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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전파 ㅣ 아트 라이브러리 12
팀 베린저 지음, 권행가 옮김 / 예경 / 2002년 4월
평점 :
책 표지부터 너무 아름다웠다. 미술책은 설명도 설명이려니와 우선은 그림을 보는 재미 때문에 사게 되는데, 이 책은 종이질이 좋고 책 크기도 그림을 보여주기에 넉넉하다. 사진 속 색감도 참 곱다.
로세티, 밀레이, 헌트 등은 1849년 RPB(Pre-Raphaelites, 라파엘전파 형제회)를 만들어 Raphael(1483-1520) 시대 이전의 미술을 부활시킹으로써 당시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들은 수세기동안 라파엘과 미켈란젤로를 최고로 숭배하면서 모방했던 것을 부정하고, 밝은 색채,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 그러면서도 상징적 의미와 은유가 깃들인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이들은 원근법과 강렬한 명암대비(주인공을 부각시키는)를 버리고 화면전체를 동등하게 구석구석까지, 정밀한 묘사와 보석같은 색상으로 꽉 채웠다. 하지만 단지 장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품 하나하나까지 의미를 띄고 있는 그림을 추구했다. 이들이 라파엘전파로 함께 활동한 시간은 채 10년이 되지 않지만, 이후 각자의 개성을 살리며 갈려져 나간 그림들도 위의 공통점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나는 의미고 뭐고를 떠나, 이 그림들이 너무 아름다운 데에 반해버렸다. 물론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의 그림도 아름답다. 하지만 라파엘의 그림이 정말로 우아하고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정말로 역동적이라 말할 수 있다면, 라파엘전파의 그림은 정말로 아름답다. 짙은 빨강, 짙은 청색, 짙은 초록색, 노란색, 오렌지 색 등 이들이 즐겨쓰는 색들은 화려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깊이감을 준다. 실제 자연의 색보다 더 빛나는 색으로 자연을 찬양하고 있음이 느껴지는데, 이들의 자연은 먹고 살기 힘든 위험한 자연이 아니라 중세의 기사와 숲의 요정이 나올 것 같은 그런 자연이다.
얀 반 아이크의 그림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보면, 이들이 확실히 이 화가로부터 그 색채와 세부묘사, 그리고 상징을 배워왔음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정적이고 차가운 네델란드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들의 그림이 단번에 좋아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밀레이의 '마리아나'와 '오필리아','눈 멍 소녀', 헌트의 '성 게오르기우스와 샤브라 공주의 결혼', '세상의 빛', 로세티의 '푸른 내실','베로니카 베로네세' 는 눈을 떼기 힘들만큼 아름답다. 유미주의를 지향했다는 번 존스의 '속아넘어간 멀린'이나 '바닷괴물을 물리치는 페르세우스'는 환성적이어서 주문을 외우면 그림 속에서 금방 마법사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브라운의 '노동','기다림','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또한 은 당대의 사회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으로 보여주는 인상깊은 작품들이다. 브라운과 인치볼트의 풍경화들 역시 마치 생물을 그린 듯 생동감이 있다.
라파엘전파는 당시의 금기시되던 주제(쾌락, 귀족들의 문란한 생활, 매춘 등)을 과감히 화면에 표현하기도 하고, 거룩하고 진지한 주제가 아니라 단지 '분위기'를 주제로 잡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도 보수적인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견지하기도 하는 등 일관된 태도로 오랫동안 화단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시도했고 새로운 도전을 즐겼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 그들이 스스로의 그림에서 (어떤 종류이건 간에) 스스로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끼며 그렸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런던자연사박물관'을 읽고 나서 꼭 거기를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런던에서 가야 할 곳이 한 곳 더 생겼다. 라파엘전파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테이트미술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