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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 만들기
이디스 워튼 지음, 최현지 옮김, 하성란 추천 / 엑스북스(xbooks) / 2023년 3월
평점 :
이디스 워튼의 이름은 낯선 편이었다. 이디스 워튼의 소설을 아직 읽지 못해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녀가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구현했는지 같이 떠올리지 못했다. 이름이나마 들어본 <순수의 시대>를 독서 목록에 올려놓았을 뿐.
그럼에도 이 책을 완독한 건 책 제목에 들어간 ’도룡뇽‘의 정체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도룡뇽의 정체를 밝히기 앞서, 먼저 이 책의 정체성은 꽤나 모호하면서 독특한 편이다. 명백히 소설 쓰기의 방법론을 가르쳐주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이디스 워튼의 개인적인 에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작가가 둘 사이의 경계에 있음으로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설 쓰기의 중요한 시사점, 응당 소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며 받아들이게 하는데 대신에 그걸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신 풍부하고 훌륭한 사례들을 모아 소개하는데 그녀의 주요한 활동기가 1900년대 초반이란 걸 감안하면 모두 그 당시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소설들이 대부분이다. 아주 익숙한 고전이 있는가하면 처음 들어보는 소설과 작가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나의 독서력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지만, 나처럼 소설 쓰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도 이 책 하나로 무언가를 깨우치기보단 상당한 번외공부가 필요할 듯하다.
그걸 제외한다면 책에서 말하는 ‘소설’과 ‘소설 쓰기’의 태도와 핵심은 매우 적절하다. 적절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초반부 문장 몇 개를 인용해보면
“그 장면을 구현하는 이야기가 독자의 주의를 끌고 뇌리에 남도록 만들기 위해선 그 순간을 결정적으로 만드는 무언가, 익숙한 사회적 도덕적 기준과 맺는 명시적인 관계, 혹은 한 인간의 충동 사이에서 버어지는 끝없는 투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 24P
“어떤 형태로든 독자의 무의식적이나 끈질긴 내적 질문,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 이 소설이 내 인생의 어떤 판단을 담고 있을까?”에 대한 일종의 합리적인 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37p
“단편소설의 주된 의무 중 하나는 독자에게 즉각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모든 구절이 이정표가 되어야 하며, 절대로 (의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안내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46p
“벤베누토 첼리니는 어린 시절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난롯가에 앉아 있다가 둘 다 불속에서 도룡뇽을 보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때도 그 순간의 광경은 이례적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곧장 아들의 귀를 감쌌고, 그로써 그는 자신이 본 것을 결코 잊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60p
도룡뇽은 바로 이 타이밍에 등장한다. 중심부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독자의 기억 속에 소설을 완벽히 각인시키는 존재. 이야기를 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의미를 상징한 존재이다. 왜 어떤 소설은 다 읽기도 전에 페이지에서 멀어지게 만들며, 어떤 소설은 소설보다 소설 외적인 것에만 관심이 가게 만드는가. 소설을 이야기로써 가치있게 만들며 독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는 어떤 존재가 소설에는 필요하다.
책의 이후 내용에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다루긴 하나 이 책의 가장 큰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디스 워튼의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으나, 어떻게 보면 이전의 고전 소설들이 쌓아온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가치를 다시 되새겨보게 된다. 인간이 이야기에 반응하고 소설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요소에 신경쓰기, 그게 소설을 지배하게 만들기. 대부분의 독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그들의 내적질문를 충족하며 쉽게 방향을 읽고 마는 그들에게 정확한 이정표를 세워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걸 다짐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물론 이디스 워튼의 소설을 읽고 다시 살펴봐야할 책인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