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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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의 중간, 미래와 역사의 사이에 있는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다. 켄 리우의 작품들이 늘 오묘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다보면 기원전 지구에서 수십만년 후 외계행성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맥스웰의 악마>라는 단편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194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일본인 여성이라는 점이 독특하게 느껴졌다.

양자역학이라는 매우 과학적인 소재와 혼령이라는 매우 비과학적인(?) 소재의 조합은 파스타와 같이 먹는 총각김치처럼 의외로 잘 어우러졌고, 이야기의 끝부분에는 공포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은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졌다.

바다 앞 캠핑 중 이 단편을 읽었는데, 책장을 덮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전쟁은 남자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문을 열었고, 그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제는 바깥으로 굴러나오고 말았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증가했다. 그 문 옆에 서 있어야 할 악마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식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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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이정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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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이 무엇일까, 이 작가는. 그게 내 첫 생각이었다.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저서가 꽤 여럿 나오는데, 어떤 책은 재즈에 대해, 어떤 책은 사진에 대해 쓴 책이며 심지어 직접 쓴 소설도 있다. ‘이 작가가 주로 쓰는 주제’를 파악해보려 했으나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제프 다이어라는 작가의 매력인 듯 하다. 살면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책도 쓸까 말까인데, 이 사람은 세상의 여러 분야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고 또 그 관심의 깊이와 수준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읽은 책은 그 중에서도 작가가 사진을 소위 ‘덕질’하는 책인데, 책의 첫 부분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특정한 사진가들 간의 차이점에 대해 배우고 싶고 적어도 그 차이에 민감해지고 싶으며, 사진가들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다. 스타일이 내용 안에서 드러나는지, 혹은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 내용에 의해 드러나는지도 알고 싶다. 이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얼마나 다르게 찍었는지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정작 본인은 카메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사진가들을 조금 더 이해해보기 위해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어쩌면 그 사진을 찍은 사진가보다 그 사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그런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낯선 이름들이 반복되어서 책의 초반부에는 사람마다 이름을 적어가면서 읽었다. 워커 에번스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고, 제임스 조이스는 시인이구나… 헨리 제임스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이고, 월트 휘트먼은 19세기 시인이구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프랑스의 사진 작가이구나…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꾸 시인들이 등장하는게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시를 쓴다는 것이 사진을 한장 찍는 것과 같다고, 어떤 한 장면을 콕 집어 사진을 찍듯 글로 표현한 것이 시라고, 그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와 사진, 시인과 사진가는 그런 점에서 닮아있겠구나-

작가는 그 함축된 이미지를 다시 언어로 서술한다. 그 이야기는 사진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해석일 수도 있겠다. 다른 비평가들과 제프 다이어가 차별화되는 지점도 사실 모른다. 사진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게 없는 나에게는 그저, 이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많은 것을 통찰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의 배경지식과 아이디어, 표현력이 놀라웠다.

이야기는 챕터 구분도 없이 주-욱 이어진다. 챕터 원, 시각장애인. 챕터 투, 울타리. 그런 식으로 사진의 주제가 챕터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읽기가 더 수월했을 수도 있겠다고 처음엔 생각했다. 하지만 마치 사진가가 카메라를 들고 이리 저리 앵글을 잡아보다가 어떤 장면을 찰칵-하고 찍어내듯, 작가의 시선과 의식이 닿는 곳에서 또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형태가 책의 주제와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독서경험이었다. 사진학교에서 교과서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엄중함을 갖춘 책이면서, 동시에 침대에 누워서 읽기도 괜찮은 책이었달까. 익숙한 주제도, 형태도 아니었지만 작가의 매력과 통찰이 돋보였던 신선한 이야기다.

📸 사진가의 관점에서 보면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는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세상에 속할 수 있는 방법이다.

📸 문맹에도 시가 있다면 저속함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 보이고 싶지 않은 갈망을 가진 사진가는 필연적으로 보지 못하는 피사체를 찍게된다. 따라서 수많은 사진가가 시각 장애인들의 사진을 찍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이 매체의 원리가 그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reading_d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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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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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이 김초엽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뭔지 모를 신비로움, 따뜻함. 그의 단편을 읽었을 때 마음에 피어올랐던 그 '김초엽스러운' 느낌이 마치 저장되어있던 것처럼 똑같이 느껴졌다.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을 때 그 작가의 느낌이 장편과 단편, 시와 산문의 범주를 넘어 느껴진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인 것 같다. 그 김초엽스러운 짜릿함을 장편을 통해 아주 길게, 오랜 시간 호흡하며 느낄 수 있어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단편 <스펙트럼>을 두고, 반려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의 입장을 상상하며 썼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이 작가의 상상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감탄했다. 어떻게 현실을 두고 그런 각도의 상상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상을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해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인터뷰를 찾아보니 작가는 세상에 대한 애정보다는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책을 쓴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렇기에, 지구의 초대손님에 불과한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연장하는데만 관심을 두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경고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미래를 찾아나가는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에게 애정을 보낸다.

21세기에 조명된 20세기의 <페스트>처럼, 어쩌면 이 책이 후세기에 미래를 예견한 책으로 주목받게 될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닥쳐올 '더스트폴'을 막기 위해서라도,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야하지 않을까..

(다 떠나서 그냥 좋아...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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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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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책을 고대 정치 사상 수업에서 전공 서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당연히 재미 없었다 :-) 그때 읽었던 다른 출판사의 버전의 책은 메모…(필기)가 가득하고, 밑줄은 시험에 나올만한 것들에 그어져 있다. 올해 3월쯤 갑자기 <군주론>이 다시 읽고 싶어져서 시도했으나 공부하는 기분만 들고 내용은 들어오지 않아 실패했었다! 그러다가 현대지성에서 출간된 새 버전 <군주론>을 읽게 될 기회가 생겼고, 이번엔 즐겁게 읽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지금 생각해보면 일개 정치인(?)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보스에게 쓴 글이 수백년을 전해 내려오고, 전공 서적으로 쓰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 번역본을 펴낸다는 사실 자체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진다.


공부하는 책이라는 편견을 떨치고 읽어보니 이 책은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인사이트를 담고 있었다. 수백년 전 어떤 외교관이 쓴 문장을 지금의 내가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람 사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다 똑같구나…


(책 제공해주셔서는 아니고 솔직하게 ^ㅁ^) 갑자기 칭찬을 좀 덧붙이자면, 저번에 읽었던 다른 출판사의 <군주론> 번역과 비교했을 때 조금 더 쉽게 읽혔고, 책의 여백이나 크기나 글씨가 시원시원하면서도 가벼워서 읽기에 편했다.


<군주론>에 대한 뭔지 모를 거부반응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역사적 사실은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삶에 관해 공감가는 문장을 찾아보는 방식으로 즐겨도 좋을 것 같다.


■ 저 또한 전하께 헌신한다는 증거를 보여드리면서 저 자신을 바치고 싶은데, 제가 가진 것 중에서 위대한 인물들의 해우이에 대한 지식만큼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풍경을 묘사하려는 사람이 산과 높은 곳의 본모습을 파악하고자 평지로 내려가고 낮은 곳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 높은 산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민중의 본 모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군주가 되어야 하며 군주의 본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되어야 하기 떄문입니다.


 변화는 언제나 다른 변화를 초래할 구실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다룰 때는 달래거나 억눌러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벼운 피해를 입으면 복수하지만 엄청난 피해 앞에서는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이 복수를 꾀하지 못할만큼 크게 주어야 합니다.


 먼 곳에서 미리 예견하면 문제를 쉽게 예방할 수 있지만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면 제때 약을 쓰지 못합니다. 치유할 수 없을만큼 병이 악화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주목할 점을 찾아낼 수 있는데, 군주는 부담이 되는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혜택을 주는 일들은 자기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출판사 ‘현대지성’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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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숙고하는 삶 - 절반쯤 왔어도 인생이 어려운 당신에게
제임스 홀리스 지음, 노상미 옮김 / 마인드빌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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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는데, 생각과 달리 매우 학구적인 책이었다. 일반적인 위로를 담은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칼 융의 사상을 삶에 적용하려 노력한 철학서 같다.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워서 유튜브 여기저기를 떠돌며 프로이트와 융에 대해 대충이나마 공부하고 난 후 읽으니 조금 더 잘 읽히는 기분이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위한 안경 컨셉 사진👓)

위로와 공감이 되는 글귀도 많았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원했든 그렇지 않든 프시케가 떠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 중 하나는 권태로 인해 에너지가 상실되는 것이다. 프시케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힘이 나고 신이 난다.

✏️우리가 성숙해지는 과정은 모호함을 점차 처리할 수 있는 능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사실 심리적,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성숙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는 아무리 당혹스러운 순간에도 모호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누구든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솔직하고 예리하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위안을 바라는 소심한 겁쟁이 파시스트가 있다.

⚠️출판사 마인드빌딩 으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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