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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평점 :
#서평이아닌
#독후에세이
독서모임을 통해 세상을 이전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지적 성장이니 인성 함양이니 같은 좁다란 의미는 부여하고 싶지 않다. 그저 현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안경을 하나 얻은 것뿐이다. (벗으면 그만일)
책으로 만나는 세상은 사실 좀 극적이다. 제아무리 현실을 바탕으로 썼다고 해도, 한편 현실이 책보다 더욱더 처참하고 엉망이라고 해도 어쨌든 책으로 만나는 세상은 책 속에서 안전하게 적절한 거리와 쿠션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자꾸만 더 책 속으로만 빠져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안전하게 읽기만 했던 책이 독서모임을 시작함으로써 더 이상 안전지대일 수 없게 되었다. 마주 앉아 건네는 말과 표정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각자가 안고 있는 고정관념과 숨길 수 없는 혐오와 스스로에게 가하는 질타 등등 제아무리 꼼꼼하게 포장을 해도 회차가 쌓이고, 시간이 쌓이고, 주고받는 말이 쌓이면 더 이상 포장할 수만은 없다. (그것을 깨달은 쪽이라면, 나는 그럼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건가)
날것으로 마주하는 세상은 더 이상 현실도 책도 될 수 없다. 그 어중간한 경계에서 끝도 없이 흔들리는 것. 눈앞의 현실과 머릿속에 든 책이 일체가 되는 일은 웬만해서는 없다. 인식을 가득 채웠던 글자를 지나쳐 사람과, 상황과, 자본과, 기회가 마구 뒤섞이게 되면 정작 내가 했던 말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종래에는 일치하지 않는 그것마저도 인간의 진실성이라 포장하며 다시 또 거리와 쿠션을 찾게 된다.
제도가 만들어지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나 또한 밥 먹듯 했다. 구태의연한 사회적 문제들을 논할 때마다 수순처럼 따라오는 말 ‘제도’다. 마치 그것이 없어서 이 세상이 이렇게 굴러간다는 듯. 법을 공부하고, 제정하고, 감시하고, 심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은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과는 또 다르다. 그것에 실망이나 무력감, 환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보고 싶은 그 마음이 사실은 책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제도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무너지는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격리해 주지 못한다. 공정과 정의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을 추앙해 주지 않고, 아무 욕심 없이 바라는 것이라고는 오직 가족들과 나눠 먹을 밥 한 그릇뿐인 사람의 숟가락을 스크린 사이에 욱여넣으며 ‘정’이 붙지 않은 무수한 단어들로 (기간제, 임시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계약직) 아무렇지도 않게 분질러 버린다. 그래서 나는 법을 믿지 않고, 제도를 우선에 두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은 사람이기에, 사람이라서, 사람이니까 생겨나는 일들이다. 그것에 조금 더 너그러울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의 양심을 믿어보는 쪽으로 서고 싶다. 법이나 제도가 아닌 인간 그 자체로 사람다울 수 있는 세상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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