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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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도된 거울상


당신역시 똑같은 일을 했잖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거야.... 넘어 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자기 생명>을 말이야. (어차피 마찬가지야!) 당신이 정신과 이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해도, 결국에 가서는 센나야 광장에서 죽게 될 거야.... 그렇지만 당신은 참을 수 없게 될 테고, 만약 <혼자> 남게 된다면 당신도 나처럼 미쳐 버리게 될거야. 당신은 지금도 벌써 미친 사람 같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같은 길을 가야해! 그러니 함께 갑시다!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는 기이하게 전도된 거울상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세상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벌을 주려고 한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있고, 세상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사람이 라스꼴리니꼬프였다. 자신의 빈곤, 소냐의 비극, 두냐의 희생 이런 것들이 모두 정의롭지 못한 세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세상의 악을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회 악은 제거해야 한다면서 정작 자신은 공부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하다못해 과외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생각’의 늪에 빠져 망상에 시달리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론에 심취되어 노파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는 소냐에게 네가 몸 팔아 네 집을 구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은 전당포 노파 하나 죽인다고 해서 전당 제도가 사라지는 것도, 사람들이 전당포에 가지 않게 된 것도 아니었다. 이러나 저러나 혼탁한 세상에서 혼탁하게 물들어가는 것은 소냐가 아니라 라스꼴리니코프였다. 소냐의 희생은 뽈랴까지 창녀가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인한 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빚이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소냐는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 이익도 챙기지 못하고, 짐을 가득 실은 낙타의 운명처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고, 레베쟈뜨니꼬프가 아니었다면 루쥔이 쳐 놓은 덫에 걸려 도둑 누명까지 쓸 뻔 했는데도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도망간다. 쫓아온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런 놈을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유도 질문에도 넘어가지 않고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착해빠진! 참을 인忍자 세 번이면 사람들이 호구인줄 안다구! 너를 생각하라고! 생각 좀 해!' 그러나 그 생각 많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악을 제거하려고 할 때 이 바보 같은 소냐는 고통 받는 사람의 옆에 있으려고 한다. 살인을 고백한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는게 아니라 “당신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자. 인류가 세상의 더럽고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제거할 수 있었나? 제거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나찌였다. 홀로코스트처럼 기억되지도 못하는 끔찍한 학살은 알려지지도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는 인종청소라는 이름의 악마 같은 짓들은 눈 앞의 혐오를 '제거'하겠다는 생각으로 결행한 일들이 아니었나? '이'같은 존재라는 규정도 매우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지 않은가? 소냐의 말대로 사람은 '이'가 아니지 않은가? 감히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너를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 중에 인간이 결정해서 제거할 수 있는 건 없다. 인간이 결정해서 세상에 존재하라고 한 게 없지 않은가? 제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데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제거된 것들은 인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멸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소냐의 말은 무능하게 들리지만 인간이 인간을 판단했을 때의 결과는 처참한 비극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 처참한 비극을 진보라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혼탁한 이유는 제거되어야 할 '이'들이 창궐해서가 아니라 서로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며 싸운 결과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빼쩨르부르그의 더위와 악취와 곤궁함 속에서 자신의 이성을 잃어갔지만 그 도시의 시궁창 속에 살던 소냐의 정신은 천박해지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족을 보살피고 자신을 괴롭히며 살인을 고백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세상 불쌍한 사람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개는 원망하고, 좌절하다가 서서히 더러움에 물들어 간다.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와 계모 까쩨리나가 보여주는 삶이 그러하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극빈은 먼저 자신을 모욕한다고 하지 않는가? 합리적 이성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 놀라운 문명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믿던 시대에, 사실 그 이성이란 무너지기 쉬운 것이고, 인간의 정신도 계속해서 단련시키지 않으면 궤변만 만들어 내다가 엉뚱한 죄만 짓게 됨을 라스꼴리니꼬프를 통해 보여준다. 무신론이 득세하던 시대, 도스토예프스키는 물질적 조건과 시스템을 바꾸면 세상이 행복해 질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변혁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며 죄를 지어왔는가? 누군가 부유하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때 누군가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굶주리며 살아가며 적개심만 키워 가는 걸 아는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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