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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평점 :

초등학생 시절, 친구와 오른손을 맞잡아 연필을 쥐고서 하얀 백지 위를 사각거리며 신령한 존재에게 질문을 던지던 '분신사바'. 눅진하게 손바닥에 베어나던 땀의 질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척척한 불쾌함에도 연필은 물론 친구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더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까? 인간의 호기심을 비롯한 다양한 층위의 욕망은 많은 장르의 신령한 존재를 탄생시켰다. '하나를 득하면 다른 하나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자명한'기브앤테이크'적 진리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존재가 무엇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채 인간은 욕망하고 기원하며 저주한다. <쾌 : 젓가락 괴담 경연>은 저주는 사회의 무능함이며 결국 신령한 존재의 근저에는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시아 최초 장르문학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한 <쾌 : 젓가락 괴담 경연>은 '젓가락'이라는 주제로 다섯 명의 일본, 홍콩, 대만의 장르소설가들이 이야기로 이어달리기를 하며 완성한 소설이다. 미쓰다 신조의 단편 '젓가락님'이 문을 열고 찬호께이의 단편 '해시노어'가 맺는다.
다섯 이야기의 밑바탕이 되는 괴담은 야생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하루에 한 번 식사할 때 그릇에 담은 밥에 똑바로 꽂아 '젓가락님'에게 소원을 빌면 84일째 되는 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젓가락님이 그 소원을 인정하는 것은 매일 똑같은 꿈을 꾸는 것으로 기별이 온다. 젓가락 의식을 행하는 사람이 꾸는 꿈은 9명의 아이로 시작해 1명씩 죽어나간다는 내용인데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사람의 소원만 이루어지며 꿈 속에서 죽은 사람은 실제로 죽음을 맞는다. 그러니까 젓가락 의식의 밑천은 자신의 목숨인 셈이다.
우선 젓가락으로 두 눈을 찔러 자살한 중학생 유령이 나온다는 폐가 이야기는 제 고향 이야기예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해서, 제가 대학생 때는 도시전설처럼 퍼져 나갔던 게 기억나네요.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 젓가락님 / 미쓰다 신조 p.9
첫번째 이야기 '젓가락님'의 화자는 아메미야 사토미다. 누군가 젓가락으로 두눈을 찔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인 '네코'가 급식으로 나오는 밥에 대나무 젓가락을 똑바로 꽂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네코에게서 젓가락님에게 소원을 비는 방법을 알게된 사토미는 그날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친오빠를 '처리'해달라고 빌기 시작한다. 과연 오빠의 처리, 라는 소원은 이루어질 것인가?
"이 젓가락은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천 년 된 골동품이야. 이 안에 신선이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왕선군'이라고 불러."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 산호 뼈 / 쉐시쓰 p.107
"왕선군은 예전에 이 젓가락의 주인이었단다. 신령으로 변해 이 젓가락에 깃든 다음, 젓가락의 새 주인을 보우하게 됐지."
어머니는 왕선군과 젓가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어. 산호 젓가락은 보통 딸에게만 혼수로 물려주었대. 어머니는 젓가락은 쌍을 이루기 때문에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라는 뜻이 있어 이 젓가락을 떼어놓지만 않으면 왕선군이 부부의 인연을 지켜준다고 했어.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 산호 뼈 / 쉐시쓰 p.114
'위 선생'은 퇴마를 업으로 살아가는 도사다. 어느 날, 청 씨라는 성을 가진 손님이 찾아와 무언가 해결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야기는 청 씨의 중학교 3학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반 여학생들 사이에서 젓가락 교환 마법이 유행했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똑같은 젓가락을 사용하다가 상대의 젓가락 한짝을 몰래 바꿔치기해 삼 개월동안 들키지 않으면 두 사람이 연결돼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내기로 한 남자애의 젓가락을 몰래 바꿔치기하기로 마음먹은 청 씨, 알고보니 그 남자애의 젓가락을 신령이 깃든 산호 젓가락이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왕선군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하셨어.
"저를 꼭 데려가야겠대요? 다른 것으로 돌려주면 안 돼요?"
외 할머니가 두렵다는 듯이 말씀하셨어.
"왕선군께는 받은 그대로 돌려드려야 해. 재물을 받았으면 금패와 금신을 만들어드려야 하고, 명예를 받았으면 탑과 사찰을 만들어드려야 하며,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그를 더 공경하고 경애해야 해."
"왕선군이 엄마에게 뭘 주었길래 저로 보답하라는 거예요?"
외할머니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 산호 뼈 / 쉐시쓰 p.116~117
남자애의 어머니는 폐암에 걸렸고, 아버지는 떠났다. 아버지에게 집착하던 그 애의 어머니가 쉽게 이혼을 해준 이유는 왕선군의 산호 젓가락 한 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왕선군은 나머지 산호 젓가락 한 짝을 찾을 수 있는 곳을 목소리로 지시했다. 다시 온전한 두 짝이 된 산호 젓가락, 그러나 청 씨의 계략으로 산호 젓가락 한 짝은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린다.
"장 선생님, 혹시 B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아십니까? 1978년, B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집단 실종됐어요. 그때 선생님은 B마을에 계셨나요?"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 악어 꿈 / 샤오샹선 p.355
1980년대, 대만 정부는 타이베이 전 지역의 용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베이스시 상류에 댐을 건설했고 그곳에서 가까웠던 B초등학교는 댐이 완공되기도 전에 호수에 잠겨버렸다. 물에 잠겨 사라진 B초등학교, 그 학교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5학년 반 9명 중 8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때 유일한 생존자였던 가오수란, 그녀에게도 비밀이 하나 있다. 실종 사건 직전, 집안 가보로 내려오는 젓가락의 영험한 존재인 왕선군에게 누군가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쾌 : 젓가락 괴담 경연>에 실린 다섯 단편은 독립적인 이야기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쉐시쓰의 단편 '산호 뼈'에 나오는 하이린쯔와 친구의 어머니가 샤오샹선의 단편 '악어 꿈'에 등장해 비밀의 열쇠가 된다. 한 인물이 후속 단편에 재등장해, 이야기를 끌고 나가 결정적 반전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쾌 : 젓가락 괴담 경연>에 실린 단편들 모두 각기 다른 색채로 기괴하고 섬뜩했다. 젓가락이라는 일상적 사물에서 이렇게 웅장하고도 괴기스러운 이야기가 펼쳐지다니, 앞으로 나무 젓가락 특히 대나무 젓가락은 주의해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겨울철이라 입술이 건조해 가끔 피가 맺히는데 젓가락에 피가 묻으면 신선이 소환될지도 모른다고 하니(p.580) 주의해야겠다!(ㅎㅎ)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추리소설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집콕을 위한 책으로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