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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탄
나카가미 겐지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신화 속의 영웅의 조건은 복수 (複數)의 부모를 갖는 것이라고 심리학자인 하이데거는 말했다. 마흔 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일본의 작가 나카가미 겐지의 자전적인 요소가 다분한 이 소설은 주인공 아키유키 (秋幸)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얼키고 설킨 혈연들, 그 속에서의 이복 형제들 간의 끈끈한 정과 생부에 대한 분노와 핏줄의 부정, 이복 누이 와의 근친 상간, 생부의 아들인 또 다른 이복 아우와의 골육 상쟁 등을 작가가 태어난 땅인 가레키나다 (枯木灘)와 뒷골목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남성적인 필치로 그리고 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네 자녀를 둔 아키유키의 어머니는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난 근본도 알 수 없는 사내와 관계를 하고 아키유키를 낳지만 그 사내는 동시에 두 명의 여자에게도 임신을 시키고는 유치장에 들어간다. 이에 분개한 아키유키의 어머니는 전 남편의 네 자녀를 남겨 둔 채 사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키유키만을 데리고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 마을의 홀아비인 다케하라 시게조와 결혼을 한다.
이에 격분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큰아들 이쿠오는 어머니가 재혼한 집에 여러 차례 찾아와 협박을 하지만 끝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해버리고 만다. 세월이 흘러 다른 곳에 가정을 꾸리고 재산가가 된 아키유키의 생부인 하마무라 류조는 아키유키를 찾아오지만 아키유키는 그를 증오하며 그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사내가 자신의 어머니 이외에 건드렸던 창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 누이와 관계한 사실을 폭로하지만 사내는 계집애는 어찌 되는 상관 없다며 외눈 하나 까딱 않는다. 결국 사소한 다툼 끝에 자제심을 잃고 사내에게서 태어난 또 다른 이복 동생을 죽여버리고 아키유키 자신도 끝내는 유치장에 갇히고 만다
책 앞머리에 가계도를 집어넣었을 정도로 복잡한 등장 인물들 때문에 처음 한 동안은 읽는데 애를 먹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청탁 (淸濁)의 공존과 운명의 긍정을 보게 된다. 복잡하게 얼키고 설킨 혈연들, 생부에 대한 증오,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부정 등을 육체 노동이라는 탈출구를 통해 분출해 내는 아키유키를 가레키나다의 햇살과 바람과 주위의 풍광들은 위무하듯 어루만져준다. 그러나 결국 아키유키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억눌린 분노는 생부의 아들인 또 다른 이복 아우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그렇게도 부정했던 생부의 피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고 끝내는 운명을 긍정하고 만다.
결국 원죄처럼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있던 아키유키의 삶은 피로 피를 씻는 승부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혼의 해방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