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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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부살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소설의 이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고 나니 루카치의 이 말이 비로소 절실하게 다가온다. 살아가는 방법을 잃고 표류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지표로 삼아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었다.

 친부살해는 더 이상 놀라운 사건이 아니다. 드미트리가 친부 살해 용의자가 되었을 때는 전 러시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을지 몰라도 보험금을 노리고 가족 전체를 살해하는 일도 심심찮은 요즘엔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저, “아! 또 개망나니 하나 나타나셨구나” 싶다. 한국 남자에게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친척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자살한 외국인 신부도 있기에 아버지와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한다는 스토리조차 요즘은 딱히 선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서를 뒤져봐도 그런 경우는 숱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친부 살해’ 사건에서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아버지란 존재는 더럽고 불쾌하더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한 물리적 존재다.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해지지 않는, 피를 다 뽑아내고 새 피로 채워 넣어도 새로워지지 않는 DNA를 물려준 자, 정말 문제적 존재다. 몹시 닮았으나 절대로 같지 않은 존재가 부자 관계이다. 게다가 이 아버지 표도르는 자식을 버렸다! 낳기만 하고 버렸다. 심지어 스메르쟈꼬프는 강간의 결과물이다. 자기 존재의 뿌리부터 깊은 혐오감을 갖게 한 아버지, 무슨 근거로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비의 자애와 자식의 효심이라는 끈이 ‘살해’라는 사건으로 끊어졌을 때 삶의 모순은 극대화 된다. 자기 존재의 근거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은 자기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자가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혐오와 살인사건이 비일비재하여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여기는 ‘지옥’이다.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옥은 결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568) 아니, 사랑이 뭐길래? 장로의 사랑은 전수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에게서 인간으로, 아비에게서 자식으로, 나에게서 타인으로. 타인에서 타인으로 연결되는 믿음이 사랑이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했듯이 아비는 숨만 겨우 쉬는 허약한 존재를 이 땅에 낳고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살피고 자식은 그렇게 보살펴 준 사람에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 사랑이고 그런 사랑을 바탕으로 타인에게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갖는 신뢰와 애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을 리가 있는가? 사랑을 먼저 시작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이다. 신은 대가 없이 인간을 사랑했으나 표도르는 약하고 어린 아들들을 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쨔의 법정을 통해 이미 아버지 표도르를 단죄했다. 이미 그 전에 동네에서 비난 받는 인물로서 그는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했다. 게다가 아들들은 모두 그가 죽기를 바랐다. 세상에서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지옥을 살다 갔다.


 친부 살해는 사랑의 기초가 사라진 것을 세상을 의미한다. 사랑을 남녀간의 낭만적 사랑으로 축소시키면  얼마나 사랑이라는게 얼마나 변덕스런 것인지 미쨔와 까쨔, 그루센까와 표도르의 수많은 여성편력이 보여주지 않던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통해 아무 대가 없이 베푸는 자비,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밝혔고, 이런 사랑의 윤리가 사라진 세상은 고통이고 비극임을 알린다. 루카치가 별을 보고 길을 갈 수 있어서 좋았겠다고 부러워했던 세상의 인간은 적어도 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을 했다. 무엇이 더 좋은 삶인지를 가리키는 별들을 향해 자신의 삶을 지향해 가는 삶이 사라진 때가 지금이다. ‘친부 살해’ 사건이 놀랍지 않은 세상이란 아무도 별이 가리키는 방향을 가야 할 길로 믿지 않고, 더 이상의 노력도 없는 그런 지옥 같은 삶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자기가 걸어야 할 길로 알고 살았던,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음흉한 아버지 표도르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삶은 좌표 없는 삶의 말로를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당시로서는 선정적인 소재였던 ‘친부살해’를 소설에 도입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고통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이 성문 밖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직시하고 돌아와 인간은 왜 저런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를 고민했던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친부살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이 만연한 비윤리적 문제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친부살해’는 소돔의 표징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경악할 사건의 주인공 오이디푸스 신화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인간의 한계와 운명 앞에 겸손함을 가르쳤다면 무신론의 시대에 벌어지는 “친부살해”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운명 지운 신도 없고,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미쨔의 법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를 보았다. 그 속에 진실은 없다. 각자의 스토리만 있을 뿐이다. 변호사가 미쨔를 변호한다는 게 고작 “살인을 했으나 살인은 아니다”였다. 하~! 이제 웃음도 안 나오게 익숙한 ‘법리’다. 살인 사건은 증발하고 검사와 변호사의 법리 다툼만이 남았고, 그런 핫한 사건에서 출세를 바라는 법복 귀족들과 호사가들의 수다만이 법정에 가득했다. 거기 무슨 죄의식과 참회와 회개와 책임이 있는가? 사람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진실한 사과를 바란다. 진심 어린 사과란 자기가 그 일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친 후에 나오는 고백을 말한다. 녹음기 틀어 놓듯,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해도 그게 거짓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법정에서의 선고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시베리아 유형을 가든 미국으로 도망치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면 어떤 형량을 내려도 그것은 죄에 대한 벌이 될 수 없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친부살해’를 통해 인간의 윤리를 다시 수립하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도 같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동물들도 하지 않는 잔혹한 짓을 해왔다. 이게 과연 인간의 본성인가? 이렇게 서로 죽이고 갉아먹으려고 태어났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걸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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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7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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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의 프랑스어 제목은 L’Assommoir이다. Assommoir은 ‘도살용 몽둥이’ 또는 ‘저질 증류주를 파는 술집’이라는 뜻이기에 원어에 가까운 의미는 ‘술로 사람 죽이는 술집’ 정도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목로주점』에서 우리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술에 절어 오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에밀 졸라는 술이 사람을 먹어가는 모습을 집요하고 비참하게 그린다.

주인공 제르베즈는 세탁부였다. 애인 랑티에와 함께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왔지만 랑티에는 수중의 돈을 유흥비로 모두 탕진하고 제르베즈의 낡은 옷가지마저 전당포에 맡긴 후 자기 짐만 챙겨 다른 여자와 달아나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는 ‘건강한 신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어 부지런히 일했다. 그녀의 근면함에 반한 함석장이 쿠포가 간절하게 청혼하는 바람에 다시는 결혼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뒤로하고 다시 결혼하게 된다. 한동안은 정말 행복했다. 쿠포는 때리지 않았고, 급료를 꼬박꼬박 가져와 저축도 했고, 가족을 위해 요리를 만들었고, 마음에 드는 집에서 살았다. 제르베즈가 처음으로 맛 본 봄날 같은 삶이었다. 이 행복한 찰나에 그만 쿠포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다. 이 사고를 변곡점으로 제르베즈의 일생도 하락하기 시작한다.

『목로주점』을 읽으면 규칙적으로 일하고, 먹고, 자고,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반복적인 일상에 작은 틈이라도 생겼을 때 다시 잘 메울 수 있는가? 이것이 삶을 결정한다. 부지런하고 사람 좋던 쿠포가 사고 이후에는 게으름뱅이가 되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제르베즈는 남편이 죽을까봐 집에서 간호하며 정성을 다해 살려놓았는데 되살아난 남편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몸이 회복되었음에도 일하기를 싫어했고 게을러졌다. 그의 일상에 생긴 틈으로 스며든 것은 술이었다. 예전의 쿠포는 술 마시면 사고 난다며 입에도 대지 않았었다. 그러나 술이 그를 물들이자 그들은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한다.

남편이 전과 다르고, 돈을 빌려 시작한 세탁소가 안정을 찾아가자 제르베즈는 식탐에 물들기 시작했다. “남편이 술로 돈을 다 탕진하기 전에 내가 맛있는 거라도 먹어두자!” 이것이 제르베즈가 자신의 식탐을 합리화한 이유였다. 식도락에 빠진 제르베즈는 신용을 잃었다. 돈은 먹어치우는 데 다 쓰고, 빌린 돈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외상값은 가게마다 늘어가고, 세탁소 일도 대충해서 단골들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깔끔한 일솜씨로 칭송 받았던 제르베즈는 사라지고 뚱뚱하고 게으른 여자가 남았다. 절제 없는 그들의 삶은 계속해서 파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고 자존심을 세워주던 세탁소를 말 그대로 “말아먹고” 만다. 쿠포는 정신병원에서, 제르베즈는 자기가 살던 아파트 지붕 아래 계단에서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된다. 자기 침대에서 죽고 싶다던 꿈은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에밀 졸라는 그 당시 민중의 삶을 “그 오물, 자포자기의 삶, 상스러운 언어 등과 함께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정말 너무나 정확하게 묘사된 『목로주점』은 계속 읽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고 비참한 장면들이 많다. 쿠포 부부가 서로를 향해 퍼붓는 사무치는 욕설과 비난, 남 잘되는 꼴을 못보는 이웃들, 제르베즈를 알거지로 만들고 떠났던 전 남편 랑티에가 다시 돌아와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제르베즈를 뽑아먹는 걸 보면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싶다. 세상 모든 악질과 천박함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엉망진창이 된 지옥. 도대체 이 오물 덩어리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제르베즈가 더러운 빨래를 깨끗하게 빨고, 반듯하게 다리는 일을 성실하게 해낼 때는 그녀도 정직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기 일을 팽개치자 자기 집에 몰려드는 더러운 빨래처럼 오물이 되어갔다. 노동은 몸을 자기 자산으로 삼는 가난한 민중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 삶을 가꾸는 유일한 수단이다. 산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체면도 없고, 약속도 없고, 되는대로 먹어 치우는 삶이 되고 만다. 자포자기의 삶은 옛날의 그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제르베즈를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어느 날 제르베즈는 가로등 아래에서 뚱뚱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란다. 도저히 자기라고 믿을 수 없는 기괴한 그림자. 너무나 끔찍하고 안타까워 책으로 손을 넣어 그 삶을 구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에밀 졸라는 그런 타락을 잔인하고 오랫동안 그린다. 마치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자, 이렇게 되리라!” 라고 말하는 듯이.

에밀 졸라는 자포자기하고 타락한 민중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지만 오직 노동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태롭게 만드는 당시 사회 구조도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일해도 낡아빠진 아파트의 집세 내기도 버겁고, 공장은 자꾸 기계화 되어 할 일은 줄어든다.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해도 여력도 없고 돈도 없어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꾸 술을 마시고 폭력적이 되어 아내와 아이들을 패기 시작한다. 서로 드잡이를 하고 욕하는 가운데 무슨 자긍심이 생기겠는가? 자기 존중감이 있어야 타인에게 친절한 법이다.

에밀 졸라는 끔찍한 인간 타락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최소한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의지와 그럴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은 작은 충격에도 금새 깨질 것이다. 제르베즈의 시대가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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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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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 아래 유리조각부터 먼저 주워라


어떤 새로운 섬모충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사람들의 몸속에 기생했다. 그러나 이 생물은 지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영(靈)적 존재였다. 이 생물에 감염된 사람들은 즉시 발광해서 미쳐 버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감염된 사람들만큼 자기가 진리에 확고히 뿌리를 박은 현명한 사람이란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 자신의 과학적인 결론, 도덕적인 확신과 신앙을 이떄보다 더 확고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온 마을이 온 도시가 모든 사람들이 감염되어서 미쳐 갔다. 모두들 불안에 빠졌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로지 각자 자기 속에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으며 손을 쥐어 틀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랐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누구를 고소하고 누구를 변호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은 어떤 무의미한 증오심 속에서 서로를 죽여갔다. 모두들 불안해 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범한 사람들이 갖는 양심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세상은 비범한 사람들이 끌고 가는 게 아니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는 소냐의 권유로 경찰서에 자수하지만 유형지에 가서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수한 게 아니라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실수 때문에, 마음의 평화 때문에 그냥 자수해서 굴복했다는 점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병까지 났다. 그는 여전히 “내 사상이 어디가 잘못 된 것인가?” 라고 한다. 이쯤되면 정말 고집불통, 구제불능의 망나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쫓아온 소냐를 보면 화가 날 지경이다. 그는 유형지에서도 다른 죄수들과 말도 섞지 않고 오만한 눈빛으로 깔보며 지낸다. 당연히 그들도 라스꼴리니꼬프를 싫어했다. 이렇게 도도한 생활을 하는 그와 달리 소냐는 유형지의 죄수들과도 잘 지내며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보려는 죄수들. 존재 자체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소냐. 라스꼴리니꼬프는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도대체 저 여자가 뭐길래?  


의문은 자기의 꿈에서 풀린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현명하다며 서로 싸우는 꿈이었다. 저마다의 진리를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도 판단하지 못한 채 서로를 증오하며 죽이는 꿈. 의견 일치를 볼 수 없어 가장 일상적인 농사마저 짓지 못하고 결국엔 온 인류가 파멸하는 꿈. 꿈이 깬 라스꼴리니꼬프는 그제서야 자기를 따라온 소냐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냐에게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자기와 함께 가자고 얘기해 놓고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이 옳다는 생각에만 빠져있던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런 삶이 절멸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한 이후에야 소냐를 찾는다. 드디어 그의 '심장'이 아프기 시작했다. 소냐를 만나 울며 진심으로 뉘우친다. 그를 뉘우치게 한 소냐의 사랑에도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사랑으로 보답해야 함을 알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살인을 하고 궤변을 늘어 놓으며 불안에 떨던 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여겨준 소냐의 위대한 사랑이 사람들의 고통을 구원하는 사상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그녀를 한참 괴롭히고 유형지까지 끌고 와서야 깨달았다. 그날부터 그 오만한 그가 달라졌다. 죄수들과 인사하고 상냥하게 대했다. 뽀르삐리는 그에게 삶으로 뛰어들라고, 고난을 받아들이고 태양이 되라고 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게 될 것이라 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생사를 결판하는 영웅적 삶이 아니라 미천하고 혐오스런 것에까지 햇빛을 나눠주는 태양이 되는 삶. 고난 속에 사상이 있다는 말은 함께 이 고통의 바다 속에 사는 사람들과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저절로 얻어지거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걸 바라는 인간이 속물 루쥔이었다. 가난한 두냐와 결혼해서 경제력을 무기로 아내의 존경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는 루쥔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극적으로 망신을 준다. 사랑과 존경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경고. 이 세상에서는 모든 존재가 고통을 받는다. 신념에 가득 찬 올바른 사람들은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하는 제도에 분노하지만 세상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손을 놔버릴까? 행복과 기쁨, 존경과 사랑이라는 것들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라 힘든 삶 속에서, 힘든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때 느끼는 감정들이다. 그러니 이 고해의 바다를 인정하고 스스로 태양이 되는 삶, 타인에게 기쁨이 되는 삶이 되어라. 저 형편없는 말종들을 욕할 시간에 내 옆의 사람들의 슬픔을 덜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을 저지르고 유형지까지 가서야 이것을 알게 되었다. 『죄와 벌』은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데서 끝이 났지만 앞으로의 삶은 지금보다 더 힘들 것임이 예상된다. 왜냐면 생각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 그가 결심한 대로 남의 슬픔도 자기 슬픔처럼 여기는 실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타인의 행복을 비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세계의 불행 속에 던져진 인간은 위대한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 기회를 놓치고 타락한 세상과 함께 타락해버린다. 인간은 타락하기 위해 생겨난걸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여기에 종교와 기도의 장치를 놓은 것 같다. 자신의 행복만 기원하는 종교가 아닌 고통의 바다에 던져진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종교.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눌 종교, 그런 삶을 실천하도록 늘 스스로를 점검하는 기도가 있는 삶. 죄와 벌을 읽고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하느님은 없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실천하지 못해서 안 계시는구나! 그래서 늘 죄를 짓고, 그러고도 모르는구나. 그래서 영원히 벌을 받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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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은 정말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로쟈와 소냐의 대화, 로쟈의 논문, 뽀르삐리와의 대화를 천천히 읽고 다시 읽고 해석을 하면서 왜 이런 문제제기를 했을지를 생각하며 읽어야 했다. 게다가 혼미한 정신상태의 로쟈를 보고 있으면 정말 -_-;;

씹기 어려운 음식을 꾸역꾸역 씹으며 소화시킨 느낌이다. 혼자 읽는다면 안 읽었을 책. 도스토예프스키가 제기한 윤리적인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고 그 "윤리"의 바탕이 되는 것이 부재한 지금에 매우 묵직한 이야기였음을 알게 된다. 

종교는 도대체 인간에게 무엇이어야 할까? 종교의 중간관리자들이 온통 성추문에 얼룩져 있는 요즘, 무신론이 판치는 세상에서의 인간성 상실을 로쟈로 보여준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세상이 될 줄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상했던걸까? 하느님, 부처님 말씀이 행해지지 않는 이곳에서 하느님이 다 해결해주실거라는 소냐의 말은 너무 공허하게 들리지만 그건 우리 삶 속에 하느님 부처님의 일을 전혀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제발 믿고 행해봐. 삶으로 뛰어들어봐..라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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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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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삶으로 뛰어 드세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당신이 신앙이나 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당신은 창자를 찢긴다 해도 꿋꿋이 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의 얼굴을 미소를 띠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자, 이제 발견도 하고, 찾기도 하십시오. 우선 당신은 진작 공기를 바꿔야 했어요. 어떨까요? 고난도 역시 좋은 일이겠지요. 고난을 받으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교활하게 머리를 짜내지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삶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곧장 당신은 어떤 해안에 도달해서 두 다리로 서게 될 겁니다. 어떤 해안이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난 단지 당신은 아직 더 살아야 한다고 믿을 뿐입니다.... 당신이 노파만을 죽였으니 다행이에요. 다른 이론을 생각해 냈더라면, 백배나 더 추악한 일을 행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하느님이 뭔가를 위해서 당신을 보호하고 계신 것일 겁니다. 당신은 마음을 크게 먹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곧 있을 위대한 실천 때문에 겁을 먹었나요? 겁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만일 그런 첫걸음을 내니뎠다면, 강해지셔야죠. 이건 정의의 문제 입니다. 그러니 정의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맹세코 삶이 당신을 이끌어 줄 겁니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마음에 들게 될거예요. 지금 당신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공기입니다. 공기!

예심판사 뽀르삐리 빼뜨로비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와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로지온 로마노비치(라스꼴리니꼬프)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뽀르삐리가 말한대로 신념이 있다면 순교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그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쓴 범상치 않은 논문 <범죄에 관하여>를 흥미롭게 읽고 그를 만날 때마다 관찰하고 대화하면서 그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아내지만 자백하고 자수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라스꼴리니꼬프와 뽀르삐리와의 대화를 통해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디서 궤변으로 흘러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처없는 의식의 흐름을 어디에다 고정시켜야 할지도 알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허약한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뽀르삐리의 입을 빌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삶으로 뛰어드세요. 

이게 무슨 말일까? 누군들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냥 살아지는 삶은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한 것 같다. 『죄와 벌』의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선을 넘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의 선을 넘었고 소냐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팔았고, 물질적 욕구만 충족하는 삶을 살았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돈 많은 여자에게 자신을 팔았다가 자살로 끝을 맺었고, 경제적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라 생각하는 루쥔은 돈 몇 푼에 두냐를 사서 존경까지 얻으려했고, 두냐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려고 했다. 마르멜라도프는 생활비로 술 마시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술을 마셔댔고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죄를 받았는데도 이상하게 아들 자랑을 하며 허세를 떨었다. 이들은 살려고 애쓰지만 궁극적인 질문, “도대체 어떻게 사는 삶이 윤리적인 삶인가?”에 대한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안락이 우선이거나 체념 속에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산다. 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뽀르삐리의 입을 빌어 “고난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안락을 추구하지 말고 고난을 자청하라. 뽀르삐리의 입을 빌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사람은 어떻게 삶에서 지혜로워지는가?  고통 속에 단련되면서다." 라스꼴리니꼬프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없애줄 생각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함께할 ‘생활’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 챈 사림이 뽀르삐리다. 


고난을 겪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며 “네가 하느님을 믿지 않을까봐 걱정된다”고 말한다. 누구나 살아가며 죄를 짓는다. 그걸 몰라서 더 죄를 짓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소냐를 통해서 보여준다. 


우선, 내가 아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 때문에 타락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하느님은 불행한 사람들을 들어올려 천국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런 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세상은 언제나 고통의 바다였다. 소냐도 사는 게 힘들지만, 두냐도, 로쟈도, 하다못해 로쟈에게 살해당한 노파도 끊임없이 남을 의심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이런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전능한 하느님은 구해주지 못한다. 대신,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를 예수를 통해, 소냐를 통해 보여주었다. 인간들이 모두 타인에게 예수가 되어 주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불행해졌을까? 아무도 예수는 되려고 하지 않고 저마다 옳다며 헛된 공상이나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냐가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고 한 말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비를 맞을 때 우산을 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밖에 없다. “네가 하느님을 믿지 않을까봐 걱정”이라는 말에서 믿는다는 것은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믿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안 믿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 삶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자다. 소냐처럼.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는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해서 했던 일이 남에게 고통을 준 꼴이었다. 방법이 틀렸다.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선인과 악인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를 괴롭혔는데도 소냐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의 눈길을 주자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껴지고 이상하고 무서운 감정마저 들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전해지자 자신이 더욱 불행하다고 느껴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이성적으로 죄를 저질렀을 때는 죄책감도 남지 않고 증거도 남지 않으므로 남에게 발각 될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소냐의 그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살생부를 든 악마와 그런 악마마저도 불쌍하지 않냐며 악마와 함께 서려는 바보 같은 여자. 자애로운 하느님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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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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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도된 거울상


당신역시 똑같은 일을 했잖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거야.... 넘어 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자기 생명>을 말이야. (어차피 마찬가지야!) 당신이 정신과 이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해도, 결국에 가서는 센나야 광장에서 죽게 될 거야.... 그렇지만 당신은 참을 수 없게 될 테고, 만약 <혼자> 남게 된다면 당신도 나처럼 미쳐 버리게 될거야. 당신은 지금도 벌써 미친 사람 같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같은 길을 가야해! 그러니 함께 갑시다!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는 기이하게 전도된 거울상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세상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벌을 주려고 한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있고, 세상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사람이 라스꼴리니꼬프였다. 자신의 빈곤, 소냐의 비극, 두냐의 희생 이런 것들이 모두 정의롭지 못한 세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세상의 악을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회 악은 제거해야 한다면서 정작 자신은 공부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하다못해 과외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생각’의 늪에 빠져 망상에 시달리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론에 심취되어 노파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는 소냐에게 네가 몸 팔아 네 집을 구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은 전당포 노파 하나 죽인다고 해서 전당 제도가 사라지는 것도, 사람들이 전당포에 가지 않게 된 것도 아니었다. 이러나 저러나 혼탁한 세상에서 혼탁하게 물들어가는 것은 소냐가 아니라 라스꼴리니코프였다. 소냐의 희생은 뽈랴까지 창녀가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인한 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빚이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소냐는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 이익도 챙기지 못하고, 짐을 가득 실은 낙타의 운명처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고, 레베쟈뜨니꼬프가 아니었다면 루쥔이 쳐 놓은 덫에 걸려 도둑 누명까지 쓸 뻔 했는데도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도망간다. 쫓아온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런 놈을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유도 질문에도 넘어가지 않고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착해빠진! 참을 인忍자 세 번이면 사람들이 호구인줄 안다구! 너를 생각하라고! 생각 좀 해!' 그러나 그 생각 많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악을 제거하려고 할 때 이 바보 같은 소냐는 고통 받는 사람의 옆에 있으려고 한다. 살인을 고백한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는게 아니라 “당신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자. 인류가 세상의 더럽고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제거할 수 있었나? 제거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나찌였다. 홀로코스트처럼 기억되지도 못하는 끔찍한 학살은 알려지지도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는 인종청소라는 이름의 악마 같은 짓들은 눈 앞의 혐오를 '제거'하겠다는 생각으로 결행한 일들이 아니었나? '이'같은 존재라는 규정도 매우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지 않은가? 소냐의 말대로 사람은 '이'가 아니지 않은가? 감히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너를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 중에 인간이 결정해서 제거할 수 있는 건 없다. 인간이 결정해서 세상에 존재하라고 한 게 없지 않은가? 제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데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제거된 것들은 인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멸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소냐의 말은 무능하게 들리지만 인간이 인간을 판단했을 때의 결과는 처참한 비극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 처참한 비극을 진보라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혼탁한 이유는 제거되어야 할 '이'들이 창궐해서가 아니라 서로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며 싸운 결과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빼쩨르부르그의 더위와 악취와 곤궁함 속에서 자신의 이성을 잃어갔지만 그 도시의 시궁창 속에 살던 소냐의 정신은 천박해지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족을 보살피고 자신을 괴롭히며 살인을 고백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세상 불쌍한 사람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개는 원망하고, 좌절하다가 서서히 더러움에 물들어 간다.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와 계모 까쩨리나가 보여주는 삶이 그러하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극빈은 먼저 자신을 모욕한다고 하지 않는가? 합리적 이성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 놀라운 문명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믿던 시대에, 사실 그 이성이란 무너지기 쉬운 것이고, 인간의 정신도 계속해서 단련시키지 않으면 궤변만 만들어 내다가 엉뚱한 죄만 짓게 됨을 라스꼴리니꼬프를 통해 보여준다. 무신론이 득세하던 시대, 도스토예프스키는 물질적 조건과 시스템을 바꾸면 세상이 행복해 질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변혁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며 죄를 지어왔는가? 누군가 부유하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때 누군가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굶주리며 살아가며 적개심만 키워 가는 걸 아는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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