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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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이 케케묵고 낡아빠진 이름들은 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사라지지 않는가. 왜 누군가는 이런 폭력을 당하는 희생자가 되거나 생존자가 되어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누군가는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다 힘없이 꺾이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약자에 보편하는 억압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새롭게 인식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지문>을 읽어야만 한다.

윤의현과 오기현, 성은 다르지만 둘은 연년생 자매였다. 언니인 의현이 연락두절된 동생의 실종신고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평 청우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동생이 남긴 말은 단 한 줄,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유서를 남긴 채 투신한 모든 정황이 자살을 가리키지만 담당 형사 규민은 이 사건을 좀 더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변사체로 발견된 기현과 그녀를 중심으로 하나씩 밝혀지는 아동학대, 가정폭력, 대학 내 성폭력. 거침없이 소용돌이 치는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형사 규민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거침없이 내달린다. 과연 의현의 죽음에 얽힌 사건들을 해결해낼 수 있을까!

의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일상처럼 자행되는 폭력의 형태들. 몰라서 당하기도 하고 알면서도 당한다.
<지문> p.202

어렸을 때부터 의부 오창기로부터 성적 폭력을 당해온 오기현, 노예처럼 부림을 받으며 노동력 착취를 당하며 살아온 신명호, 대학교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으나 사실을 덮으려는 대학교로 더 큰 상처를 받은 김예나. 오기현, 신명호, 김예나 이들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가 아닐까. 근친 성폭력, 장애인 노동력 착취, 대학 내 성폭력 등 권위와 위력의 차이가 존재하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따라 생겨나는 폭력의 다양한 모습들. 강자는 약자를 향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폭력을 가한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일상처럼 자행되는 폭력들은 '일상'처럼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불운한 경우의 수와 견주어 가능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사람들은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한다.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환한 빛 아래 숨겨진 어둠의 불씨가 너무 많았다. 그녀에게 내 아픔을 털어놓았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음의 어두운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의 흰 점은 포함되어 있으며, 양의 흰 소용돌이 속에서도 음의 검은 점은 있다고 했다.
<지문> p.316

빛이 어둠을 이기고 선이 악을 이기려면, 최소한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성폭력 앞에 힘없이 주저앉았던 이들을 향해 "결국 너도 좋았던 것이 아니냐"는 쓰레기 같은 말을 내뱉는 삼류가 되어서도 안된다. 지금도 또 다른 오기현, 신명호, 김예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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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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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로 지금과 여기를 버틴 위,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뒤로하자. 그것이 우연히 주어진 인생이라는 게임의 주도권을 내게로 되찾아오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단어가 내려온다> p,24


7편의 단편이 담긴 <단어가 내려온다> 중에서 단 한 편만 고르자면 <마지막 로그>에 가장 마음이 갔다. <마지막 로그>는 안락사, 존엄사가 일상이 된 미래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A17-13'의 마지막 일주일을 담았다. 존엄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인생의 주도권을 찾아오겠노라고, 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에서 모든 것을 뒤로 하겠노라고 다짐한 'A17-13' 역시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인공 'A17-13' 은 불행했다, 그 누구의 불행과 견주어도 자신의 불행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을만큼. 그녀의 어머니가 중증 치매 진단을 받아 시설에 입소해 수입의 대부분을 요양원비로 지출하게 되었고 그녀가 사랑한 반려묘인 별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때 1형 당뇨로 투병해온 그녀는 당뇨망막병증이라는 새로운 병명을 얻게 된다. 꾸역꾸역, 절박하게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안락사 기관 홍보 영상을 보게 된다. "이곳은 당신의 존엄을 완성할 마침표입니다.(p.21)" 주인공은 돈이 되는 일을 찾아 닥치는 대로 한다. 자신의 존엄을 완성하기 위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자신에게 생애 최고의 마지막 일주일을 선물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곳에서 담당 안드로이드 '조이'를 만나게 된다.



이 모든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강인함은 어째서 인간의 것이 아닐까. 어쩌면, 혹시라도, 나는 이 따듯한 무심함에 기대어 엄마와 별이와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함께하지 못했던 그들의 마지막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도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단어가 내려온다> p.36


'A17-13' 은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지,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 "어쩌면, 혹시라도, 나는 이 따듯한 무심함에 기대어 엄마와 별이와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p.36)"라는 생각에 '조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녀의 안락사 직후 조이 역시 폐기될 예정에 있었다. 조이에게 "폐기되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



빛이 별을 떠나 우리의 눈에 도착하기까지 몇백, 몇천, 몇만 년이 걸리고, 어떤 별은 그 사이 소멸했을지도 모르기에 모든 빛이 떠나온 곳의 현재 존재를 증명하진 않는다는 걸 배웠다. 그 무렵 밤하늘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더 나이를 먹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밤하늘에 펼쳐진 것은 시간과 공간이었다. (중략)밤하늘에 가득한 건 슬픈 소멸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단어가 내려온다> p.44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주체적인 삶과 존엄한 죽음 중에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오롯이 나 자신인 채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까. 이 세상에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더 존엄한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들 말이다. 별의 슬픈 소멸로 가득했던 밤하늘이, 어느 순간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여질 때가 있듯, 우리의 삶도 그러할지 모른다, 아니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오롯이 당신인 채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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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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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말이 필요없다'는 표현은 이런 소설에나 필요한 말이 아닐까", 라는 문장 하나로도 충분하다 싶은 소설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언어도단적인 문장인가, '말이 필요없다'라는 말이 필요하다니! 다시 읽어보고 또 다시 읽어보아도 이상야릇한 문장이다. 하지만 진심이다. 소름끼치게 재미있고, 얼마나 소름끼치게 재미있는지 설명하고 싶지만, 내가 무언가를 표현하는 순간 그 무엇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할지를 모르겠는 소설, <영매탐정 조즈카>다!



"영매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존재죠. 그렇다면 저는 논리를 이용해 히스이 씨의 힘이 현실과 이어질 수 있게 돕겠습니다."

<영매탐정 조즈카> p.111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조즈카는 영매이다. 영국인 할머니의 영향으로 파란 눈을 가진 쿼터 혼혈인이며 그녀의 증조할머니 역시 영국에서 영매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그녀의 조상은 단두대에서 많은 사람을 처형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대가로 죽은 자를 대면해야 하는 저주받은 피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했을지도 모른다.



비취색 눈, 굽이치는 머리카락, 도자기같은 피부를 가진 그녀의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죽음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살인 현장에 머물러 있는 희생자의 영혼과 접속해 그의 말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조즈카는 이런 치트키와 같은 능력으로 "저 범인이 누군지 알았어요. 바로 범인은..!!"이라며 사건 현장에서 그 즉시 범인을 밝혀 버린다. 하지만 이런 영적 능력으로 알아낸 사실은 수사에서 증거가 될 수 없는 법, 마치 어려운 수학 방정식의 해답을 알고서 풀이를 해나는 것처럼 추리 소설가 고게쓰는 영매 조즈카가 밝혀낸 사실을 논리적 증거를 찾아 추론해나간다. 영매와 추리소설가, 환상의 파트너인 조즈카와 고게쓰는 우는 여자 살인 사건, 수경장 살인 사건, 여고생 연쇄 교살 살인 사건을 차례로 해결하며 눈부시게 활약한다. 일련의 사건들에 하나 더, <영매탐정 조즈카>를 관통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연쇄 사체 유기 사건으로 혼자 사는 이십 대 여성을 납치해 살인하고 유기해버리는 사건! 범인은 시체 외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 지능범이다. 조즈카와 고게쓰는 이 연쇄 살인 사건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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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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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다해 전력질주를 하는 심정으로 읽어내렸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마주하고 나니 모든 것을 소진해버린 철지난 낙엽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바스라질 것만 같다. 작가 정유정의 이야기는 매번 읽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에너지를 다 써버리게 한다.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폭군같은 장악력과 압도적인 서사력, 유려하고 유연한 문장들과 현실감 넘치는 인물과 이야기, 이 모든 게 그녀의 이야기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른 우주를 가진다.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 아내의 우주였다. 행복은 가족의 무결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타협이 있을 리 없었다. 

<완전한 행복> p.117



완전 무결한 행복을 위해 유나는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없애야 한다고 믿었고 그녀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전 남자친구, 전 남편,  심지어 가족까지 자신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에 맹목적이었다. 어렸을 적 가족의 부재로 인한 생겨버린 완전한 행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그녀가 다시는 불완전한 행복 속에 스스로를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했을 것이고 그 신념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렸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강탈해 완전한 행복을 누렸을 그녀의 언니, 재인을 미치도록 증오했다. 끝없이 제 것을 훔쳐가는 도둑년이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믿었고 하나의 신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신념은 유나를 끝없이 내달리는 폭주기관차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그 누구든 거침없이 폭력을 가하고 난도질해버린다. 결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녀는 방에서 도망쳐나왔다. 아니, 기억으로부터 도망쳤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후에야, 도망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두고 왔어야 할 인형을 손아귀에 꽉 틀어쥐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 혈관으로 불이 통과하는 걸 느꼈다. 기어코 기억이 열렸다. 송곳니에 덜미를 물린 강아지처럼, 속절없이 끌려갔다. 

<완전한 행복> p.152



유나와 재인이 어릴 적,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신부전 말기 진단을 받았고 아버지는 퇴역 후 사업을 막 시작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가정부를 쓸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탓에 가평 우혜리에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막내인 유나를 잠시 맡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유나를 데려올 형편이 되지 못했다. 유나는 언니 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 그녀의 집까지도.  


 


유나 대신 부모님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언니 재인에게도 완전한 행복은 부재했다. 동생을 대신해 가족 곁에 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어린 딸을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으로 재인을 향해 늘 날이 서 있던 어머니와 그런 큰 딸이 늘 안쓰러웠던 아버지 사이에서 긴장하며 살아왔다. 유나와 재인, 그 누구도 완벽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지만 유나는 빼앗겼다는 상실감에 괴로워했고 재인은 누리지도 못한 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느날 재인은 유나의 방에서 마구 잘려나간 오리 인형을 발견한다. 고무줄로 의자 등받이에 꽁꽁 묶여 눈알 한쪽이 뽑히고 배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물갈퀴가 갈기갈기 찢겨나간 오리인형. 마구 난도질당한 인형은 '재인' 이라는 이름표를 차고 있었다. 유나는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그 오리인형처럼 난도질해버린다. 


이제 행복해?

아내는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아니. 나는 참 운이 없어.

<완전한 행복> p.519



완전무결한 행복에 집착하는 유나는 타인의 행복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조종하고 지배하며 결국엔 가차없이 파괴해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도 끝내는 '나는 참 운이 없어.'라는 자조섞인 말을 내뱉는 그녀를 보며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유나가 한장씩 쌓아올린, 완전한 행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은 결국 그녀의 손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카드로 지어진 그 집이 공중에 흩날리는 순간, 이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의 행복이 희생되어선 안된다는 사실, 내가 누리는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대가로 해선 안된다는 진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타인의 행복을 대가로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고, 그 어떤 행복이라도 타인의 행복을 침범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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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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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숨참고 읽었다! 진짜같아서, 너무 긴장되서!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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