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전자책6)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에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은 사랑하는 양모를 갑자기 잃고 실의에 빠져 산다. 우연히 만난 쾌활하고 다재다능한 유이치와의 사랑이 그녀에게 구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 잘 만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유이치와의 사랑을 통해 카밀라는 21년간 자신을 괴롭혀 온 고통과 절망을 치유 받고 자신의 소중함을 자각한다. 게다가 유이치는 카밀라의 재능을 간파하고 글을 쓸 것을 제안하고 함께 규칙을 정한다. 카밀라는 양부 에릭이 재혼하면서 보내 온 여섯 상자의 과거의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카밀라는 매일 상자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무작위로 꺼내 그 것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쓰기 시작한다.         


처치 곤란했던 잡동사니들이 카밀라의 관심을 받자 소중한 보물들로 변한다. 우연과 규칙과 노력이 만나면 뭔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카밀라는 이 글들을 사물에 들러붙은 삶의 흔적을 찾아가는 형식의 자전소설로 출간하고 주목받는 작가로 인정받는다. 제목은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다.


뉴욕의 한 유명 출판사는 책에 소개된 한 사진에 대한 논픽션을 써서 출판할 것을 카밀라에게 제안한다. 입양되기 전 한국에서 친모가 아기인 카밀라를 안고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카밀라는 사진과 관련돼 어떤 것도 쓸 수 없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년경)’이라는 제목만 붙여 책에 실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동백꽃들은 카밀라(동백)라는 독특하면서 열등감까지 느끼게 한 이름이 아무렇게나 막 지은 이름이 아니라는 것과 친모의 태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찮게 태어나고 버려진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근원적인 위안을 주었던 사진이다.


출산할 때 친모가 열일곱 살의 진남여고 학생이었다는 정보와 사진 한 장을 단서로 카밀라와 유이치는 한국 남쪽의 항구도시 진남에 가서 진남여고를 찾는다. 충효의 고장에서 순결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고 있는 진남여고의 교장 신혜숙은 카밀라에게 엄마에 관한 얘기를 밝히기를 매우 꺼린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카밀라는 조금씩 엄마의 흔적에 다가간다.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인 풍문(風聞)을 작가는 ‘바람의 말’이라고 풀어쓴다. ‘바람의 말’은 천리를 달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휘감아 사건을 만들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예쁘고 생각이 깊고 작가가 꿈이었던 엄마 정지은은 17세에 미혼모가 되고 이듬해 자살한다. 풍문에는 엄마 지은이 국어 교사와 사랑에 빠졌거나 성폭행을 당했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카밀라는 유이치가 프로포즈를 하기위해 함께 탄 유람선에서 갑자기 바다에 뛰어든다. 엄마가 뛰어들어 자살했던 그 바다이다. 카밀라가 자신의 한국 이름은 정희재이고 아빠는 정재성이며 엄마와 아빠는 남매간이었다는 이야기를 신혜숙으로부터 들은 날이다.


극적으로 구조되어 한국을 떠난 카밀라는 유이치와의 관계마저 서먹해진다. 자신은 유이치와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 친밀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희재를 바다에서 구했던 구조원 김지훈은 우연히 라디오에서 “그 때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오빠가 아이의 아빠라고 믿었지요. 하지만 저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전자책 161)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내용을 희재에게 메일로 보낸다.  희재는 외면했던 엄마의 고통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하기로 하고 중단된 논픽션프로젝트를 계속하기로 한다.


지훈이 들었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진남방송국이 ‘바람의 말 아카이브’와 함께 제작한 ‘우리들의 사랑이야기(줄여서 우리사이)’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는 이야기 박물관으로 진남을 배경으로 전해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 전시하는 곳이다.


정지은의 아버지는 진남조선소의 노동자이자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파업하던 생활관에서 끔찍한 화재가 발생해서 4명이 죽고 다수의 조합원이 연행된다.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아버지는 동료들의 죽음에 자책하며 스스로 떨어져 죽는다. 이때부터 지은은 말을 잃는다.


지은의 도서반선생인 최성식은 지은을 동정했고, 지은과 함께 서정주의 시를 읽다가 지은의 말문이 다시 트이는 것을 본다. 최선생은 지은을 여자로 사랑했지만 지은이 최선생을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은이 걸레라서 총각선생을 유혹했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남학생을 따라 양관에 올라가기도 한다는 소문이 퍼진다.    


사실 지은의 말을 되찾아 준 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이다. 이 시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 이야기 박물관 언덕에 있는 앨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시이다. 진남여고 근처에 있는 이 집은 일제시대에 호주선교사가 지은 집이라 양관이라 불렸다. 1922년 한국에 온 목사 메클레인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1939년 막내딸 앨리스가 연못에 빠져죽자 언덕에 묻고 묘비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 남은 앨리스의 영혼이 가족이 떠난 후에도 양관에 살고 있다는 풍문을 사실로 믿었다.   

 

양관의 저주는 나중에 양관을 사서 들어온 진남조선공업 일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1981년 이선호 회장이 갑자기 사망하고, 이듬해 며느리 홍신혜가 자살한다. 87년 경영권을 빼앗긴 이선호회장의 아들 이상수는 승용차를 몰고 바다로 돌진해서 사망한다. 사라졌던 이상수의 아들 이희재는 고향으로 돌아와 양관을 이야기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이곳에서 지낸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 이야기 박물관에는 지은에 대한 온갖 풍문들의 전모가 기록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지은의 친구 미옥은 지은에 대한 미움 때문에 지은과 최성식선생이 정사를 벌이는 것을 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최성식과 결혼해서 임신 5개월 이었던 신혜숙은 지은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남편의 결백을 믿지 못하고 지은의 아이를 멀리 입양 보내기 위해 사실을 조작한다. 결국 지은의 오빠 재성은 동생을 범하고 동생을 도와주려는 교사 최성식을 칼로 찌른 패륜아로 낙인찍히고 실형을 선고받는다. 


오빠의 딸을 낳은 것으로 된 지은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딸 희재가 강제 입양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세상에 저항한다. 한 학생의 거짓말과 한 교사의 의도적인 사건 조작과 사건의 실체에 대한 다수의 무관심이 부른 참극이었다.


소설은 희재(카밀라)가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친부를 만나는 장면에서 끝난다. 친부가 누구인지는 앞의 글만 잘 읽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희재의 친모와 친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일부러 생략했으니 직접 소설을 읽으며 재구성해 보시길 바란다. 지은의 오빠 재성의 이야기나 친부가 더 일찍 희재를 찾지 않았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댓글을 달아 알려주시기 바란다.  


한 인간의 정체성 찾기와 성숙의 과정을 흥미 있게 잘 그린 책이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계속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져 죽은 지은의 아버지 이야기나 부산 신발공장의 부침과 관련된 통역자 서교수의 개인사는 개인의 삶이 사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일깨워준다. 여러 장면에서 삶에 대한 통찰력과 다양한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저자는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작가세계문학상 등을 수상한 40대 초반의 대표적인 중견작가이다. 전에 읽었던 ‘원더보이’도 좋은 작품이었다. 6개월 전쯤 전자책으로 처음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읽었는데 여전히 새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전자책은 아직은 종이책에 비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 노무현정권과 개혁진보진영에 대한 성찰
김기원 지음 / 창비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카페]한국의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성찰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김기원, 창비
2012년 10월 15일 (월) 전민용 gca027@paran.com
 
복지 논쟁, 경제 민주화 논쟁에 이어 정치 개혁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복지도 경제 민주화도 결국은 정치가 바로서야 실행 가능하다는 성찰일 것이다. 안철수 현상이 기존 정당과 정치 에 대한 불신의 반영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안철수 후보는 출마 선언에서 단일화의 조건으로 정치권의 쇄신을 주장했다. 문재인 후보 역시 민주당의 강도 높은 쇄신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무엇이 정치권 쇄신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국어사전에서 쇄신은 “묵은 것이나 폐단을 없애고 새롭게 함, 없애고 새롭게 하다”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존 정치의 묵은 것이나 폐단의 정확한 파악과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개혁진보 정치권은 과거 집권 경험이나 정치 경험들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쇄신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현재 민주당의 대선 후보와 주요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운영했던 참여정부 5년의 공과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대안을 생각해 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는 ‘노무현정권과 개혁진보진영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부제 그대로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고 있는 개혁진보진영의 각 세력에 대한 평가와 대안을 담고 있다. 최근 각 후보들이 비전과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것들이 실행 가능하려면 올바름과 현실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사실 그대로의 인식과 객관적 평가는 미래에 대한 올바름과 현실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반면  교사가 될 것이다. 저자의 평가와 대안은 관점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큰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의미 있는 공론화라고 생각한다.
 
저자에 따르면 노무현시대 역시 빛과 그림자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은 노대통령이 경제를 잘못 관리한다는 것을 부각시켜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비난하곤 했다. 이것은 2007년 MB의 경제대통령 슬로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보수파가 좋아하는 경제성장률로 보더라도 이명박시대 보다 노무현시대가 1-2% 더 높았다. 저자가 보기에는 노대통령은 ‘경포대’라기보다 정치를 포기한 ‘정포대’에 더 가까웠다. 노대통령은 주요 정책을 결정하면서 정치적 고려가 별로 없어 자기편을 축소 약화시키고 반대편을 강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힘 없는 정권은 어떤 정책도 관철하기 어려워졌고 지지 기반은 더 축소되는 악순환을 낳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감동을 주는 정치인이었다. 1988년의 청문회장이나 부산에서 계속된 낙선 행진도 큰 감동을 주었다. 정몽준이 지지를 철회 했을 때 여러 인사들이 정에게 사과하러 가자고 끈질기게 종용했을 때도 “실패한 후보는 될 수 있어도 실패한 대통령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키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통치 시기의 노무현에게서는 이런 감동의 노무현다움이 보이지 않았다. 거꾸로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가벼움이나 참모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독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노대통령의 이단아적 특성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지도자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도록 주위 참모들을 배치했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참모들이나 뾰족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이 되었다. 더구나 통치에 힘을 발휘하려면 국민의 지지가 받쳐줘야 하는데 노정권은 정치적 고려에 소홀했다. 기껏 청와대 권력만을 장악했던 노정권은 취임 당시 한나라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 권력과 재벌, 관료, 언론이라는 또 다른 강한 권력집단에 대한 권력 투쟁에서 결국 패하고 말았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연정 제안이 나왔을 때 황당해 했다. 처음에 노대통령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내놓았다가 누군가 언론에 흘리는 바람에 그냥 덮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노대통령이 치고 나갔다고 한다. 이런 사안은 상대방과 물밑에서 충분히 논의해서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후에 공론화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제안하니 한나라당으로서는 어떤 의도에 말려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총리와 내각을 한나라당에 넘기고 대신 선거구제를 개편하려고 했다. 노대통령의 상식을 뒤엎는 이런 결단이 대통령 전에는 감동을 줄 때도 많았지만 권력을 가진 이후에는 독선으로 보여졌다.
 
기자실 사건은 기자실을 개방형 브리핑룸으로 확장한 일이었다.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언론탄압이라는 쓸데없는 논란을 자초했다. 최소한 진보언론 쪽의 의견이라도 미리 수렴해야 했지만 이런 과정이 없어 모든 언론들의 반응이 나빴다. 기자실을 바꾼다고 언론이 정말 개혁 되었는지도 의문이고 대중의 삶과는 무관한 행정 조치일 뿐이었다. 좋은 일이면 정치적 고려 없이 밀고 나간다는 노정권의 반정치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대북송금 특검은 불가피했을까?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려면 대북송금이 통치행위였음을 내세워야했다. 그런데 김대중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몰랐다고 해버려서 통치행위라고 하기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특검을 수용하지 않으면 총리 임명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한나라당의 협박도 감안했을 수 있다. 특검이 일반 검찰 수사에 비해 수사 목적과 범위를 특정하므로 덜 위험하다는 법률적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특검 수용의 결과는 정권 초반에 주요 지지 기반 중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호남세력이 떨어져 나가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송금에 대해 보고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정권이 더 끈질기게 김대통령 측을 설득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통치행위임을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설득에 실패했더라도 대북관계는 통치행위임을 일방 선언하고 수사 중단을 지시하거나 최소한 어떻든 특검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에 대해 ‘운명’에 따르면 북핵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의 협조가 절실했던 상황에서 미국의 파병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파병을 계기로 북핵문제가 6자 회담 등을 통해 노대통령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 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 생각에는 파병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국민과 진보개혁진영에 대해 충분한 대화나 홍보를 했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한미 관계가 정말 파탄나지 않는 한 한미 관계 때문에 국내 정치를 무시하는 것은 본말 전도라고 본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업고 비전투병을 파병 했던 것처럼 충분히 협상력을 더 발휘할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미 FTA 문제는 개방이냐 쇄국이냐가 아니라 개방의 시기와 방식에 대해 더 공론화 했어야 한다고 본다. 관세인하 효과도 크지 않고 대미 무역 규모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 같은 독소 조항까지 있는 한미 FTA를 서둘러 체결할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미국 제약회사를 위해 죽도록 싸운 인물로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김현종 같은 인물을 기용한 것도 문제였다. 협상의 순서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나 개성공단 문제 등에 유리했던 한-EU FTA를 먼저 체결했다면 한미 FTA 협상이 더 쉬웠을 것이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정치와 행정, 정치가와 관료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노대통령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리주의적 관료들의 입장으로 기울어 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문적 훈련을 받은 관료들이 규정과 명령에 따라 끌어가는 대규모 행정 없이는 근대국가는 존립할 수가 없다. 하지만 관료들은 창의적이기 어렵고 조직이기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결국 정치와 행정의 균형이 중요하다. 비전과 기본 방향의 제시는 진보적인 정치가가 맡고 효율적인 집행은 관료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정권의 성패는 인사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대통령과 철학과 비전을 같이 하되 일처리 능력도 뛰어난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노정권의 인사정책에 대해 코드인사니 회전문 인사니 하는 억지 주장도 많았지만 재고해야 할 부분들도 많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문재인수석은 다른 자리를 통해 정무적 감각을 기른 후 중용했어야 했고, 강금실 법무장관은 검찰 개혁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발탁이라고 본다. 이광재의 삼성과의 유착 문제도 인적, 정책적으로 논란이 될 만 했다. 인재 풀의 한계 속에서 핵심 포스트에 힘을 집중하고 브라질의 룰라처럼 그림자 내각을 미리 발표해 통치를 준비하게 하자고 저자는 제안한다.    
 
민주화 이후에는 대통령도 다른 국가 기관이나 세력과 더불어 권력을 분점 한다. 이들 권력 사이에는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고 때로 이념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민주사회이다. 그런데 한국의 권력집단들은 시대착오적 성격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현실이 있다. 진보개혁 정권은 검찰, 거대언론, 재벌이나 각종 특수 이익 집단과 공공의 이익을 둘러싸고 일전불사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런데 노정권은 이런 투쟁에서 갈팡질팡했고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지 헤맸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노정권은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했다고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검찰을 방치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정권은 역사상 최초로 검찰 개혁을 국가적 과제로 상정하고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비대해진 검찰 권력 축소나 검찰 자체의 비리에 대한 견제 등의 개혁에는 실패했다. 적어도 인사권을 적절히 활용해서 검찰이 특권층을 엄정하게 수사하게 하는 ‘검찰 본분 찾기’는 하도록 했어야 했다. 또한 국정원을 정치 사찰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권력 기관 민주화를 위해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개혁은 정권의 힘이 살아 있는 집권 1년 이내에 끝내야 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혁명정권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식으로 성공한 경우가 없다고 한다. 저자는 먼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이나 싸움을 펼치고 그 힘을 바탕으로 강한 적과 상대해 가는 게 옳다고 제안한다. 전선을 여러 개로 분산하는 것도 불리하고, 순서의 문제도 중요하다. 경기도 교육청도 먼저 무상급식 이슈로 대중의 지지를 확대하고 그 힘으로 인권 조례와 혁신학교라는 개혁정책을 펼쳐나갔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뚜렷한 저항 세력이 없는 금융 위기의 피해자들, 즉 실업자나 주택상실가계들을 위한 구제책을 먼저 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금융 개혁과 의료 개혁으로 나갔다면 더 수월했을 것이란다. 의료는 보험업계, 금융은 월가의 저항 때문에 어려웠고, 개혁도 부실해져 버렸다. 브라질의 룰라는 빈곤층을 위한 보우사 파밀리아 정책부터 밀고 나가며 대중의 지지를 획득했다.
 
저자는 2부에서 한국의 진보에 대해 성찰한다. 한진중공업 사태 평가나 정규직 노동조합의 현실과 문제점도 지적한다. 진보파의 과거 계보와 비현실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시장만능주의라는 용어를 쓰자고 하고 장하준 교수의 주주자본주의관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저자는 한국은 이미 다른 선진국처럼 저성장 또는 중성장 단계에 들어섰고, 성장동력은 필요하지만 삶의 질의 문제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한국 사회를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요약한 부분도 읽을 만하다.
 
최근 들어 문재인 후보는 여러 면에서 참여정부의 과오를 시인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한 더 폭넓고 냉정한 평가와 대안 모색은 문재인 후보뿐 아니라 안철수 후보에게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공동 정부 구성이라는 과제의 동의 여부를 떠나 비슷한 국정 철학과 비전을 가졌던 정권에 대한 평가와 대안 모색은 미래를 설계하는 데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교훈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내용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당사자나 관찰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 제기의 시작이나 의제화라고 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분야에서 더 정확한 평가를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바둑 실력 향상에 복기만큼 효과적인 공부는 없다. 과거 민주 정부 10년 뿐 아니라 이명박정부 5년 까지도 선입견 없이 객관적인 복기와 평가와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새로운 대한민국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쌍용차 희생자를 위한 바자회와 문화제가 5월 11일 대한문 앞에서 열렸다. 영화감독 변영주의 사회도 좋았고 허클베리핀이라는 밴드의 공연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날 네 명의 시인이 심보선시인의 ‘스물세 번째 인간’이라는 시를 함께 낭송했을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시인들 중 김선우의 목소리가 가장 낭랑하게 느껴졌고 오래 여운이 남았다. 아마도 그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집의 대표작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기억하는 같은 제목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이다. 정말 좋은 시지만 이곳에 싣기에는 너무 길므로 꼭 시집을 사서 전문을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여기서는 다른 시를 소개한다.


어떤 비오는 날
김선우

-김수영의 방을 생각하는 빈방에서

1
가지고 있던 게 떠났으면
가벼워져야 할 텐데
꿈 없이 사는 일이
아주 무거워
꿈이 떠나서
몸이 무거워

2
세상의 물방울들아 쪼개진 것들아 쪼개져서도 흐르는 덜 자란 혁명의 격렬한 불면증들아 빙하에서 풀려난 물방울이 더러워진 허공의 상주(喪主)가 되는 비애를 생각한다 빈방을 마저 비운 창백한 몸들아 물방울 하나씩에 사금파리처럼 꽂힌 핏물을 보게 된 오늘의 내 시력이 무겁구나 눈 속은 뜨겁고 빈방은 무거우니 오늘의 숙박부에 나는 이렇게 쓰련다
닥치시오. 나는 다만 물방울만한 방을 원하오.

2012년에 각별한 마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나는 총선의 결과를 보고 절망했다. 쌍용이 강정이 언론파업이 더욱더 힘든 시험을 받게 될 것이 안타까웠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허탈했다. 꿈이 떠나서 몸이 무겁고, 덜 자란 혁명이 주는 불면증과 핏물이 된 물방울들에 깊이 공감했다.

부재로 붙은 ‘김수영의 방’을 검색해 보았다. 두 시가 다 좌절과 절망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딛고 나아가는 새로운 결연함이나 희망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번갈아 읽어 보시길...


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김선우는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이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연애시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 시를 소개한다.


반짝, 빛나는 너의 젖빛
김선우

그러니까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별안간
젖꼭지처럼 보인 날이다
하늘을 쳐다보다 입안에 단침이 고인 날이다
거기에 입술을 대고 싶어
배꼽 밑이 찌르르해진 날이다

그러니까 오리온이라는 힘센 사나이의 중심
움푹 팬 상처처럼 고인 허공에서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느낀 날이다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시선으로
살맛 달큰한 비린내가 초유처럼 흘러든 날이다

은하는 깊은 곳으로 찔린 듯 쏟아지고
지구인 내 취향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것인지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너의 별자리들마다
모조리 양성구유인 소한(小寒) 날이다


배꼽 밑이 찌르르해지도록 섹시한 힘센 사나이 오리온이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가지고 있단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벽을 허무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랑이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지 않을까?

이 시와 대비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지만 검색하면서 발견한 김수영의 지독한 사랑시도 하나 소개한다. 남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느껴지는 시다. 하지만 자신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이 시인과 독자 사이의 벽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性(성)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튼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연민)의 순간이다 恍惚(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영리병원과 의료민영화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던 날 뒤풀이에서 김선우의 시를 읽어 주었다. 이 날 북카페에 시집도 소개해달라는 김선생의 요청에 용기를 내어 보았다. 나의 사족들은 무시하고 시들만 반복해서 읽으시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부모 -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 부모거나 부모가 될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책 (전민용의 북카페)

 

아이들이 아프다

“너 이러면 정상으로 못 살아!” “안 그럼, 엄마는 날 죽일 거야.” 성적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던 엄마를 죽인 고3 남학생이 엄마와 나눈 마지막 말이다. 너무 극단적이긴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 부모와 아이들이 놓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고, 나는 그런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지만 부모들은 그 사건이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안다. 성적과 공부 말고는 관심도 할 말도 없는 부모에게 아이들은 절망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면 적어도 한두 가지 정신병리적 증상을 나타낸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정신적 긴장과 고통에 짓눌려 있다. 부모에게 호소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아이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선택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가출하고 급기야 살인사건까지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원형탈모나 틱, 복통과 두통, 손바닥 다한증, 수면장애나 우울증 등의 학업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 더 다양해지고 발병 연령도 매우 낮아지고 있다. 고3 수험생의 불안 증상들을 초3 정도부터 겪는 경우가 늘고 있다.

초5 세환이는 과학만화책을 좋아하고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저학년 때부터 집에서 이런저런 실험하는 것을 지켜보던 엄마는 세환이를 영재학원에 보냈다. 몇 달 후 아이는 아예 과학에 흥미를 잃어 갔고 학원에서 내주는 창의력 숙제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게 되었다. 급기야 아이는 복통과 틱 증상이 심해져 상담실을 찾았다.

고3 민선이는 시험불안이다. 오른손이 불에 덴 것처럼 아픈 통증 때문에 연필도 잡지 못한다. 가끔 격심한 두통도 나타난다. 병원에서는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증상은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성적이 더 이상 오르지 않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통증이 생기면서 악몽, 설사, 귀가 멍한 증상 등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의 증상은 한 증상을 또 다른 증상으로 덮으면서 악화되고 있었다.

고2 재혁이는 밤에 혼자 공부하다보면 ‘히히히’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떤 날엔 누군가 자신을 문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에게 무서움을 호소했지만 공부에 집중하지 않아 자꾸 그런 공상이 생기는 거라고 했다. 이런 증상은 고1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이 크게 떨어진 후에 시작됐다. 급기야 시험 시간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병원에 가게 되었다, 환청과 환시로 약물치료를 받고 상담을 받으러 왔다. 재혁이는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인 것 같고, 엄마를 나쁜 사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모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있었다. 아이는 이런 분노를 느낄수록 죄책감도 드러냈다.

견뎌내기 위한 청소년 일탈행위

살아남기 위해 병드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일탈행위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 여중생이 임신을 했다. 엄마는 아이의 거의 모든 일과를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하는데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충격이 컸다. 아이는 학원옥상에 올라가 남학생과 성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또 다른 여학생은 시험 전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남자친구와 노래방에 가 휴대폰을 꺼 놓고 놀다가 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미친 년’이라고 욕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다음날 아이가 세 과목에서 한 개만 틀리는 좋은 성적을 받자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는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놀면 문제가 없지”라며 기뻐했다.

다른 여학생 역시 지금까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왔지만 이제 더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기력감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노래방에서 종종 성관계를 맺었고, 그를 정말 사랑했지만 헤어지게 되어 죽고 싶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냐고 묻자 성적이 떨어지면 엄마가 더 캐묻고 잔소리를 하기 때문에 맘껏 우울해 하거나 괴로워 할 수도 없어 더 힘들다는 것이다.

현재 아이들에게는 재미도 의미도 없는 그런 공부를 ‘해내고’ ‘해드리기’ 위해 아이들은 일탈이 필요하다.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면서 힘든 삶을 견뎌낸다. “열심히 하면 진짜 편하게 놀 수 있으니까 참죠.”라고 말하는 아이들. 위태로운 일탈이지만 그 덕분에 숨통을 트인다. 처음에는 증상을 계기로 부모의 관심을 끌려했던 아이들도 나중에는 더 이상 어른들께 호소 안한다. 결국은 공부를 더 잘하도록 만들기 위한 다독거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홀로 망가져간다.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의 1위가 자살이다. 2010년 우울증조사에서 서울시내 중고생 중 17.2%가 우울감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0년 학교를 그만 둔 아이들이 7만 명이 넘고 집 나와 떠도는 아이들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 문제 중에는 ‘무기력’을 빼놓을 수 없다. 제법 많은 아이들이 먹고 잠만 자는 개가 부럽다고 한다. 정희의 경우에도 엄마와 같이 싸우고 화내고 울고 하는 것은 많이 해 보았지만 서로 힘들기만 할 뿐 같은 상황만 반복되어 결국 택한 방법이 무기력이었다. 아이는 초6 때 야단맞고 울다가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고 했다. 엄마 따라 상담실에 온 이유는 상담까지 받아도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성적이 좋아도 나빠도 아이들은 병들고 있다

성적이 떨어져 상담실을 찾는 아이들도 있지만 성적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서 오는 애들도 많다. 부모의 학력이나 소득이 비교적 높은 것도 특징이다. 더 큰 문제는 공부를 잘하려면 마음의 병 한 두가지 증상은 병으로 여기지도 않고 당연시 해버린다는 것이다. 한 술 더 떠 그런 증상 하나쯤 있어도 되니 공부 잘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부모들도 있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이비리그에 진출한 아이들 상담이 급증한다. 민수의 경우에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니며 공부는 잘 했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해 외로움이 쌓이고 허무감이 덮쳐 무너져 버렸다. 특목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민규도 취직한 직장에서 융통성 없고 이기적이라는 계속되는 꾸지람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모멸감과 열등감에 분노가 치솟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아이들이 겪는 이런 어려움은 ‘정서적 발달지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거나 상대의 정서에 이입해보는 일 같은 것이 너무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부모가 될 것을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다.

‘부모안티카페’에 들어가 보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느끼는 분노가 너무 적나라해 섬뜩하다. 공부만 강요하는 엄마를 ‘미친년’ ‘개 같은 년’ ‘씨발년’ ‘개창년’ 이라 부른다. 아버지는 ‘개새끼’ ‘씹새끼’ ‘씨발놈’ ‘좆같은 새끼’ ‘찌질이’ 등이다. 아이들의 적의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엄마에 대한 분노, 공부 못한다고 성적 떨어졌다고 멸시당하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공부와 연결시켜 공부라는 말을 통해서만 아이와 만나는 천박한 부모에 대한 분노이다.

성공하면 부모와 연을 끊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고 실제 사례도 많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 가족을 버리고 학교를 버리고 아예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고도 한다. 가스통을 가져가 학교를 폭파해버리고, 불을 지르거나 급식에 독극물을 넣어 다 죽인 뒤 자신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도 있다.

부모실종 시대

부모실종시대의 사례. 대기업 이사, 어머니는 전업주부, 아이는 둘. 아이 교육문제로 늘 부부는 다퉜다. 사교육비로 살림은 쪼들렸지만 단호한 아내의 태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이 되자 엄마의 공부 강요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엄마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아들하고 크게 한 판 붙은 날이면 퇴근해 온 남편에게 화를 퍼부었다. 어느 날 아들이 정말 미워서가 아니라 이런 상황 자체가 다 싫어져서 이성을 잃고 아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이는 마음을 닫았고, 몇 번 반복되자 학교를 자퇴하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집을 나갔다.

가끔 자취방에 가보면 게임하고 있거나 술에 취해 자고 있거나 아예 집에 오지를 않는 아이를 보면서 아버지는 상담실에 전화로 호소했다. 자기 탓도 있지만 아내 탓도 큰 것 같아 원망스럽고 상황이 절망스러운데 부모 말은 들을 생각을 안 하니 선생님이 상담을 권해달라는 얘기였다. 아이에게 전화했지만 아이는 “씨발놈이 이제 별지랄을 다 하네. 아저씨, 그 새끼한테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니들이나 잘하라고 그러세요.” 말을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전권은 엄마가 행사한다. 아버지는 그저 돈이나 벌어오고 엉뚱한 소리나 안 하면 다행인 엑스트라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엄마는 아버지를 교육에 끌어들인다. 역할은 아이들을 휘어잡는 군기반장이다. 그러나 그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해 아버지들은 좌절한다. 물론 아버지 중에는 아이들이 더 많이 놀고 더 여유 있게 커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설득할 여유도 영향력도 없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뒷바라지하는 엄마들의 숨겨진 불안과 욕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엄마로서의 존재감은 아이들이 좋은 대학가고 성공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자기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성적이 떨어지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엄마와 멀어지려고 하면 엄마들의 불안과 공포는 광적인 집착으로 변한다.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 같은 공포 때문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삶을 돕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점잖은 엄마들도 사실 더 교묘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아이들을 집어삼키려고 한다.

아이를 포식하는 것이 반드시 쥐고 흔들고 통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공부하는 ‘철난’ 아이, 성적 떨어지면 슬퍼하는 엄마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는 ‘효자’ 아이, 부모의 인정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아이, 엄마의 유일한 기쁨이 되려는 ‘속 깊은’ 아이, 이런 아이들로 만드는 것도 모두 아이들을 포식하는 것이다.

요즘 아버지들은 자신이 개방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들과 장 보러 다니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외식이나 여행도 한다. 때로 아이들에게 고민거리도 물어보고, 밥상에서 썰렁한 농담도 던져본다. 이런 것을 아버지 자신들은 대단한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깨인 아버지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맞다. 깨인 아버지가. 다만 아버지의 윗세대에 비해 깨인 분들이다.

2010년 고민이 있을 때 누구와 상담하겠냐는 질문에 오직 0.9% 아이들만이 아빠와 상담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들의 60%는 아이들이 자기를 대화상대로 생각한다고 믿는다.

규형씨 회사는 거의 전쟁터다. 전에는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언젠가부터 서로를 비난하고 아부가 난무한다. 난리통에 유탄을 맞고 쓰러진 이야기, 백병전으로 상대를 쓰러뜨린 이야기, 심리전으로 속여 넘긴 무용담이 술자리 안주다. 이사 진급이냐 낙오냐 기로에 있는 규형씨 같은 부장급이 가장 위태로운 목숨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와의 잠자리도 일 년에 두어 번 할까 말까고, 아내는 침대에서 규형씨는 바닥에서 자는 ‘각층 부부’가 되었다. 동기들 중에는 각방 부부도 제법 된다. 가족은 밥 먹는 입이라는 뜻인 식구가 되었다. 가족은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고 그 요구의 대부분은 투자에 비해 보장은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이라는 허울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한국판 타이타닉

한국판 타이타닉. 난파되고 있는 배에서 구명조끼 몇 개가 던져진다. 사람들은 구명조끼 하나라도 잡기위해 필사적이다. 99%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튼튼한 구명조끼를 잡기위해 이전투구 하는 동안 잘 차려입은 몇몇 사람들은 쾌속선을 타고 사라진다. 난파하는 배는 우리 사회고 가정이다. 구명조끼는 대학이다. 쾌속선은 학력, 재산, 인맥으로 짜인 그들만의 리그다. 한국의 부모들은 부모 자식 사이가 원수가 되고 가정이 무너져도 대학을 구명조끼라고 믿고 모든 것을 걸고 올인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사실은 대학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번 속고 있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초,중,고 12년 동안 대학 가느라 잠을 못자고, 대학 가서는 취업 준비하느라 잠을 못 자는데 언제 잠을 자나?” 외국인 친구의 물음에 “걱정마라. 대학 졸업하면 백수가 된다. 그 때 실컷 잔다.”고 대답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정규직에 취직하는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투자에 비해 터무니없는 결과만 가져다주는 대학에 왜 부모들은 모든 것을 거는 걸까? 심지어 아이 교육비 때문에 야간 대리운전을 하고 노래방 도우미를 불사하면서.

학교라는 제도가 주는 혜택은 불확실하지만 거기서 벗어났을 때 닥칠 어려움은 더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낙오자가 되느니 제도 안에서 의무와 폭력을 견디는 것이 낫다. 비빌 언덕이 없는 한국의 부모들에게 교육은 생계형 보험이다.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한 교두보가 아니라 신분 하락을 막아줄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그나마 잡지 않으면 아무런 미래도 없을 것 같아 대학이라는 보험을, 구명조끼를 놓지 못한다.

누군가는 한국교육은 판돈이 크게 걸린 아슬아슬한 도박이라고 말한다. 제도나 시스템이 허울이나 연막뿐이라는 것을 알고 돈과 빽에 다가갈 동아줄을 잡는 일에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올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외면하고는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막막함이 심각한 고통이 될 때 부모들은 전문가를 찾는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 감정코칭, 아이메시지 대화법, 자기주도학습, 자존감 향상, 청소년 심리, 창의성 교육 등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기법과 매뉴얼을 익히는 것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자칭 전문가들이 교육시장의 하이에나들이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치열한 토론을 바탕으로 해법과 대안을 모색한다. 연대의식, 정신적인 삶, 공동체 배려 등을 논한다. 유럽, 뉴질랜드, 캐나다에서 가능한 교육을 대한민국에서도 실현하기 위한 22가지를 제안 한다. 핵심은 대안 22가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아픈 교육 현실에 대한 공감과 원인 파악과 탈출구를 찾는 길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절절한 부분이 많았다. 글쓴이들의 자기 경험과 반성적 성찰도 공감이 되었다. 대한민국 부모 누구도 이런 성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발상 전환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제도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면적 교육 혁명을 의제화하고 실현시켜나갈 대선 후보는 없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의자놀이
공지영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철수의 생각’과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가히 공안정국이다. ‘안철수의 생각’이 잘 정리된 정답지라면 ‘의자놀이’는 우리사회에 대한 전 과목 문제집이다. 쌍용자동차 이야기에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구조의 모든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2명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심각한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다.

공지영이 쌍용차 문제를 처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3번 째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부터다. 무급휴직자 임성준은 빨리 집으로 와 달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귀가한다. 그는 옷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내 서미영은 무심한 걸음걸이로 베란다로 나가 그대로 밖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베란다로 나가는 엄마를 빤히 보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해고된 지 1년이 흐른 후였다. 다시 1년이 채 안 되어 임 씨가 자살했다. 열일곱, 열여섯 남매는 고아가 되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도 평택으로 달려갔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그녀의 말에 현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빠들은 수시로 자신에 대한 통제가 잘 안 되는 고충을 털어놨다. 헬기에 위협을 당했던 아이들은 지금도 선풍기 소리나 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못 견딘다고 한다. 회사에서 쫓겨난 2646명 중 19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0%가 고도 우울증, 30%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심각한 부분적 기억 장애 등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보여 주었다.

정혜신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단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 얻는 심리적 내상이다. 그들은 단순히 해고되고 실직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전쟁터 같은 경험을 했다. 그들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관련된 기억이나 이야기를 하려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통증이 오고 악몽을 꾼다. 서로를 피하게 되고 치료도 쉽지 않다. 이전에 아무리 낙천적이고 심리적으로 튼튼하더라도 예외 없이 걸린다. 자살률도 가장 높다.

1986년 쌍용그룹은 동아자동차를 인수하고 1988년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한다. 1998년 외환위기로 쌍용그룹의 사정이 악화되자 대우자동차에 매각된다. 2000년 대우그룹이 해체되자 쌍용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후 2002년에 흑자를 내고 2003년에는 당기 순이익 5897억 원을 올린다.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 회사에 대해 정부와 관료들은 신자유주의와 민영화 만능론에 홀려 회사를 팔아야 한다고 굳게 생각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2004년 10월 노조와 금속노조연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하이차에 매각한다. 1조 2천억 원에 이르는 쌍용차를 5909억 원에 파는데 상하이차가 실제 지불한 돈은 1200억 원에 불과했다. 상하이차가 네 번에 걸쳐 합의했던 투자는 단 한 건도 지켜지지 않았다. 노조는 상하이차가 기술만 빼돌리고 경영에는 관심이 없다는 진정과 고발을 계속 했지만 묵살된다. 결국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오자 사측은 일방적인 구조조정 준비에 들어간다.

2009년 1월 8일 상하이차는 쌍용차의 법정관리 신청을 의결한다. 이 법정관리 신청은 이상한 점이 많다고 한다. 별다른 개선 노력도 없었고, 부도 위기도 없었고, 재무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정리해고 과정이 불법이라는 혐의도 있는 것은 안진회계법인의 쌍용차 자산평가액이 1년 만에 5177억 원이나 감액된 사실이다. 이 회계보고서 때문에 168%에 불과했던 부채비율이 갑자기 561%로 증가하고 980억 원의 당기 순손실 역시 3개월 만에 7100억 원으로 계산된다.

쌍용차의 의뢰를 받아 삼정 KPMG는 안진회계법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2646명을 감원해야 한다는 결과를 내 놓는다. 둘 다 우리나라 최대의 회계법인들이다. 이른바 론스타의 ‘먹튀’를 도왔던 삼정 KPMG는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팔 때 주간사가 된다. 이 주간사 중에는 이상득 전의원의 큰 아들이 몸 담았던 맥쿼리 증권의 이름도 보인다. 회계조작을 권장 또는 주도한 혐의가 짙은 안진회계법인은 쌍용차를 매입하는 인도 마힌드라사의 주간사로 다시 변신하고, 현재까지 마힌드라사의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가 막힌 이익의 관계망이다.

새로 출범한 한상균 노조가 노동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자구안을 내 놓았지만 무시하고 회사는 정리 해고를 단행한다. 해고하려는 2646명은 전체 노동자의 37%, 현장직의 43%에 달하는 숫자였다. 정리해고에 대한 기준도 모호했다. 공지영은 정리해고 과정을 보면서 의자를 사람 수 보다 적게 놓고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친구를 밀어버리고 내가 앉아야 하는 의자놀이가 생각났다고 한다.

정리해고 확정 발표 20일 후인 5월 13일, 조합간부 세 사람이 30층 건물 높이인 70미터 굴뚝으로 올라간다. 이들은 파업 투쟁이 끝날 때까지 86일 간 거기 머문다. 5월 22일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고, 한 때 1500명 까지 숫자가 늘어나기도 하였다.

회사는 해고 안 된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비인간적인 노노갈등을 부추겼다. “동료가 살겠다고 데모하는데 내가 그들을 욕하는 구호를 외치니 사람이 할 짓인가”며 한탄하던 한 조합원은 관제데모 후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 그 이틀 후에도 희망퇴직자 중 한 명이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한다. 해고 시작되고 한 달 만에 다섯 명의 희생자가 나온다.

6월 26일부터 32시간 동안의 첫 충돌이 있었다. 용역깡패와 구사대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격했고 노조는 처음엔 스크럼으로 맞서다 결국 쇠파이프로 대항했다. 90여 명 부상, 23명 연행, 2명이 구속되었다. 본관과 노조방송차도 빼앗겼지만 충돌 과정에서 노노간에 되돌리기 힘든 적개심이 생긴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공지영은 유신 시절에 학생 둘을 세워놓고 따귀 때리기를 시키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다. 장난스레 건드리다 선생이 한 아이를 냅다 갈기며 엄포를 놓으면 결국 서로 독이 올라 있는 힘껏 때리게 되는 잔인한 장면을.

경찰이 투입되고 공장을 전면 봉쇄하기 시작한다. 단수와 단전에 의료진의 출입도 막는다. 인권단체들과 민주노총의 강력한 항의와 요구, 물만이라도 들여보내라는 호소에 사측은 답변한다. “물 먹고 싶으면 나와서 먹어라.” 그 와중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걸리면 집도 다 빼앗긴다는 협박을 받아온 노조 정책부장의 서른 살 아내가 두 아이를 두고 자살한다.

새총으로 쏜 손가락 두 마디만한 볼트가 수시로 날았다. 순간적으로 5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테이저건과 고무로 된 총알을 쏘는 고무총도 사용되었다. 사람을 위협하는 헬기와 거기서 뿌려대는 최루액, 밤새 계속되던 선무방송도 조합원을 괴롭혔다. 그들은 에어컨 냉각수로 하루 한 끼의 밥을 해 먹고 수증기를 다시 모아 마셨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 있는 비상발전기를 도료가 굳지 않게 하는데 사용했고 공장을 정성껏 관리했다. 그들은 다시 일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8월 5일 최후의 전투와 폭력적 진압이 시작되었다.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를 타고 투입되었고 무차별 구타와 연행이 이어졌다. 다목적 발사기라는 신무기도 사용되었다. 경찰들은 넘어지거나 쓰러져 있는 노조원들도 방패와 곤봉으로 집단 구타했다. 영상으로 잡힌 장면들도 끔찍한데 노동자들은 영상은 실제 당한 것의 1/10도 안 된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8월 6일 노사 합의가 이루어지고 파업은 끝난다. 이 날 합의된 약속들은 이후 단 한 건도 지켜지지 않는다. 96명이 연행되어 2009년 말까지 66명이 구속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평탄한 중류층으로 살던 가족들도 평생 처음 보는 공권력의 횡포 앞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받았다. 경제적 고통도 매우 컸다. 부상자들의 보험급여는 환수되었고, 가압류와 손배소에 쌍용차 출신은 취직도 안 되었다. 보수언론은 이들을 “회사가 죽든 살든 자기들만 살려는 이기적인 집단, 빨갱이”로 매도했다.

처음 쌍용차 희생자들은 자살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심근 경색 및 뇌출혈로 스러져갔다. 초기의 몇 건의 자살 기도들은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가 복직을 약속한 일 년이 지난 시점부터 자살자는 급증하고 그 방법도 극단적으로 변한다.

정리해고법에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해고 회피 노력, 공정한 기준, 성실한 협의 등 다섯 가지 단서조항이 달려있다. 처음에는 이 조항들이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나 최근 3년 동안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이 단서가 관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리해고와 관련된 모든 파업은 불법이고 노동자들은 금전적 손해까지 물어야 한다. 유연화라는 명분 아래 해고의 유연화, 빈곤의 유연화, 살인의 유연화, 살인 은폐의 유연화, 인간 경시의 유연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지영은 잘나가던 쌍용차를 헐값에 매각한 노무현 정부의 경제 관료들과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조작 의혹이 짙은 상하이차의 ‘먹튀’를 방조한 이명박 정권은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회계 법인들, 전 경기도 경찰청장 조현오, 쌍용차의 노무 관리팀, 보수 언론들도 마찬가지로 이에 답하라고 말한다.

공지영은 재능 기부로 이 책을 썼고, 작가와 출판사의 모든 수익금은 기부된다고 한다. 쌍용차 문제 해결의 중대한 진전의 계기가 될 것이다. 쌍용차 문제의 해결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일자리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일차적이지만 그 이상의 우리 사회 전반의 개혁 과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해고가 곧 나락이고 죽음인 현실과 경제 구조와 복지, 정리해고와 정리해고법, 국가 폭력과 인권, 사법 체계, 일자리와 노동, 언론, 대형 회계법인의 문제 등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과제로 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22명의 죽음이 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제 2의 전태일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