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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4. 삶으로 뛰어 드세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당신이 신앙이나 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당신은 창자를 찢긴다 해도 꿋꿋이 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의 얼굴을 미소를 띠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자, 이제 발견도 하고, 찾기도 하십시오. 우선 당신은 진작 공기를 바꿔야 했어요. 어떨까요? 고난도 역시 좋은 일이겠지요. 고난을 받으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교활하게 머리를 짜내지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삶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곧장 당신은 어떤 해안에 도달해서 두 다리로 서게 될 겁니다. 어떤 해안이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난 단지 당신은 아직 더 살아야 한다고 믿을 뿐입니다.... 당신이 노파만을 죽였으니 다행이에요. 다른 이론을 생각해 냈더라면, 백배나 더 추악한 일을 행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하느님이 뭔가를 위해서 당신을 보호하고 계신 것일 겁니다. 당신은 마음을 크게 먹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곧 있을 위대한 실천 때문에 겁을 먹었나요? 겁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만일 그런 첫걸음을 내니뎠다면, 강해지셔야죠. 이건 정의의 문제 입니다. 그러니 정의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맹세코 삶이 당신을 이끌어 줄 겁니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마음에 들게 될거예요. 지금 당신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공기입니다. 공기!
예심판사 뽀르삐리 빼뜨로비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와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로지온 로마노비치(라스꼴리니꼬프)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뽀르삐리가 말한대로 신념이 있다면 순교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그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쓴 범상치 않은 논문 <범죄에 관하여>를 흥미롭게 읽고 그를 만날 때마다 관찰하고 대화하면서 그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아내지만 자백하고 자수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라스꼴리니꼬프와 뽀르삐리와의 대화를 통해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디서 궤변으로 흘러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처없는 의식의 흐름을 어디에다 고정시켜야 할지도 알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허약한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뽀르삐리의 입을 빌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삶으로 뛰어드세요.
이게 무슨 말일까? 누군들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냥 살아지는 삶은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한 것 같다. 『죄와 벌』의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선을 넘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의 선을 넘었고 소냐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팔았고, 물질적 욕구만 충족하는 삶을 살았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돈 많은 여자에게 자신을 팔았다가 자살로 끝을 맺었고, 경제적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라 생각하는 루쥔은 돈 몇 푼에 두냐를 사서 존경까지 얻으려했고, 두냐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려고 했다. 마르멜라도프는 생활비로 술 마시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술을 마셔댔고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죄를 받았는데도 이상하게 아들 자랑을 하며 허세를 떨었다. 이들은 살려고 애쓰지만 궁극적인 질문, “도대체 어떻게 사는 삶이 윤리적인 삶인가?”에 대한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안락이 우선이거나 체념 속에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산다. 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뽀르삐리의 입을 빌어 “고난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안락을 추구하지 말고 고난을 자청하라. 뽀르삐리의 입을 빌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사람은 어떻게 삶에서 지혜로워지는가? 고통 속에 단련되면서다." 라스꼴리니꼬프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없애줄 생각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함께할 ‘생활’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 챈 사림이 뽀르삐리다.
고난을 겪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며 “네가 하느님을 믿지 않을까봐 걱정된다”고 말한다. 누구나 살아가며 죄를 짓는다. 그걸 몰라서 더 죄를 짓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소냐를 통해서 보여준다.
우선, 내가 아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 때문에 타락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하느님은 불행한 사람들을 들어올려 천국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런 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세상은 언제나 고통의 바다였다. 소냐도 사는 게 힘들지만, 두냐도, 로쟈도, 하다못해 로쟈에게 살해당한 노파도 끊임없이 남을 의심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이런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전능한 하느님은 구해주지 못한다. 대신,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를 예수를 통해, 소냐를 통해 보여주었다. 인간들이 모두 타인에게 예수가 되어 주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불행해졌을까? 아무도 예수는 되려고 하지 않고 저마다 옳다며 헛된 공상이나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냐가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고 한 말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비를 맞을 때 우산을 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밖에 없다. “네가 하느님을 믿지 않을까봐 걱정”이라는 말에서 믿는다는 것은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믿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안 믿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 삶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자다. 소냐처럼.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는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해서 했던 일이 남에게 고통을 준 꼴이었다. 방법이 틀렸다.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선인과 악인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를 괴롭혔는데도 소냐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의 눈길을 주자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껴지고 이상하고 무서운 감정마저 들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전해지자 자신이 더욱 불행하다고 느껴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이성적으로 죄를 저질렀을 때는 죄책감도 남지 않고 증거도 남지 않으므로 남에게 발각 될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소냐의 그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살생부를 든 악마와 그런 악마마저도 불쌍하지 않냐며 악마와 함께 서려는 바보 같은 여자. 자애로운 하느님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