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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지나간다
구효서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하루가 다르게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새로운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 영악하고 되바라진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어느 포근한 봄날 완행열차를 타고 어깨에 내려앉는 햇살에 깜박 깜박 졸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고향집을 찾아가고픈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희망사항이고 나는 시골에는 먼 친척하나 없는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철저한 아스팔트 킨트이다.)
어느날 필요한 책을 구입하러 서점에 갔다가 책 겉표지에 선학 알미늄 도시락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이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책 제목은 <인생은 지나간다>. 온통 현란한 색상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정신을 빼놓는 책 표지들 가운데 그렇게 수수하게 산골 색시 같은 모습으로 그 책은 얌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지난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겉표지에 유혹당해 다른 책들과 함께 사들고 온 그 책은 우선 읽어야 할 골치 아픈 (?) 책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내게 발탁 (?)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 책속에는 20-30년 저편의 내 유년의 생활이 몽땅 들어있었다. 지금 보면 궁핍을 상징하는 그 시절의 물건들이 그때는 얼마나 자랑거리였으며 얼마나 어린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던지...
작가의 말대로 TV는 테레비로, 도시락은 벤또로, 양동이는 빠께쓰로 불리던 그 시절. 손톱깎기 보다는 쓰메키리가 노란무 보다는 다꽝이 귀에 익은 세대. 열개의 구멍에 일일이 손가락을 집어넣고 돌려야했던 그 시커멓고 묵직한 전화를 개통시켜 주러 온 파란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을 보고 가슴 설레이던 일. 테레비를 다 보고 나면 왜 그리 나무로 된 테레비 문은 그렇게 꼭꼭 닫아두었는지... 기운이 남아돌다 못해 난폭 (?)하기 까지 했던 4남 1녀를 키워내신, 발틀 (발로 된 재봉틀)을 돌리던 자그마한 젊은 아낙은 어느새 백발이 되어 함께 늙어가고 있는 자식의 콧등을 시큰거리게 한다.
책을 읽으며 어눌한 작가와 그 아들내미의 대화에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잡기도 하고 군대가 형에게 보낸 어린 작가의 허영끼 어린 위문편지에 키들거리다보니 내 유년으로의 여행은 어느새 종착지에 이르고 어느새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다.
작가와 같은 연배인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은 어느덧 중년을 훌쩍 넘긴 40대가 된 우리 세대의 보편적 정서를 본다. 실로 오랜만에 마음의 완행열차를 타고 기억속의 유년으로 되돌아가보며 참으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