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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김혜순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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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인이 쓴 시를 이해불능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여성인 나는 그런 시를 읽을 때면 그 시의 화자가 내가 된 기분이 들었고, 이해 불능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생소할 수도 있는 여성의 글쓰기라는 말은 이제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시원하게, 또는 속이 확 풀릴 정도로 명쾌하게 다가온다. 환상의 세계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서 있는 타자와 대화하고 있는 시를 이해하기에는 우리들이 길들여진 사회가 너무 정형화되어 있고, 이성적인 것만을 중요시 여겼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또다른 여성인, 어머니, 할머니 등 많은 타자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딸이 되어 어머니를 바라보기도 한다. 성으로 문학적인 세계를 금을 긋는 것은 위험하고 편파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여성들만의 언어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여성의 언술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또한 체계적이지 못하다. 여성시인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여성의 화자(또는,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타자)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글에는 바리데기의 수많은 텍스트를 꼼꼼히 되분석하면서 여성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바리공주는 병에 걸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은 죽음의 세상, 즉 신의 세계이다. 죽음을 경험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바리데기는 어머니되기를 실현한다. 바리데기를 구송하는 자, 무가의 연희자들이 버려져 죽은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망자 혹은 자신의 통과제의를 치를 때마다 한 번씩의 나서을 굽이돈다.

그러면서 그녀들의 일생이 코스모스의 시간의식을 벗어나 시적 이미지의 시간 속으로 진입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바리데기 구송자들은 바리데기를 서천서역국이라는 공간 안에서 살려낼 수 있게 된다. 여성은 물의 이미지이다. 그릇에 담으면 그릇 형태의 물을 담아내고, 흘러 강물에 닿으면 강물의 일부가 되어 바다로 향한다. 물은 지나가면서 수많은 물의 길들을 새끼친다. 물의 길은 깊고 멀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어머니의 몸처럼, 노자가 여성을 상징, 지칭하는 명사 앞에 붙였던 감을 현은 적막하고 깊은 물을 가리키는 형용사이기도 하다.

그런 여성의 몸에는 병이 살아 들끓는다. 병은 몸이 쓰는 답장이다. 여성의 병든 목소리는 이 세상의 중심 질서에 대한, 그 질서가 묘사해온 여성에 대한 거대한 이분법에 대한 답변이다. 이 거대한 이분법은 여성 스스로를 자신들의 무의식으로부터, 자신들의 성 자체로부터 소외시켰다. 여성시의 해체는 여성들이 시'함'으로써 구축한 것이다. 그것은 기본의 시에 대한 열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성을 상실하기 위한 열림이다.

너의 거울에 나를 비추고, 나의 거울에 너를 비추기 위한 열림이 아니라, 너의 거울에서 나를 상실시키기 위한 열림이다. '나의 아이는 나의 어머니들의 아이면서, 동시에 나이면서, 나의 어머니들이다. 아이는 나의 타자이면서 동시에 내가 낳은 나이다. 아이는 태어남으로써 나를 타자의 자리에 갖다놓는다. 나는 출산을 통하여 어머니 되기와 아이 되기를 동시에 달성한다. 나는 출산을 통해 '몸'이 된다. 몸 됨으로 나는 나를 벗어나 타자가 된다. 또한 '내'가 된다. 이것이 내가 내 시들에서 무수한 타자들과 맺는 나의 관계 맺기 방식이다. 나는 한 타자를 넘어서 다른 타자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와 함게 거미줄을 짜나가는 것이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과 연결을 하고, 고리를 맺어서 그녀의 이 시론서는 어느 한 줄을 빠트려도 이해가 되고, 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의 시론을 여성적 글쓰기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신들린 무녀의 춤과 노래처럼 주술적이게 우리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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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황루시 / 풀빛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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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을 가기 위해선 서낭당을 지나야 했다. 어렸던 나는 그곳 나무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왼쪽 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내게 무속은 두려움이고, 무당은 신기가 가득한 비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주변에는 점을 치러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점을 친적이 없다. 무속의 힘을 빌릴 정도로 힘든 일도 없지만, 무속의 힘으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책을 읽고 눈물이 났다. 무속인의 삶이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우리굿 보유자도 아들 딸 두려워 인간문화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자신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무속은 다른 종교와 같이 신적인 힘으로 무언가를 치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있다.무당들이 전도사와 스님들과는 달리 천시받고 있다. 단순한 점바치로 돈을 버는 것을 목적을 두지 않고, 우리 나라 굿을 잇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무당들을 접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신기가 내리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도 되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무당들은 대체로 세습무가 많다. 어릴 때부터 가족이라는 공통체에서 자연히 굿판을 익히고, 굿판의 열기를 느끼는 것이다.

책을 읽고 지난 오월에 강릉 단오굿을 보러 갔다. 그곳에서 황루시님을 만났다. 그녀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무속 연구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굿판을 돌아다닌 그녀는 현재 무속 연구에서 가장 중심이다.

그녀가 단오굿에서 바쁘게 무녀들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았다. 무녀들의 신비한 모습에 가슴 두근거리던 나는 무녀들 막사로 갔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강릉 단오에서 느낀 것은 굿을 잇기 위해 온 가족이 노력한다는 것이다. 굿판을 주관하는 사람은 며느리고, 딸이 애기무당이고, 상쇠는 삼촌이고. 단오굿을 보기 전에 책을 읽어 굿을 주관하는 무당들에 대해 알고 가서인지 굿 시작하는 날부터 굿판을 떠날 수가 없었다.

길게는 네 시간 굿을 하는데, 무녀의 얼굴에서 땀이 흘렀지만 말 그대로 신명이 나는 굿이었다. 할머니들 또한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바리공주가 아버지 약을 구하러 가는 대목과 춘향이 물에 빠지는 대목에서 모두들 소리내어 울었다.

어떤 할머니는 아주 멀리서 온 듯 피곤한 기색으로 지팡이를 들고 굿판에 들어왔다. 굿판에 오자마자 보따리를 베고 누워 잤다. 그렇게 우리네 할머니들은 한 해에 한번은 꼭 굿판에 와 굿을 보아야 여름을 시원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내가 그 굿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애기 무당이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귀를 세 군데 뚫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애기 무당 이름은 은희였던가. 그 무녀는 처음으로 굿을 하였는데 아직 목소리와 춤사위에 태가 나지 않았지만, 나에겐 그 나이에 힘든 무녀의 길을 당당히 걷기 위해 첫발을 디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애기무당의 굿이 끝나자 할머니들은 애기 무당 앞에 가 옷섶에 천 원짜리를 끼워주었고, 애기 무당은 할머니들을 위해 축원(할마씨들 손주가 잘 되길 빌며 우리 할머니 그저 아프지 말고, 내년 굿판에서 또 봅시다. 혹, 세상을 뜨시더라도 세상 뜨실 때, 아프지 말고, 낮잠 자듯 그렇게 편안히 가십시요.)을 했다. 그 대목에서 할머니들은 모두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애기 무당은 뽕짝 노래를 불렀다.(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언제 울었냐는 듯 할머니들은 애기무당의 노래와 춤을 보며 웃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굿은 주위가 어두워 질때야 끝났고, 할머니들은 다음 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아쉬운 듯 일어섰다.

나는 단오에서 돌아와 다시 이 책을 읽었다. 다른 무속에 관한 책을 샀다. 가장 무속인의 마음 깊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저자 황루시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그녀는 한 일주일 후에 답장을 보냈다. 그동안 전주에 굿을 보고 밤기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삶의 경험이 훑고 지나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오늘 또 남도의 어느 곳에서 하는 굿을 보기 위해 밤 기차를 탈지도 모른다. 그녀가 바람 속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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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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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견디며 글을 써 온지 3년이 지나간다. 남들이 자는 시간에 경쾌하게 자판을 두르리는 시간이, 부드러운 소파에 몸을 말아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언제나 내게 글쓰기는 좋은 느낌만을 주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의 소설은 예쁜소설이 많아 읽으면 하품이 많이 났다. 가슴을 찌르는 소설이 아니라 가슴을 보듬어주는, 물론 때론 그런 소설이 좋을 때도 있지만, 나는 조금씩 그렇게 예쁜 소설에 염증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천운영의 소설집을 기다리게 되었다. 신춘 문예 등단작부터 분명 그녀의 소설은 한국의 현대 여성 소설과 뛰어난 변별력을 가진 작품이었다. 아니,여성 소설을 뛰어 넘어 현대의 한국 소설에 칼을 들이밀었다. 식물성을 지향하고, 낮게 울먹거리던 소설과는 달리 역동적이고, 소설의 가운데에 뚜벅뚜벅 걸어가 가슴을 후벼파는 무언가가 있었다.

늙은 할머니와 쇠골을 끓여 먹으며 살아가는 마장동의 청년은 식물성(가장 식물적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다. 또한 <바늘>에서 육식을 좋아하는 문신수의 동물적인 움직임에는 둔탁하면서도 뛰어나게 민첩함을 느낄 수 있다. 짜가가 더 진짜같고, 유행하는 요즘의 시절 <눈보라콘>에서는 그 시절 누군가 한번은 먹고 싶었던 부라보콘을 등장 시켜 짜가와 실제의 차이를 드러낸다.

글을 쓰는 나에게 천운영은 두려움의 존재였다. 나는 그녀의 소설이 나오면 꼼꼼히 읽고 구성과 내용을 분석하였다. 아무리 읽어도 그녀의 소설에서 헛점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가였다. 그녀의 소설은 구성의 단단함과 묘사력의 뛰어남, 인물을 만들어 가는 힘이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의 마음을 휘두르는 작가의 칼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등뼈를 만져보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고개를 흔들며 그녀의 소설 속의 인물을 떠올려 본다.

현재의 우리나라에는 예쁜 소설이 많다. 읽으면 눈물이 나고, 설레이게 만드는 그런 소설. 그러나 읽는 독자의 가슴을 칼로 후벼파는 소설은 처음 접하는 것 같았다. 그런 천운영의 소설을 한데 묶여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여러가지 바쁜 일에 치여 근 한달 동안 짧은 묘사 하나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후배가 소포로 보내준 소설집을 읽었다. 내 가슴을 후벼판 칼이 빠져나오기 전에 나는 밤을 견디며 자판을 두들겨야 한다. 경쾌하게 소리내는 자판에 손가락을 걸고, 언어를 빚어보고 싶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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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 비밀 노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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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의 책을 읽을 때 여름비가 내렸다. 우울한 날씨에 소설까지 어두워 읽는 내내 우울했던 것이 생각난다. 이년 전에 읽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소설의 부분들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어두운 곳에서 깊은 계단을 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 내딛을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움직이게 하는, 그런 계단 말이다.

이 글은 루카스의 작문으로 생각되는 부분의 글들, 실제로 보여지는 상황, 다시 루카스가 모르는 실제의 상황들이 나온다.

「비밀노트」에서 화자를 1인칭 단수가 아닌 복수(우리)로 해서 낯설게 한다. 다른 인물도 토끼 주둥이, 당번병, 서점주인으로 호명된다. 그것은 당시의 나치스와 사회주의자가 등장하는 혼란 속에서 정체성의 상실을 암시하고 있다. 1부를 다 읽는 순간까지도 독자는 소설의 서사를 믿지만 그것은 루카스가 작문노트에 쓴 하나의 허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함으로써 주관적 표현을 배제해준다. 쌍둥이 형제가 할머니 집에서 생활하게 된 그 지점(실제는 루카스가 재활원 폭파 후, 노파에게 맡겨지고 루카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작문노트에 글을 쓴다)은 그들 주변의 폭력적이고 암흑세계이며 지옥과 같은 악마적인 진실의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타인의 증거」에서는 쌍둥이의 한 명인 루카스가 등장하고, 그 외의 다른 이들도 이름을 갖게된다. 아버지의 시체를 밟고 국경을 건넌 클라우스를 보내고, 혼자 남은 루카스가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2부의 내용들은 1부에서 보여주었던 지옥의 이미지들이 더 구체적이고 암울하게 나타난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방황하는 처녀, 남편의 죽음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도서관 여직원, 책을 쓰겠다는 꿈에 폐인이 되어 가는 알콜 중독자인 서점 주인, 소심한 동성연애자인 공산당 간부, 늙은 불면증 환자 등, 이들은 삶에 있어 어둡고 습한 인물들이지만 작가는 거리를 조정하여 결코 감상이나 주관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거부한다.

2부의 6장에서 모습을 들어낸 클라우스는 소설의 내용을 뒤엎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의 존재에 대한 증거는 불확실하다. 인물들에게 각자의 이름을 부여하면서 정체성을 드러내지만 실제로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의문을 다시 던진다.

「50년간의 고독」을 읽다보면 다시 혼란에 빠진다. 1부 내용이 루카스가 쓴 작문 노트이고, 2부에서 클라우스는 원래 루카스이며,실제 클라우스는 어머니를 모시며 단둘이 살아 가고 있었으며, 루카스는 할머니의 집에서 살면서 혼자 작문 노트를 썼다,

2부에서 할머니의 집에 남은 루카스와 국경을 넘은 루카스(국경을 넘어서 클라우스라는 이름으로 산다)는 한 명의 인물이다. 즉, 남아있던 루카스가 작문에 존재하는 루카스인 것이고, 국경을 넘은 루카스(클라우스)가 실제의 인물이다. 국경을 넘은 루카스(클라우스)가 자신의 형제를 찾아오면서 그동안 작문노트에 나왔던 인물들과의 관계들이 다시 정립이 된다. 어머니를 모시며 사는 클라우스는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고 있다. 루카스는 그를 만나지만 클라우스(루카스라는 필명으로 쓰는)는 루카스(클라우스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는)의 존재를 부인한다.

3부에서는 루카스, 클라우스의 시점에서 똑같이 '나'라는 주어로 서술지만 여전히 주관적인 생각이 배제된다. 클라우스의 부인에 루카스는 자살을 하고, 그 소식을 들은 클라우스도 같은 방법으로 자살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암울한 분위기와 동시에 시점들의 변화와 인칭(우리→루카스, 클라우스→나)변화에 시도를 한다. 그러나, 시도는 단지 실험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시의 상황,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에는 단지 어두운 현실을 보여 주는 암울한 소설을 뛰어넘어 정체성에 대한 많은 생각을 주는 소설이다. 또한, 자신의 반쪽의 영혼을 찾아 낯선 도시를 헤메이는 영혼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자는 언제나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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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r830 2004-05-19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그 책보다는 님의 글을 읽고 알은 게 많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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