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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0년대생 작가 최초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연간 천 권이라는 "괴물" 같은 독서량 , 대학 도서관에서 단 30일 만에 완성했다는 집필 비화까지, 작가 스즈키 유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화제의 중심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스물셋 청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토록 사랑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는가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문장에서 시작된 이 소설은 문장 그 자체가 되어 끝을 맺는다. 오래도록 다시 읽고 싶은 소설을 만났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문학적이다.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가 결혼 25주년 기념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문장을 발견한다. 그가 평생 연구해온 학문적 명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처럼 보였고, 그는 곧바로 출처를 좇기 시작한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Goethe"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p.38-39
사실 평생 괴테 연구에 천착해온 도이치조차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만만하게 생각한다. 진짜 괴테가 했던 말일지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이치는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이치가 어째서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믿는지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도이치의 20대 독일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젊은 도이치는 한때 이웃으로 만난 미술학도 요한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요한은 훗날 괴테 전문가로 대성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도이치에게 "독일 사람은 말이야, 명언을 인용할 때 그게 누구의 말인지 모르거나 실은 본인이 생각해 낸 말일 때도 일단 '괴테가 말하기를'이라고 덧붙여 둬. 왜냐하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거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어떤 명언이든 "괴테"라는 라벨만 붙이면 진실로 통용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장은 도이치에게 어느샌가 잊힌, 청춘 시절의 유희 같기도, 저주 같기도 한 주문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번에는 일본어로 옮겨봤다. 그러자 조금은 괴테스러워졌다. 그때 도이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물론 잼과 샐러드였다. 사랑은 모든 사물을 잼처럼 혼동시키지 않고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렇게 파우스트 박사처럼 자기식으로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mix'를 어떻게 해석할지 아직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confuse(혼동하다)', 말하자면 잼적 도이치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서 'mix(뒤섞다)'를 일단 샐러드적 도이치로 해석했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p.45
세계는 죽이나 잼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딱딱한 음식을 씹어야 한다.
<격언풍으로>에서
세계는 말하자면 안초비 샐러드다. 모든 것을 하나로 뒤섞어 먹어야 한다.
<비유적 및 경구풍으로>에서
도이치는 이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을 각각 '잼적 세계' '샐러드적 세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잼적 세계란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든 상태, 샐러드적 세계란 사물이 개별적 구체성을 유지한 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p.41
도이치는 자신의 저서 <괴테의 꿈ㅡ잼인가? 샐러드인가?>를 통해 세계를 '잼'과 '샐러드'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해 왔다. 모든 재료가 형체 없이 녹아들어 구분할 수 없는 혼돈의 상태가 '잼적 세계'라면, 각 재료가 고유한 맛과 형태를 유지한 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상태가 바로 '샐러드적 세계'다. 티백 속 문장의 'confuse(혼동하다)'는 잼에, 'mix(뒤섞다)'는 샐러드에 정확히 대응된다. 즉,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문장은 도이치의 학문적 세계관을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문장의 진위다. 도이치는 여러 판본의 괴테 전집을 뒤지고, 동료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출처 탐색에 몰두한다. 동료 교수인 시카리, 논문을 쓰는 딸 노리카, 아내 아키코, 그리고 아키코가 즐겨보는 유튜버 베버와 과거 유학 시절 친구 요한까지, 도이치의 주변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이야기는 점차 풍성해진다. 도이치가 말한 '샐러드적 세계'처럼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도이치의 탐색 과정에 섞여들며 예상치 못한 맛을 낸다.
"도이치, 괴테의 그 말 말이지, 자네는 그걸 찾을 수 있을 게야. 그 말이 진짜라면."
도이치는 마나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수록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라는 건 무슨 뜻일까? '진짜 괴테의 말'인가? 아니면...
p.157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말은 거짓인가, 아니면 새로운 진실인가. 괴테가 실제로 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그 문장이 담고 있는 통찰은 유효한 것인가. 검색창에 단어 몇 개만 입력하면 AI가 수만 가지 정보를 쏟아내는 시대에, 도이치의 방식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도이치는 문장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난번 꽃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소 특이한 모양이지만 향기는 분명 장미와 비슷하니 참 신기했습니다. 친구에게 보여주자 이런 것도 꽃이냐며 놀라더군요. 하지만 실로 조물주의 사랑은 하나의 꽃에서 모든 꽃을 싹트게 했습니다. 그걸 알면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혼란 없이 뒤섞이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 괴테
이 문장을 베버 씨가 "조물주의 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 없이 뒤섞는다”라고 요약했고, 그걸 본 중국인 명언 사이트 운영자가 조물주를 빼고 영어로 옮겼다. 그것을 발견한 미국 티백 회사가 자사의 꼬리표에 명언으로 실었다. p.216~217
결국 도이치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밝혀진 문장의 진실은 허탈하면서도 유쾌하다. 그 문장의 출처는 괴테가 남긴 것인지 확실치 않은 미공개 편지였는데, 여러 단계의 번역과 요약을 거치며 재탄생한, 일종의 ‘창조적 오역’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이 결말이 도이치의 여정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도이치는 가족, 제자, 동료와의 관계를 건강하게 재정립한다. 출처 불명의 명언일지라도, 그것이 도이치의 삶을 움직이고 변화시켰다면 그 문장은 그에게만큼은 진실이 된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농담은,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읽어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될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혼동(Confusion)을 넘어 진정한 혼연일체(Mix)로 나아가는 이 유쾌하고 지적인 소설,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