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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평점 :
'당신이 살았던 날들' 리뷰 대회

미증유의 팬데믹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그림자를 가깝게 느낀다. 오늘은 쌍둥이들을 코딩 수업에 데려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한 아저씨를 보았다. 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을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확진자면 어쩌지? 아니, 백신 3차까지 모두 맞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어쩌면, 나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그로부터 전염되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까지 이르렀다.
문득 살아가기 위해 하는 나의 모든 행동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이란 전능한 자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찍고야 마는 생의 마침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상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발생하는 천재지변과도 같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아직 죽음에게 내 삶을 강탈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말한다. 죽음이 그저 끝인 것만은 아니라고,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인 죽음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기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보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말하라고 말이다. 오랫동안 죽음 곁에서 애도자들과 함께 해온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죽음이 생의 끝이라고 여겼던 막다른 골목에 서서 그 벽을 헐어 길을 내고 끝내는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모습이 담겼다. 죽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두려운 마음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죽기 오 분 전에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렇게 하나 마나 한 뻔한 말을 하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심지어 죽음이 불가피할 때조차 생명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소멸되기 직전에도 여전히 버티면서 끝까지 공존할 방법이 남아 있다고 질병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동거는 죽음이 와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명과 죽음은 끊임없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철학책 추천 <당신이 살았던 날들> p.22
철학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의 저자 델핀 오르빌뢰르는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이다. 저자는 랍비로서 많은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포착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 책으로 펴냈다. 홀로코스트, 테러와 같은 국가적 슬픔에도 함께 했고, 어린 동생을 잃은 역시 어린 형제가 겪는 개인적인 슬픔에도 함께했다. 랍비의 소임 중 하나는 죽은 이의 장례식장에서 애도자들을 위한 기도인 '카디시'를 낭송하는 일이다. 그녀가 죽음 곁에서 읊은 수많은 카디시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살아남음이란 또 무슨 의미인지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일깨워준다. 카디시를 낭송하기 위해서 저자는 유족들을 만나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채집한다. 랍비로서 참석한 장례식에서 그녀는 유족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유족들이 아는 이야기 그대로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녀만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것이다. 죽은 이의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이다.
"난 동생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싶어요. 엄마 아빠는 어딘지 말할 줄 모르거든요. 결정을 못 하나 봐요. 내일 사람들이 동생을 땅에 묻어줄 거라고 해놓고, 또 동생이 하늘로 갔대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동생은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어디를 가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인문 에세이추천 p.139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저자가 랍비로서 만나온 죽음과 그곳에서 만난 이야기가 담겼다. 그중 동생(이사악)을 잃은 형을 만난 이야기는 퍽 가슴에 와닿았다. 죽은 이사악의 형은 저자에게 묻는다. 동생이 어디에 갔냐고, 어디를 가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느냐고. 아이에게 동생에 어디 갔는지 정확히 말해줄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셈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기에. 인간의 말을 벗어나는 죽음이라는 것은, 형언할 수 없다는 형식으로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p.139)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죽음의 비극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다"라고 했다. 마치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기초가 세워지는 기념물처럼, 죽음은 삶의 이야기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서 생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삶이 새로이 건설되는 순간에 굳이 비극을 소환할 필요는 없다.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인 죽음으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기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보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말하라고 델핀 빌뢰르는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p.55)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철학책으로 추천하며 서평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