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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기행 ㅣ 학고재 산문선 5
시바 료타로 / 학고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본명 후쿠다 사다이치 (福田定一). 필명 시바 료타로 (司馬療太郞). 일본의 국민적 작가라는 호칭을 얻고 있으며 어릴적 꿈은 마적, 몽고어를 전공하였다. 그의 이름 시바료타로의 '司馬療'는 고대 중국 사서 <사기 (史記)>의 저자 사마천 (司馬遷)을 따라가기가 요원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시바씨는 당시 (1970년대) 자신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눈에 들어오는 한국의 온갖 풍물들에서 지난날의 일본 침략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한일의 냉엄한 관계를 생각케 하는 괴롭고 씁쓸한 여행이 될 터이지만 그래도 감히 그런 한국을 여행하려는 것은 '일본인의 선조 나라에 가기 위해서 일뿐, 남의 나라의 정치 정세를 시찰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나의 이번 여행은 한 (韓)이니 왜 (倭)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원형 (原型)을 알고자 함일 뿐 고대 조선에 대한 호고 (好古) 취미나 고려. 조선의 도자기가 지닌 비색 따위에 이끌린 여행은 아니었다.'
시바씨는 이 책속에 '만일 세종이 조선 역사에 존재하지 아니하고 그 후에도 한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한문 표현밖에 못하는 나라였을 터이고 조선어에 의한 문학적 표현을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 '만일'은 전율 (戰慄) 그것일 뿐이다. 또한 세종은 외정 (外政)에서도 탁월하였으나 그것은 정치가로서의 정치는 아니고 경륜가로서의 정치였다. 세종은 정치가 갖는 고귀함을 역사에 투영시킨 드물게 보는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또한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 조선 관리 사회의 대관들 중에는 변변찮은 자들이 많았으나 무과 출신이며 무신인 이순신만은 지극히 고아 청결하였고 죽는 순간까지 민족의 대난을 막기 위하여 온 몸을 헌신하였는데 그 업적이나 문장을 볼때 추후도 자신의 공을 자랑함이 없었다'고 말한다.
왜 '한국 기행'이 아니고 '한나라 기행'이냐는 물음에 시바씨는 '國'이라면 국가 권력의 울타리에 있게 되므로 그런 울타리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사관 (史觀)은 중화민족을 자부하는 한족 (漢族)이 '북적 (北狄)' 혹은 동이 (東夷)라고 깔보는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 일본족에 대하여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언어학적으로 몽골어, 한국어, 일본어는 다 같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근친관계라고 말하며 그런데 한국의 유학자들은 왜 한족 (漢族)과 맞장구를 치며 퉁구스족을 오랑캐다 뭐다 하면서 깔보는지 납득이 안 간다고 했다. 또한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은 일타이 어족에 속하는 민족 중에서 몽골족은 원나라, 만주족은 청나라 라는 세계사에서 공전절후의 일대 제국을 만들어 소수 민족이 다수 민족을 통치한다는 기적을 낳은 민족이다. 그런데 오늘날 몽골족은 보잘 것 없이 쇠퇴하고 만주족은 흔적도 없다. 그 중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은 한족 (漢族)과 일본족 뿐인데 왜 서로 손을 잡지 못하는가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말한다. '내셔널리즘은 어느 민족 어느 향당 (鄕黨)에나 있게 마련이므로 나쁘다고하는 할 수 없다. 다만 천박한 내셔널리즘이라는 놈은 노인으로 치자면 치매 같은 것이요 장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 없음의 한 표현이겠고 젊은이의 경우는 단순한 무지 (無知)의 표출일 뿐이다'라고. 그러면서 끝으로 그는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의 한 노인이 말인 '그쪽에서도 많이 왔고 이쪽에서도 많이 갔다'는 말을 인용하며 한일의 역사를 압축한다.
책을 덮고 나서 밀려드는 느낌은 경제 대국인 일본은 부럽지 않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시바 료타로라는 훌륭한 작가를 갖고 있는 일본과 그런 작가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역자의 매끄럽고 정겨운 번역 문체 또한 읽는 맛을 더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