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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섬 ㅣ 한국문학대표작선집 8
이문열 지음 / 문학사상사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한가로운 저물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정호의 '세월, 그것은 바람'이라는 지난 시절의 노래를 듣다가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사진 작가 강운구의 사진을 오려 넣어놓은 액자에 눈길이 갔다. 너덧살쯤으로 보이는 계집아이가 느닷없이 내리는 눈발에 영문 모를 표정으로 엄마품에 안겨있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는 내리는 눈속에서 잠깐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보일락말락하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 사진 밑에는,
<그때 그날 설핏하게 기울던 해가 낮게 깔린 구름 속으로 잠겼을 때 느닷없이 장난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궁핍하던 시대의 궁핍하던 사람들이 짓던 넉넉한 표정과 분위기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춥고 기나긴 겨울이었다>라는 글이 붙어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어우러져 피어있고 산지사방에 벚꽃이며 산수유며 백목련 자목련들이 활짝 활짝 제 몸을 열어보이며 봄은 자꾸 자꾸 무르익어 가는데 왠일인지 나는 오늘 자꾸 과거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책꽂이에서 빼어낸 책이 오래 전에 읽었던 이문열의 <익명의 섬>이었다. 이 작품은 '익명성'으로 대변되는 깨철이라는 떠돌이 거렁뱅이가 성씨는 달라도 고종이니 이종이니 하는 식으로 얽혀있는 동족 부락의 여인들과 은밀히 성을 교환함으로써 마을의 여인들을 지배해가고 남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해 깨칠이를 성불구로 치부하며 그러한 사실을 묵과한다는 스토리이다.
이 책을 읽고 어느새 '기명성'보다는 '익명성'이 보편화된 오늘날의 세태와 그 익명성으로 인해 개인이, 가정이, 사회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심각한 폐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