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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평점 :

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로 지금과 여기를 버틴 위,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뒤로하자. 그것이 우연히 주어진 인생이라는 게임의 주도권을 내게로 되찾아오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단어가 내려온다> p,24
7편의 단편이 담긴 <단어가 내려온다> 중에서 단 한 편만 고르자면 <마지막 로그>에 가장 마음이 갔다. <마지막 로그>는 안락사, 존엄사가 일상이 된 미래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A17-13'의 마지막 일주일을 담았다. 존엄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인생의 주도권을 찾아오겠노라고, 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에서 모든 것을 뒤로 하겠노라고 다짐한 'A17-13' 역시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인공 'A17-13' 은 불행했다, 그 누구의 불행과 견주어도 자신의 불행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을만큼. 그녀의 어머니가 중증 치매 진단을 받아 시설에 입소해 수입의 대부분을 요양원비로 지출하게 되었고 그녀가 사랑한 반려묘인 별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때 1형 당뇨로 투병해온 그녀는 당뇨망막병증이라는 새로운 병명을 얻게 된다. 꾸역꾸역, 절박하게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안락사 기관 홍보 영상을 보게 된다. "이곳은 당신의 존엄을 완성할 마침표입니다.(p.21)" 주인공은 돈이 되는 일을 찾아 닥치는 대로 한다. 자신의 존엄을 완성하기 위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자신에게 생애 최고의 마지막 일주일을 선물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곳에서 담당 안드로이드 '조이'를 만나게 된다.
이 모든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강인함은 어째서 인간의 것이 아닐까. 어쩌면, 혹시라도, 나는 이 따듯한 무심함에 기대어 엄마와 별이와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함께하지 못했던 그들의 마지막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도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단어가 내려온다> p.36
'A17-13' 은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지,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 "어쩌면, 혹시라도, 나는 이 따듯한 무심함에 기대어 엄마와 별이와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p.36)"라는 생각에 '조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녀의 안락사 직후 조이 역시 폐기될 예정에 있었다. 조이에게 "폐기되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
빛이 별을 떠나 우리의 눈에 도착하기까지 몇백, 몇천, 몇만 년이 걸리고, 어떤 별은 그 사이 소멸했을지도 모르기에 모든 빛이 떠나온 곳의 현재 존재를 증명하진 않는다는 걸 배웠다. 그 무렵 밤하늘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더 나이를 먹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밤하늘에 펼쳐진 것은 시간과 공간이었다. (중략)밤하늘에 가득한 건 슬픈 소멸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단어가 내려온다> p.44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주체적인 삶과 존엄한 죽음 중에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오롯이 나 자신인 채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까. 이 세상에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더 존엄한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들 말이다. 별의 슬픈 소멸로 가득했던 밤하늘이, 어느 순간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여질 때가 있듯, 우리의 삶도 그러할지 모른다, 아니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오롯이 당신인 채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