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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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이해'는 닮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단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오해는 하기 쉽고 이해는 하기 어렵다. 어떤 관계에서 이미 부풀어 오른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넓히는 일은 더욱 어렵다. 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해가 어떻게 이해를 가차 없이 납작하게 만드는지, 오해의 전염력이 여름철 습한 곳의 곰팡이처럼 얼마나 강력한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단하게 보이던 오해라는 것이 또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내구성이 약한 존재인지, 반대로 이해라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벽돌 하나를 옮기는 것이 얼마나 생각보다 쉬운지 가르쳐 주기도 한다.


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는 모두 4편의 단편소설이 실렸다. 각기 따로인 단편소설로 보아도 무방하고 연작소설로 보아도 상관없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4편의 단편들은 아주 조금씩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핸드폰 액정 속의 환영이라는 단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흔하고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그때의 승아에게는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승인과 호의가 담긴 유의미한 단어로 여겨졌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고 어딘가에 환영이라고 적힌 다른 문이 있다. 그것이 마치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던 승아의 눈에는 그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p.17


 승아와 민영이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다. 민영은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까지 성공해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다. 승아가 팀원들의 커피를 사러 회사 앞 스타벅스에서 진동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민영이 새로 이사한 집에 페인트칠 하는 사진을 올린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았다. '환영!'이라는 민영의 댓글을 본 승아는 그 '환영'이라는 단어가 승인과 호의가 담긴 유의미한 단어처럼 느껴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몇 주만 있으면 계약 기간이 끝나 회사에서 쫓겨날 게 뻔했던 승아는 자신의 눈앞에서 또 다른 운명적인 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생각했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주어진 조건에 순응해왔던 승아는 이제야말로 언제까지나 그런 사람만은 아니란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p.18) 하여 뉴욕의 민영의 집에서 열흘 정도 머물 계획을 가지고 떠난다. 


거부당하기만 하던 자신의 세계에서 도망쳐온 승아를, 민영은 환영은 해도 환대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영의 썸남 마이크가 몇 가지 사건이 발생한 뒤에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 자기가 속한 세계로 퇴장해버렸고 그의 추천으로 무리하게 이사한 집은(심지어 마이크네 집 근처) 여자가 살기에 치안도 별로였고 너무 낡았다. 집의 단점을 민영 스스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런 숨은 이야기를 알 리 없는 승아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논평을 붙였다. 민영은 자신이 왜 무리를 해가며 마이크가 권하는 대로 이 집을 구했는지를 떠올리자 착잡하고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 불편한 마음은 승아와 계속 어긋나게 만들었다.



"여기서 오래 살다 보면 그냥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돼. 자기들끼리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 친절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디 살든 다 마찬가지 같아." 다음 순간 승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말이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 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장미의 이름은 장미>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p.75


마이크가 출장을 가게 되면 고양이 밥을 좀 챙겨달라고 부탁했었다. 마이크와 관계가 소원해지기 훨씬 전에 한 약속이라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민영은 결국 마이크의 집에 들른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민영이, 마이크의 고양이를 돌봐주려는 자신의 감정이 친절인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자 승아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생각해 보라고 한다. 둘은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아름다운 맨해튼의 야경을 감상한다.


사실 수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잘못된 장소로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해도 되돌아 나가서 다른 경로를 찾기에는 두려운 나이, 결코 나아질 리 없는데도 그럭저럭 머물게 되는 계약직 생활,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불현듯 깨닫게 만들었던 깨어지고 부서져서 결국 사라져버린 관계들. 수진은 이곳으로 떠나오며 그녀를 규정하는 나이와 삶의 이력에서 잠시나마 이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동명의 소설 p.90


수진은 이혼을 한 그 해 여름 어학연수를 떠났다. 수진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외국인 친구를 사귈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소심함과 방어적인 수동성에 신물이 난 나머지 저지른 일탈이랄까 어쨌든 그것은 최악의 결정이었다. 수진은 반에서 겉돌다 역시 겉도는 세네갈에서 온 마마두와 자연스럽게 짝이 된다. 영어에 서툰 수진은 자기소개를 할 때나 자신의 취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교재 어디에선가 예문을 참조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자신의 취미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당시의 수진을 이루고 있는 익명과 일회성의 태도, 깊이 없는 친절, 단답형 문장들, 그리고 관계와 언어에 지쳐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왜곡된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마마두는 수진의 모든 말들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어느새 수진은 자신의 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요리를 즐기고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왜곡된 히스토리는 장밋빛으로 시작한다.(p.135) 수진의 히스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네 편의 소설들을 하나로 모으면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다.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본 낯선 곳, 그리고 타인이 바라본 낯선 여행자의 모습, 여행자와 타인 간에 일어나는 오해와 이해가 생겨났다가 또 사라졌다 하는 과정들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나 스스로를 명징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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