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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우리에게 바톤을 넘겨 준다면
이벤트 당첨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한 후 계속 이 가제본이 배송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택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배달되었다. 화장실
창문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직사광선이 드는 곳인데, 택배는 어느 날 거짓말처럼 거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 화장실 창문 턱에서 홀리한 직사광선을 받으며. 기사님이 화장실 창문 안쪽으로 힘껏 던져 넣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창문
바로 아래에는 변기가 있다. 나는 정말 기사님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에 오는 내내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왔다. 김초엽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다른 분들과 비슷하게, <관내분실> 때였다. <관내분실>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작가님에게 빠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내가 만난 작품이 바로
이번 단편집에도 실려 있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였다.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을 때 난 좀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원래 책을
읽다가 자주 운다. 하지만 정말 좋을 때만 운다. 그 뒤로
김초엽 작가님의 단편집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이번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총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미 읽어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관내분실’은 물론이고 ‘스펙트럼’,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그리고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까지. 이 단편집은 기왕이면 집에서 읽기를
권한다. 나처럼 카페에서 읽다간 이상한 표정을 짓느라 집중하기 힘들 수도 있다. 나는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수십 번 글썽거렸다.
김초엽 작가님의 단편들을 읽다보면, ‘어, 이 이야기도……’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책을 읽다가 ‘또……’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면, 보통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다. 이
작가는 늘 똑 같은 패턴이네, 혹은 이거 전에 했던 이야기군, 하는
감상을 받을 때 우리는 인상을 쓰고 ‘또……’ 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려는 감상은 그런 의미의 ‘또……’는 아니다.
<스펙트럼>의
‘희진’은 오직 ‘나’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유일한 ‘희진’의 이해자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남자’는 ‘안나’를 막아야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라면 정말, 목적을 이룰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안나’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관내분실>의
‘지민’은 엄마의 데이터에게 이해를 말하고,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데이지’는 ‘올리브’가 남긴 기록을 보았고 ‘소피’에게
이해를 구하는 편지를 쓴다
.
김초엽의 세계에서, 모든 행위자들은 바톤을 넘길 누군가를 등진 채, 끝없이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나아간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가윤’은
‘재경’이 놓았던 욕망을 따라잡아 끝내 자신만의 풍경을 본다. 김초엽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이해자가 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화해를 향해 달리는 행위자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바톤을 넘겨받을 준비를 하는, 이해자가 있다.
그리고 이런 구조의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는 마치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다음 바톤을 이어받을 사람이 우리기를 바란다고. 나는
누군가를, 완전히 낯선 우주 또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달릴 테니, 언젠가 바톤을 받아주길 바란다고. 그러니 ‘올리브’의 기록을 보고 ‘데이지’의 편지를 읽은 우리는 곧 ‘소피’이자, 또 ‘데이지’다. 이 책은 우리에게 내미는 작가의 바톤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역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또,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다.
뻔한 가치를 향해 왜 사람들은 달리고, 넘어지고, 끝내 되돌아오는가. 기쁜 마음으로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