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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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 헤르만 헤세



얼마 전 아이와 대중목욕탕에 갔다. 목욕이 목적은 아니었다. 바데풀이라 해서 100센티미터가량 깊이의 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볍게 몸을 씻고 곧장 바데풀로 향하는 아이는 스노클링 마스크를 쓴다. 아이가 가고 나서 느긋하게 앉아 꼼꼼히 몸을 씻었다. 온탕으로 걸어가는데 바데풀 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순간, 뜨겁고도 차가운 전율이 정수리에 꽂히더니 이내 목덜미와 허리를 거쳐 발바닥 아래로 내리훑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살아오면서 몇 번 느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전율이었다. 아이가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만큼 물속에서의 자태가 자유로웠다는 뜻이다. 물속이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어떠한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곳곳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물거품들을 바라보노라니 그간 내 삶 속에 잡혀 있었던 어떤 옥죔 들이 물거품처럼 퐁퐁 터지는 것 같았다.



인간은 수많은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픔, 다른 사람의 판단, 자기 자신의 마음, 잠드는 것과 깨어나는 것, 혼자 있는 것, 추위, 광기,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가면에 불과하다. 실제로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대상은 한 가지뿐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 안전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훌쩍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렇게 큰 믿음을 경험하고 운명을 철저하게 믿은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146p



‘몸을 던진‘ 경험은 말할 것도 없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단순히 물이 무섭다, 숨을 못 쉬게 될까 무섭다, 코나 귀에 물이 들어가 고통스러울까 겁난다 등 물속에 들어가면 안 될 이유들을 부단히도 들먹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두려워했던 건 물이 아니었다. 물속으로 뛰어듬, 그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물속에 뛰어든 아이는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수영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물속에서 숨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는 아이가 태초부터 물고기였던 것처럼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 장면은 지난 나의 삶을 전혀 다른 각도로 조명했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실제의 그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종의 허상 같은 위험이었던 것이다. 허상. 최근 삶을 둘러싼 대부분의 현상과 관념에 널찍하게 도포된 허상을 시나브로 깨닫는다. 그럴 것이다, 그러지 않을까? 그랬을 가야 등 막연하거나 무지한 것들에 아무렇게나 입혀지는 편파적 사고들이 실제적 시각과 감각을 옥죄었던 것이다.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 행복 같은 것들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 비관과 두려움이 함께 있어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고통을 잘 이겨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는 말과 같다. 67‘는 헤세의 말에서 고통과 비탄, 슬픔과 괴로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렴풋 알게 된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제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그 속에서 나아갈 방향과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수영을 할 수 있냐 아니냐의 말과는 전연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수영은 못하지만 헤엄을 칠 수 있는 건 최선과 차선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자신만의 방법을 어떻게로든 행하고 움직이는 것. 그것은 아홉 살 아이의 물놀이가 나에게 던져준 조그만 돌멩이가 되어 잔잔하고 안전하기만 했던 나의 마음속 호수에 커다란 포말을 일으켰다.



그렇게 이런저런 책을 읽는 동안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영원한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해결할 수 없으며 단지 체험할 뿐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 우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새로운 욕구와 열의로 추진할 수 있는 곳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264p



최근 읽고 있는 책들이 어떤 구를 이루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 끝에서 무엇을 마주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결국 구 안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시도하고, 추진할 수 있는 욕구와 열의를 다지기 위해 부지런히 읽고 쓰겠다.


@moonch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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