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클리벤의 금화 1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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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클리벤의 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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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1장을 읽다가 이영도를 떠올렸을 것 같다. 미리 말하건대 부적절한 의미로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치 2000년 전후를 연상케 하는 문체가 그러하며, 탄탄하게 짜인 배경과 캐릭터의 교차가 그렇고, 용도 나온다. 만일 이영도의 팬이었다면, <드래곤 라자>에 이어 <에소릴의 드래곤>도 떠오르지 않았을까. 용에게 잡혀온 공주가 식사의 저지를 위해 감히 용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상 불가항력적인 연상이다. 그러나 울리케는 공주가 아니고, 빌러디저드는 스스로를 두고 라고 지칭하지도 않으며, 둘은 교섭을 맺는다.


그렇다, 교섭. 이 책의 추천사에도 나와있듯이 울리케의 행보를 꿰뚫는 단어를 하나 꼽자면 교섭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울리케가 살고 있는 영지, 피어클리벤은 마땅한 특산물 하나 없는 작고 가난한 영지다. 이곳에서는 영주의 딸인 울리케마저도 놀고만 있을 수 없다. 울리케가 직접 요리하여 용을 대접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렇게 좁고 외부의 유입이 없는 배경에서는 쉽사리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와 그 주변의 산지를 배경으로 하는 초반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맥은 울리케와 그의 교섭을 통해 흘러간다.


교섭이란 외부의 세력과 나누는 이야기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명확하게 울리케의 성장담이다. 좁은 세계에서 늘 하고 싶은 말을 안으로 삼키기만 했던 울리케가 첫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계기로 외부로 의견을 발화하기 시작한다. 울리케의 변화는 분명 용에서 야기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본질은 원래부터 안에 있던 것이다. 다만 울리케는 이제 신념대로 밀고 나갈 힘을 얻게 된 것이다. 1권의 울리케는 대담하면서도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모습도 보이는데,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총 8권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앞으로 울리케가 어떻게 성장할지 그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마음이 된다. 서툴지만 확고하고, 가능성이 충분히 반짝이는 주인공은 언제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이벤트로 이 책을 받아 읽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이 얼마나 탁월한 마케팅인가 싶다. 1권을 읽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남은 7권을 구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2권까지 출간된 상태이며, 나는 2권을 이미 주문했다.) 성장담과 정통 판타지, 그리고 탄탄한 서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울리케가 여성, 소녀라는 점을 장점으로 언급을 할지 말지 한참 망설였다. 그의 성별이 이야기의 흐름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이 인간의 개성을 구별하는 중요한 척도라도 되는 양 굴었던 숱한 타 작품들을 떠올리며, <피어클리벤의 금화>의 울리케가 모험 판타지의 계보에서 얼마나 독보적인 캐릭터인지 꼭 언급해야겠다 싶었다. 앞서 이영도의 작품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나 이영도의 작품에서 그려지던 여성 캐릭터들의 말투를 돌이켜본다면, 씩씩하고 무모해도 미움받지 않았던 소년 주인공들을 기억해낸다면, 내가 얼마나 울리케의 이야기를 반기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 같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2019년답게 비로소, 마침내, 돌아온 정통 판타지다. (나는 여전히 이영도를 좋아한다. 하지만 2000년 쯤에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끝으로, 성별 구분 없이 모든 인칭대명사를 로 통일하자는 이야기는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이렇게 인쇄되어 활자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녀의 표기가 너무나 대중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무색하도록 아무 어색함이 없었다. ‘로 통일된 대명사가 주는 건조하고 공평한 담담함은 이 책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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