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2
채만식 지음, 우찬제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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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의 막장

<탁류>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한 여자의 인생이 망가져 가는 과정이다. 꽃다운 초봉이는 난봉꾼에다 횡령범인 태수에게 팔려 가다시피 결혼했다가 형보에게 강간을 당하고 아버지뻘인 제호의 꾐에 넘어가 첩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다시 형보의 손아귀에 들어가며 점점 시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돈과 사랑, 섹스, 폭력, 살인, 자살, 온갖 계략과 꿍꿍이, 심지어는 세 남자와 얽혀 누구 아이인지도 알 수 없는 애라는 설정까지 난무한다. 분위기나 문체가 예스러울 뿐,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초봉이를 손에 넣으려는 남자들의 망나니짓은 그러려니 싶지만, 도대체가 줏대도 뱃심도 없이 그저 운명이라 되뇌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전근대적인 초봉이 캐릭터가 답답함과 짜증을 유발한다. 이쯤이면 막장 드라마의 요건은 다 갖췄다 하겠다.


유쾌한 언어

작품 배경인 1930년대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제하면, 순결한 처녀가 험난한 세상의 풍파에 망가져 간다는, 한없이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탁류>를 돋보이는 소설로 만드는 것은 바로 문체다. 각종 사투리와 (오늘날 기준으로) 참신한 어휘 그리고 맛깔나는 표현 들이 시종일관 암울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사설 조도 인상적이다. 심지어 심각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는 살인 장면에서도 박자와 리듬감이 살아 있다. 다소 부족한 내용을 탁월한 형식으로 살린 경우라 할 수 있다. 채만식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에 비하면 이기호니 최민석이니 하는 요즘 소설가들의 입담은 어설픈 따라 하기 수준이다.


식민지 근대의 정글

한판의 막장극과 유쾌한 입담이 만나 빚어내는 시너지 효과가 <탁류>의 핵심이다. 한마디로 하면, 풍자다. 최초의 맑은 금강 물이 먼 길을 흘러 점점 탁해지고 항구인 군산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탁류'가 되는 것처럼, 초봉이의 인생은 시간이 감에 따라 비참하고 구질구질해진다. 식민지 착취의 전진기지인 군산에서는 가난과 타락, 눈먼 욕망이 횡행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속고 속인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무법질서의 정글이 따로 없다. 채만식은 재치와 능청으로 그 정글을 그린다. 웃음과 눈물이 뒤섞이는 바람에, 너무 웃겨 눈물이 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슬픈 일이라 헛웃음이 나는 건지 때로 분간하기 힘들다. 어쩌면 웃음이 있어야 정글에서도 지옥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이리라. 전복의 웃음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위로의 웃음이라도 사는 데 중요한 법이다.


인상 깊은 구절

“이놈!”
하더니 방망이는 연달아 그를 짓바수기 시작한다.
“이놈!”
하고
“따악”
하면
“어이쿠!”
하고……
“퍼억”
하면
“아이쿠!”
하고, 그래서
“이놈!”
“따악, 퍼억”
“어이쿠!”
(328쪽)

일찍이 가슴을 설레게 해주었고, 두고두고 잊히지 않고 연연턴 초봉이고 보니 인절미에 조청까지 찍은 맛이다. 좋다.
(363쪽)

국제조약과 한가지로 계집 사내 사이의 연약은, 저 싫으면 차 내던지는 놈이 장사요, 앉아 당하는 놈이 호소무처라는 걸 모르는 초봉이다.
(428쪽)

나그네 먹던 김칫국이나마 먹자니 더러워도, 남 주자니 아까운 인심이라면,
(431쪽)

“시에미가 오래 살면 자수물통에 빠져 죽는다더니……”
(432쪽)

“연앤 정열허구 정열허구가 만나서 하는 게임이구, 그러니깐 연앤 아마추어 셈이구…… 그런데 결혼은 프로페쇼날, 직업인 셈이구……”
[중략]
“그러니까 이를테면 학문허구 직업허구처럼 다르지…… 누가 꼭 취직하자구만 공불 허우?”
(5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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