는 이 모든 여성들의 싸움이 계속 돌을 굴려 정상에 가져다 놓는 시지프스의 절망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말한다. 매번 비슷한 싸움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거기에는 한 발의 전진이 있고, 과거의 싸움과 현재의 싸움은 조금 달라져 있다고 말이다. 여성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남성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고, 이런 싸움에 결국은 남성들이 함께해야 한다고. 좋은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 언제나 나의 배움이 짧게, 혹은 무용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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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 HACKS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일을 위한 89가지 재택 기술
고야마 류스케 지음, 이정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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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 HACKS

고야마 류스케

안그라픽스

2020.10.16

264p

16,900원

저는 요즘 회사에서 9시 - 6시 일을 합니다. 퇴근 후와 주말을 이용해서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요. 사이드 프로젝트에는 소설 쓰기, 문장 쓰기에 관한 온라인 모임 진행, 살고 있는 지역구에서 실행하는 도시 기록 프로젝트 등이 있어요.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 보니 사이드 프로젝트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많은 것들을 처리합니다. 메신저로 연락해서 파일들을 주고받고,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미팅 같은 경우에는 Zoom 같은 온라인 화상 프로그램을 사용하죠. 아무래도 코로나 19로 인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통은 집에서 많은 일들을 해나가다 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진짜 좋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고 일의 효율도 극적으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사실 대부분의 일을 재택근무로 처리할 수는 없을까 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굉장히 심플하고 간결하게 재택의 기술들을 89가지(굉장히 소소한 팁들을 포함해서) 설명해주는데요. 복잡할 수 있는 문제들을 자신의 사례에 맞혀 단칼에 잘라 이야기해주는 측면이 있어요. 예를 들면 업무 중 제일 집중력이 떨어지는 시간은 오후 3시다. 그러니 오후 3시를 마감시간으로 정하고 일하라 같은 것이죠. 그래서 책에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 나오더라도 저자의 쿨한 태도에 오케이! 하고 넘어가게 되더라요. 제가 인상 깊었던 몇 개의 내용들을 말해보겠습니다.

1. 회의 중에 제안한다.

회의 중에 오가는 정보와 의견들을 취합하고, 제안의 내용을 만들기 시작하면 굉장히 많은 품이 듭니다. 그리고 제안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감에 따라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그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저자는 회의 중에 곧바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던지고, 그 아이디어 중에서 상호 합의되는 내용들을 가지고 더 발전시키라고 합니다. 매우 유용한 기술이라고 느껴져요.

2. 소통의 형식을 만들어 오해를 피한다.

재택근무의 맹점이라 하면 즉각적인 소통이 어렵다는 것이고,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자는 가능하면 문자 텍스트로 남길 수 있고, 또 과거 내용까지 히스토리를 남길 수 있는 형식과 매체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저자가 추천하는 앱은 Slack이에요. 메신저 기능과 더불어 지난 대화 내용들을 정리해서 볼 수 있어 좋다고 합니다.

3. 성과를 성실하게 보고해 팀의 선순환을 창출한다.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 상사는 부하 직원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죠. 반대로 직원은 자기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못 믿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고요. 이 같은 악순환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재택근무가 어려운 거고요. 그래서 일의 성과와 진행상황을 높은 빈도로 보고함으로써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아야 하고 이렇게 관계의 질 개선이 사고, 행동, 결과의 개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4. 회의록 중심 회의

Zoom을 이용해 온라인 화상 회의를 한다고 가정하면 화면 공유를 통해 회의록을 실시간으로 작성하면서 회의를 진행하면 좋다고 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내용을 복기할 수 있고, 회의 중간에도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지 않게 원래 회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다고 하네요. 저도 Zoom을 종종 사용하기 때문에 시도해보고 싶은 방법입니다.

5. 데이터를 저장할 때는 하나의 포켓 원칙

저도 컴퓨터 안에서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문서를 취급하는데 이것들을 나름의 분류 방법대로 분류하려고 폴더별로 정리를 하곤 합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문서들을 스캔해서 저장하는데 날짜 정보와 제목을 기록하고 모두 같은 폴더에 넣는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날짜별로 정리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검색을 하기 쉬워지고, 또 이 폴더 안에 반드시 내가 원하는 문서가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가 있다네요. 저도 큰 대분류의 폴더를 정하고 그 안에 문서들을 넣어두는 방식으로 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무엇보다 저자가 재택근무를 강조하는 이유는 저자가 교수, 사업, 강연, 취미 등 굉장히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재택근무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의 경우도 아침 출근 1시간과 긴장된 업무시간(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에 시간을 많이 쓰는) 퇴근 1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재택근무였다면 조금 달랐겠죠.

책에서 특히 공감 갔던 내용은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일을 하기는 싫다는 것이죠. 그런데 2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처리할 수 있는 가벼운 일들을 하다 보면 일의 속도와 흐름이 생기고, 그러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도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책에서 얻은 꿀팁들을 가지고 조금 더 효율적인 일들을 집에서 해보고 싶어 졌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일을 집에서 해결할 수 있게끔 된다면 좋겠다는 소망도 가져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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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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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김영사

102p

2020.10.16

13,500원


저는 하루키를 매우 좋아합니다만 최근에는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말이 왠지 관용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루키에 대한 명백한 불호를 가진 분들도 있어서 말하기가 꺼려집니다. 아마 한국에 번역된 하루키의 소설은 모두 읽었던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꽤 많을 거로 생각해요. 지금이야 하루키만큼 좋아하는 소설가도 많지만 10대와 20대 초반에는 하루키의 소설이 저의 삶에 절대적이었죠.


반면에 하루키의 에세이는 많이 읽지 않았어요. 사실 하루키는 늘 비슷한 온도를 가진 담담한 인물(아마도 자기 자신과 닮은)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소설이나 에세이의 매력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담담한 소설 속 인물과 현실의 일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하루키의 인물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 책은 에세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상당히 소설적인 느낌이 납니다.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의 상당수가 소설의 모티프가 됐기 때문입니다. 책의 한 대목을 읽으면 바로 어떤 소설들을 연결지어 떠올릴 수 있었는데요. 아버지가 전쟁 중 포로를 사살했다는 사실을 어린 하루키에게 말하는 장면은 <태엽 감는 새>에 나오는 포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가 아주 강렬한 기억을 하루키에게 심었고, 거기서 소설의 상상력들이 돋아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물론 하루키는 어떤 사건이든 깊게 침잠하지는 않아요. 무엇이든 단정적으로 판단하지도 않고요. 등단 이후 아버지와 어떻게 사이가 틀어졌는지가 궁금했는데 그 이야기는 아예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고 생략해버리고요. 하루키 소설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서 제가 책에서 기대했던 아주 핵심적인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읽는 재미가 느껴지는 책입니다. 아쉬운 건 책의 볼륨이 작다는 거고 아마도 하루키를 좋아하셔야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단서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내용과 별개로 책 속 삽화들과 책의 만듦새가 아주 이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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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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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매겨진 단락은 2017,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의 기록이다.

나는 최근 주디스 버틀러의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를 읽었고

+표시를 통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주석을 달았다.

글에서 인용된 문구는 모두 이 책에서 나왔다.

 

01

H형과 나는 그날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로, 같이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고, (결국에는 둘 다 언론사에 가지 않았지만) 가끔 만나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그날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나 촛불집회의 추세가 거의 최고점을 찍을 때였고, 우리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왠지 모를 들뜬 분위기에 동조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낙관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은 웃으면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비폭력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아이와 어른까지 안심하고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로니에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대열에 합류했다. 각지에서 온 노동단체, 학생단체, 문화단체들과 나란히 통제된 차도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방송장비를 싣고 달리는 트럭을 쫓아서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우리는 처음 경험해본,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우리라고 부르고 실제로도 그런 소속감에 가슴이 고양되던 때이기도 했다.

 

+

공공집회는 지금 이 상황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불공정한 사회적 상태이며, 집회가 책임의 정당화에 대한 분명히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대안을 구축하는 공존을 잠정적으로, 또 복수적 형태로서 실행해낸다는 통찰을 체현해낸다.” - 26p

 

그때 H형과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와 닿는 불안감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회사들에게 거절당했던 탓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불안정이라고까지 느껴졌으나,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좌절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완전한 불안정성의 토대 위로 올라갈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우리는 제법 좋은 대학을 다녔고, 주위에서 충분한 성공사례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지방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모 아래에서 성장했으나, 우리 스스로의 힘이라고 믿는 노력을 통해 그때의 상태까지 당도했고, (신자유주의의 가르침에 따라) 당장의 어려움들을 또한 그런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당장의 불안정함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더 큰 대의를 위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02

종로 5가에서 시작해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경찰에 의해 곳곳이 통제되어 있었고 차벽이 세워져 있었지만, 큰 차도만큼은 열려 있었다. 집회에 있어서 경찰은 우리에게 안전한 집회의 장소를 스스로 제공하고, 우리가 비폭력적인 집회를 가능케 하도록 도와주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회로 모이는 사람들의 동선을 교묘하게 갈라놓고 있었고,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합류를 자유롭게 원하거나,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을 원할 때 그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 지점들에서는 예외 없이 충돌과 폭력이 일어났다. 집회의 참가자들은 버스를 힘으로 밀어서 흔들었고, 경찰들은 최루액이 섞인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뿌렸다. 물론 경찰의 방패와 시민들이 직접 부딪히는 종류의 충돌도 있었지만, 그런 행위들은 비폭력 집회를 유지하라는 요구, 그리고 그런 폭력을 유도하는 사람들을 프락치라고 규정하며 그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말라는 요구가 집회를 가득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제어되고 있었다. H형은 그때부터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켜서 영상을 찍었다. 물론 그건 역사적 순간에 동참하고 있다는 고무된 기분, 주위에 있는 모든 시민이 서로에게 우호적이라고 느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공공장소에 출현할 권리, 이런 종류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관련이 있으며, 폭력의 위협 없이 거리에 출현하기 위한 모든 다른 투쟁과도 관련된다. 이런 관점에서 출현의 자유는 모든 민주주의 투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 81p

 

우리는 신체로 집회에 나타났다. 우리는 광장이라는 공적 공간에 출현했고, 우리의 존재를 서로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내가 집회의 권리가 보호받을 것이라 낙관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후에 박근혜 정부가 계엄령을 고려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우리는 집회에 참여한 우리의 신체를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공권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때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어떤 사람이든 집회의 현장에 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지나친 낙관은 한편으로는 그 집회에 나타날 수 없던 이들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그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게 해 주었다. H형과 나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우리에 취해있었다.

 

03

H형과 나는 집회를 눈에 담으면서 카메라를 켜고 광화문 광장까지 가게 되었다. 광화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어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가는 길목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쪽은 광화문에서 서대문 쪽으로 가는 길이 차벽에 의해 막혀있었고 광화문 광장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밀집도가 낮았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군의 사람들이 차벽에서 이탈한 한 대의 경찰버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때 차벽을 구성했던 그 차는 유리창이 거의 박살나 있었고 사람들은 버스에 끈을 연결해 당기고 있었다. , 뒤로 차를 흔들어 차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사람들은 그 차가 마치 어떤 공권력이나 정당하지 못한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처럼 돌을 던지고 야구배트로 내려치고 침을 뱉었다. H형은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서 말을 했다. 시민들이 경찰차를 부수고 있습니다. 그 행위는 같이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던 나의 눈에는 뉴스나 다큐멘터리처럼 당면한 장면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는 자연스러운 놀이로 보였다.

 

+

만일 일상생활 자체가 폭력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보호받을 필요 없이 걸을 수 있고 그럼에도 여전히 안전하다면, 이와 같은 권리가 오직 한 사람에 의해 행사되는 것이더라도 그 안전함은 결국 그 권리를 지지하는 여러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 76p

 

인민은 실제로는 이구동성으로 발화하는 집단적 현전으로서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민이 누구건, 그들은 확실히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차등적으로,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혹은 전혀 나타나지 않거나 어느 정도로만 나타나고, 어쩌면 어느 정도는 모여 있으면서도 흩어진 채로 나타나기에, 따라서 결국에는 통일체가 아닌 것이다.” - 240p

 

그러니까 우리가 그때 의심하지 않았던 우리의 출현의 권리는 H형과 내가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광장에 나와 있던 모두, 혹은 광장에 나오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안전을 바라는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우리의 권리를 지지해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때 시민들이 경찰차를 부수는 그 장면이 상징하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행위가 공권력에 대항하는 적절한 행위인가, 그것이 우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정의 분출을 통한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건 아닌가.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행위들이 암시하는 것, 또 그 행위들이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면서 내려질 결정들, 즉 그게 결국은 우리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무엇보다 그때 우리 근처에는 살수차가 있었다.

 

04

'시민들이 경찰차를 부수고 있습니다'에 이어 H형이 한 말은 '여기를 보십시오'였다. 그런데 H형의 말이 울려 퍼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그랬어? 여기를 보라고? 그들에게는 영상을 촬영하는 우리가 사복경찰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채증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어디 소속이야 라는 질문을 던졌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할 말이 없었고, 질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재미로 찍는 거예요 라는 답변을 했는데, 그때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의심에서 분노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재미로 찍는 거라고? 이게 재밌어? 이 새끼들 프락치 아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뺏으려 했고 우리는 말문이 막힌 채 두려움에 떨며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과 질문에 갇혀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나는 민주주의를 가령 밀려오는 다중이 만들어내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우리는 그런 집단을 함께 유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요구가 공유되고 있는지, 혹은 모두가 느낀 어떤 부정의와 삶의 위태로움, 변화가능성에 대한 어떤 암시가 사태에 대한 집단적 인식을 고양시키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97p

 

사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는 같은 편이에요'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촛불집회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적의와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안전하다고 믿던 집회에 위험을 느꼈을 때. 그때 당시에는 당연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때의 일을 되돌아보며 이 집회에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권리가 모두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집회에 참여한 우리는 실은 다른 종류의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권력의 사유화로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 그 이면이 각자의 삶의 불안정성에 대한 불만과 그런 불안정성을 해결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나와 있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촛불집회가 말하는 것들, 어쩌면 촛불집회를 조직하는 이들의 의도가 들어간 목표와 주장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촛불집회의 참가자 간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정상성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안정성과 집회가 주장하는 것들을 겹쳐 놓을 수 있었을까? 촛불집회를 우리의 집회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05

그때 H형과 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살수차였고, 갑작스레 원을 그린 사람들의 무리를 흩어놓기 위해 물줄기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물을 맞으면서 흩어졌고, 그 틈을 타 H형과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뛰었다. H형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 자신이 찍은 영상을 모두 지웠다. 우리는 황급히 촛불집회를 빠져나와, 다시 종로로 돌아가, 지하에 있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그 중국집에는 어디선가 밀려온 것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거기 앉아 중화요리를 시켜 술을 마셨고, TV로 촛불집회를 지켜봤다. 역대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촛불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

우리에게 할당된 젠더나 섹슈얼리티 규범들 안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혹은 오직 크나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인정 가능성의 한계 지점이라 할 만한 상태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때에 따라 끔찍할 수도, 흥분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한계 지점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생존 가능성 자체가 의문시됨을 의미한다.” 61p

누군가가 살아 있으나 동시에 자신의 삶이 결코 하나의 온전한 삶으로 여겨진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결코 상실될 수 있는 혹은 상실된 것으로 여겨질 리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이와 같은 비존재의 양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282p

 

그러니까 나는 수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촛불집회에서 벗어난 불안정성들의 일부, 여성들, 퀴어들, 트랜스젠더들, 빈민들, 장애인들, 무국적자들, 아울러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들 또한 자신들의 불안정성을 촛불집회를 통해 이야기했었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졌는가? 촛불집회에서 그들의 자리는 어디에 있었나? 나는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내가 느낀 연대는 진정한 연대가 맞는가? 그들은 어떻게 비존재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이제야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것인 이 삶, 더 넓게는 사회적 삶이기도 한 이 삶, 즉 내가 살고 있거나 살고자 노력하는 삶과 가치의 담론적 질서들과 내가 비판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 삶에 대해 신중히 사유해야 한다.

- 2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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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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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비공개된 이 책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이룬 후를 다루는 시대물입니다.

본격적인 역사 소설이 아니라 활극이라고 말할수 있겠네요.


저는 이런 류의 시대물을 보면

부모님이 안 계시는 방에서 혼자 붙들고 있던 전우치전이 생각납니다. 

전우치는 16세기 개성에 살았던 실존인물을 모티프로 했다고 하며 

도술을 익혀 탐관오리들을 통쾌하게 혼내주는 인물이죠.

사실 전우치의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전우치가 자신보다 도술이 뛰어난 도사와 대결을 하다 패하고

자신이 백성들을 돕기 위해 했던 일들의 허무함을 깨닫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우치같은 인물이 나타나 각박한 세상을 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도술이라는 힘을 이용해 만든 세상이 마냥 좋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로 느꼈거든요.


신라 공주 해적전의 등장인물 장희도 약간은 전우치와 비슷한 인물입니다. 

도술은 쓰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임기응변에 능하고 단단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반면에 한수생은 별 능력이 없고 매번 고초를 겪으며 장희의 해결책을 열심히 따라가는데 바쁘죠.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같이 도망을 치다가 백제를 다시 건국하겠다고 섬에 모여있는 한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장희와 한수생은 서로를 도우며 여러 가지 모험을 하게 됩니다.


이 모험들의 곳곳에 시대적인 배경이 깔려 있고, 자칫하면 딱딱할 수 있는 정보들을 호쾌한 대사와 지문으로 설명합니다.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하나의 도전과제를 깨면 다른 도전과제가 나타나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읽는 재미와 몰입감이 뛰어납니다. 구조는 단순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완전히 다른 국가였던 백제와 신라가 통일된 것, 신라의 무장이었던 장보고의 사후 혼란한 바다의 상황, 그리고 몇 사람의 주도로 좌지우지되는 집단의 힘 등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고전 소설의 형식과 구조를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처럼 보이고, 그 것들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약간씩 변형시켜 표현한 듯 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묘한 교훈과 감동을 주는데요. 아무래도 과거의 시대, 역사의 흐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살게 되는 인물들은 그 거대한 흐름에서 잠깐 반짝이고 사라지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아주 잠깐의 빛을 위해서 치열하게 애를 씁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이 무언가를 조금씩 미래에 남겨왔던 게 아닐까 싶고요. 백성들을 돕는 일의 허무함을 느꼈을 전우치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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