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작이다. 전작이 저자의 유년기인 성장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라 하면 이 책은 성인이 되어 6·25를 겪은 이후 생존의 고비에서 삶에 헐떡이며 그 생의 매 순간순간을 처절함과 절박함으로 점철한 생존기를 다룬 소설이다.

 

전작을 읽으면서는 박적골을 향유하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어찌되었든) 사랑이라는 그 망태를 둘러쓴 저자의 유년을 회고하며 싱아를 떠올리는 시간은 아릿하면서도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술술 읽혔는데 이 책은 단락 곳곳에 절규와 절박이 묻어나서일까, 술술 넘어 가지지 않았다.

 

도둑질을 일삼아 가족의 목구멍에 풀칠을 해야 했던 올케와의 야반 행적들도, 불시로 드나들던 인민회 사람들도, 상처가 매꿔지지 않아 늘 솜을 쑤셔 박아 소독을 해야 했던 오빠의 비듬 앉은 말린 명태 같던 다리도, 양갈래 머리 곱게 묶은 서울대학생 소녀티를 안 벗은 PX 파자마반 박양도 하나같이 읽는 내내 불안함이 감돌았다.

 

피난하면 떠오르는 상정이 이젠 여인악착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간 연이어 읽은 소설이 우연찮게 전쟁 중 여인네들의 삶을 조명한 내용이 많아서이다. 이 책 또한 피난에 비춰 지는 삶이 단면들은 남정네들의 입지보다는 아픈 아이의 헐떡이며 내뱉는 숨마저도 내가 대신 거둬 주겠다는 심정으로 삼켜 먹어버리는 여인들의 절규와도 같은 생의 처절함 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은 점점 추비하고 남루해지는 걸까. 도둑질해서 먹고 살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온 식구가 양키한테 붙어먹고 사는 거야말로 남루와 비참의 극한이구나 싶었다. 개천에서 의미하게 썩은 내가 올라왔다. 얼음이 풀리고 있나 보다. 나는 개천을 향해 몇 번 웩웩 마른 토악질을 했다. 그리고 수양버들 등걸에 몸을 기댔다. 오래된 나무엔 영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위로받고 싶었으니까. 오래 그러고 있었다. 수양버들은 영적인 나무라기보다 헤픈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딱딱한 나무껍질을 통해 곧 미친 듯이 폭발할 숨은 욕망들이 느껴져 쓸쓸하게 웃고 말았다. p280

 

사라져 버린 싱아와 그 산을 저자는 기대 앉은 등받이 나무에서 잠시나마 찾을 수 있었을까. 추운 겨울 바람이 나에게도 스민 것 같은 장면이었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또 그 이후의 삶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소설 속에서 전쟁이나 역사 따위의 극진적인 이유들을 차치하고 우리네 인간군상들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고, 그런 삶의 진한 생명력들을 지금 우리 시대에 가져와 봄에 의미를 가져본다.

 

, PX에서 화가 박수근님을 만난 일화가 너무 신선했고, 충격적이고 재밌어서 인상적이게 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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