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작은 것들로 - 장영희 문장들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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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사서 읽었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반짝이게 하는 글을 만나고 잔잔히 행복했었죠. 이름만으로 선택한 책입니다. 그녀는 가고, 글이 남았지만,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글들을 만나요. 노란 표지와 함께.


저자 장영희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컬럼비아대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서강대 영미어문 전공 교수이자 번역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어요. 저서로는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내 생에 단 한 번>,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있고, 번역서로 <종이시계>, <슬픈 카페의 노래>, <이름 없는 너에게>가 있고, 그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살아있는 갈대>는 부친과 공역했습니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독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그녀는 2009년 5월 9일 57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녀는 가고 없지만, 그녀의 마음을 닮은 글들이 잔잔히 남아서 오늘도 우리들을 위로하고 있죠. 책은 자연, 인생, 당신, 사랑, 희망이라는 주제로 짧은 산문으로 된 것, 조금 긴 산문,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대화체의 문장들이 실려 있습니다. 테두리가 은은한 노란색으로 되어 있어, 책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따스함이 느껴질 것 같죠. 연말부터 연초에 이어지는 우울한 세상 소식 속에서도 나를 단단히 세워갈 위로의 글들을 펼칩니다. 하나하나 마음에 발자국을 찍듯이 천천히 음미하면서요.


참으로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이다. 소나기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살 속에서 하늘도, 산도, 저 멀리 언덕 위의 작은 상자 갑 같은 집들도, 길모퉁이에 선 나무들까지 모두 금테를 둘렀다. 향기로운 미풍 속에서 나는 희망과 재생의 계절, 봄의 냄새를 맡는다. (p26)

나이를 먹으면서 봄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괜히 폼 내고 분위기 잡던 가을날은 쓸쓸해서 전처럼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요. 짧은 문장에서 봄의 냄새가 나고, 금테를 두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기운이 희망을 주는 봄. 우울한 뉴스를 보면서 봄을 앞당기고 싶다고 생각해요.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더욱더 그런 마음이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을 맞을 겁니다. 몇 달이 지나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진 채로 희망의 밝은 봄으로 나아갈 거예요. 기어이 밝은 쪽으로 엄마의 손을 끌었던 동호의 이끌림에 의해서요.(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보이지 않더라도 기어이 빛을 보면서 어둠 속에서 밝은 쪽으로,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 쪽으로 움직일 겁니다. 그녀의 따뜻한 응원을 발판 삼아서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다 한 사랑을 해 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p60)

그녀는 이런 믿음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그나마 가벼웠는지 모릅니다. 그녀의 책을 조금 더 살갑게 대한 것은 같은 질병을 앓았다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완치가 없는,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그 질병을 몸에 달고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유쾌하거나 가볍지 않아요. 마음은 혼자서 별다른 이유 없이 널뛰기를 하고, 사소한 신체의 증상과 변화에도 신경이 곤두서곤 하죠. 하지만 환자임을 늘 기억하고 예민하게 살아도 시간은 가고, 그냥 정상인으로 생각하면서 살아도 시간은 갑니다. 그렇다면 어떤 게 더 나은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평소처럼,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살기로 선택해요. 물론 완벽하게 그렇게 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모두에게 죽음은 당연하고, 그 시기만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하루에 감사하며 주위 사람들을 챙기다가도 평생을 살 것처럼 금세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모든 일을 내가 다 할 수는 없기에 그녀의 말을 길잡이 삼아 천천히 가보려 해요. 내 몫의 하루를 온전히 감당하고 즐기면서 뚜벅뚜벅 걸어가 보려 합니다. 제가 못다 한 사랑을 남은 사람들이 살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요.


따뜻하고 작은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지친 어떤 날, 위로가 필요한 어떤 날, 다른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생각하는 어떤 날에 펼쳐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요.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키우는 사랑으로 그녀는 성장하고 살아냈습니다. 그녀의 문장이 아름다운 것은 삶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그 삶이 아름다운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반짝이는 빛 동그라미 같은 삶의 작은 것들을 더 반짝이게 하는 사람. 그 반짝임을 혼자만 누리거나 보지 않고 기꺼이 나누고 열어 보여 확장시킨 사람입니다. 부서지는 작은 빛 가루 같은 제 일상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닮기를, 그녀의 사랑을 흉내 내기를 욕 심네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조금은 지친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에게 건네고 싶은 책입니다. 당신의 삶은 작은 것들로 반짝이고 있다고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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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수집가들
피에르 르탕 지음, 이재형 옮김 / 오프더레코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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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일러스터이자 탁월한 안목을 가진 피에르 르탕의 수집가 친구들. 피에르 르탕의 그림과 함께 만나는 수집가들의 컬렉션과 수집의 진정한 의미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소유를 넘어선 수집가의 안목이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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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수집가들
피에르 르탕 지음, 이재형 옮김 / 오프더레코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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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밥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밥이 이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시 취업하기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도 책의 언저리를 서성거렸죠. 좋은 책들이 나온 것을 보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심한 갈등을 겪었고, 선정되신 분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어요. 이제는 맘껏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하던 때 만난 책입니다. 6살 큰아이와 1살 둘째를 업고 참소리 박물관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수집이라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던, 한참 시간이 지나서도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추억이죠. 그 기억에서부터 시작된 선택일지 모릅니다. 파리의 수집가들은 어떤 것들을 모았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 것은요. 조금은 사적인 그들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작가 피에르 르탕은 1950년 베트남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평생을 파리에서 살았어요. 베트남 출신의 화가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동양적인 예술품과 미술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7세에는 <뉴요커>의 표지 그림을 그리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평생을 흥미로운 것들을 보고, 찾고, 욕망하고, 획득하는 수집가로 살았어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꼭 소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작가입니다. 2019년 그가 타계한 후 그의 아파트의 400여 점의 애장품들은 경매를 통해 그의 취향을 존중하는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고 해요. 이 책은 그토록 아름답고 고집스러웠던 ‘수집하는 마음’을 기록한 유일한 회고록이자, 르탕이 직접 그리고 쓴 마지막 책입니다. 책은 컬렉션이란 “매료되었으나 경험할 수는 없었던 시대와 나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연결고리”임을 여실히 보여줘요. 그의 수집 열정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첫 이야기를 살짝 들춰볼까요?


브리오니 왕녀로부터 지금은 사라진 이 컬렉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열망해서 얻은 것들은 결국 우리의 손을 떠나버린다는 것을. (P20)

어린 시절부터 아름다운 것을 열망했던 작가는 아버지의 배려로 브리오니 왕녀 집에 심부름을 갑니다. 그녀의 벽에는 사각형의 얼룩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수집한 미술품이 오래 걸려있던 자국이었죠. 생계를 위해 하나씩 팔다 보니 벽에 사각형 얼룩만 남았다는 브리오니 왕녀의 설명을 들으면 작가는 생각했다고 해요. 열망해서 얻은 것은 결국 우리의 손을 떠나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열망이 평생 지속되지는 않아요. 아무리 뜨거운 것이라고 해도, 충족되거나 계속 미뤄지면 옅어지기 마련이죠. 어쩌면 열망 그 자체보다 소유에 더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유에 집착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수집하고, 놓지 못하고. 그건 비단 예술품이나 사물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아요. 사람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열망했던 사랑도 언젠가는 우리 손을 떠나요. 알고 있어도 쉽지 않은 놓아줌! 작가는 어린 시절에 이런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평생을 수집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호지킨이 모은 이 작은 수집품들은 비록 아름답기는 해도, 의심할 바 없이 욕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지킨의 머릿속엔 투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는 겸손하고 진지했으며, 때때로 호텔 숙박부에 자신의 직업을 ‘조련사’라고 적는 장난스러운 사람이었다.(P56)

수집가 호지킨은 화가로서 자신의 경력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빼어난 안목으로 컬렉션을 구성한 사람입니다. 작가는 종종 호지킨의 컬렉션이 담긴 작은 카탈로그를 펼쳐보며 아름다움과 그의 안목과 태도에 감탄한다고 해요. 호지킨의 컬렉션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겸손하고 진지했다고 합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사람의 컬렉션은 어떠했을지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요. 컬렉션이 담긴 작은 카탈로그를 보고도 수집가의 겸손과 진지함을 읽을 수 있어야 진정한 수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엔 사람이 남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라는 소설에는 사람은 가고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이 남아 주인을 대신하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사물을 보며 그 사람을 추억하는 것도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쓰던 작은 만년필 하나가, 샤프 하나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할 수 있도록 잘 살아야겠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노트북의 자판을 오래 들여다봅니다.


수집과 미술, 예술에 문외한인 저는 책을 온전히 읽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느낍니다. 파리의 유명한 수집가들과의 추억과 그들의 컬렉션에 관한 부분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수박 겉핥기 식으로 느낀 책에서는 파리는 과연 예술의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도 자신만의 아틀리에가 있었고, 사람들이 대부분(작가가 만난 사람들) 열려 있어 사적인 자신의 아틀리에를 보여주고 공유해요. 수집해서 나만 보고 즐기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자신의 취향을 존중받는 문화 같은 것이 느껴졌죠. 예술의 도시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작가는 자신의 수집 품들을 팔아서 다른 수집품을 사기로 했는데, 가치를 알아보는 다른 주인에게 가는 것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인에게 판매한 것이라 필요할 때는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고 했어요. 수집품을 소유하기 위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 자신에게 잠시 머무르는 것처럼 대하는 자세가 그를 오래 수집가로 살게 한 모양입니다. 어린 딸아이를 업고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욕심 가득한 시선으로 에디슨을 설명했던 일이 이제는 아름답게 남았어요. 어쩌면 수집가란 예쁜 추억들을 모으는 사람이 아닐까요? 당신 주위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모아 보실래요? 이 책을 길잡이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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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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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를 통해서만 만나던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들이 실려있습니다. 답사기가 나오게 된 배경과 작가의 스승과 벗에 대해서도 나오죠. 함께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토론하던 젊은 대학생들이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오게 한 시대의 시정이었음을 깨달았죠. 우리는 모두 덕분에, 덕분에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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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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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는 시를 외우며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는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내 뜻과는 다르게 상업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죠. 공부는 재미없고 낯설고, 열심히 하고 싶지 지도 않았어요. 그때 우연히 읽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는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일상에 빵빵한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말이 바뀔 것 같지 않은 일상과 상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랑을 생각하게 했어요. 이후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향수처럼 지나온 시간들의 이정표처럼 남았죠. 결혼을 하고 어린 딸아이의 유모차를 끌고 영주 부석사를 다녀왔고, 경주 남산의 노을을 쳐다보며 내 느낌이 그와 같지 않아서 부족한 사랑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오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어릴 적 친구를 보듯 그의 책을 가만히 펼쳐봐요.


저자 유홍준은 1949년 서울 서촌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어요.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습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고, ‘한국 문화유산 답사회’를 이끌었죠.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정년퇴임 후 석좌 교수로 있어요.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국내 편 1~12편, 일본 편 1~5편, 중국 편 1~3편), <국토 박물관 순례> (1,2), 평론집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미술사 저술 <조선 시 대화론 연구>, <화인 열전> (1,2) 등이 있습니다. 제18회 만해문학상(2003년) 등을 수상했어요.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으로 나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에 관해 실려 있습니다.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담은 서문으로 시작해서 그간 써온 글들을 모아 주제별로 묶고 시의성이 있는 글들은 빼고 다시 조금 수정하거나 보충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인생만사와 문화의 창, 답사 여적, 예술가와 함께, 스승과 벗이라는 주제의 5장으로 분류했죠. 예술가와 함께 와 스승과 벗은 시대의 지성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장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비법도 궁금하고, 답사기가 나온 얘기도 궁금해서 얼른 책을 펼쳐요.


백남준의 말을 빌리든, 한 중년 신사의 고함을 인용하든, 현대 미술을 일컬어 사기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기란 정치꾼이나 장사꾼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애교 있고 악의 없는, 그래서 우리 정서 함양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사기이되 이유가 있는 사기인 것이다. (P49)

제1회 광주 비엔날레의 대상 설치 미술을 술 취한 할아버지가 너무 오래 관람하고 있어 할머니랑 실랑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맥주병 바다 위에 나룻배를 올려놓은 것으로 쿠바 난민들의 처지를 은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술 취한 할아버지는 맥주병만 뚫어지게 보고 있고,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향해 보면 알겠냐고 타박을 하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인생이란 맥주병 위에 떠 있는 빈 배란 말이 시.” 이 할아버지의 감상평에 미술평론가인 저자가 무릎을 꿇었다고 해요. 어찌 보면 미술이란 사기라고 하면서요. 미술 작품은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봐도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모른다고 말하기엔 내 부족한 미술적 소양이 드러나는 것 같아 말도 못 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읽으며 따라가보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마음이 아주 편안해집니다. 미술이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요. 내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애교 있고, 악의 없는 사기를 즐기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나 평가를 내려놓고서요. 가을이 펼쳐 놓은 아름다운 풍경화를 나만의 방식으로 오롯이 즐깁니다. 발에 밟히는 낙엽 소리, 바람 소리,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정지된 그림 같은 오후에.


‘서여기인(書如基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올곧게 일생을 살아온 동농 김가진은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지조가 있었다. (P224)

글씨를 잘 쓸 일이 없는 요즘에도 글씨가 곧 그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봐요. 그러다가 반듯하고 멋진 글씨를 보면 글씨 주인에게 호감이 갔던 일들이 떠올라 웃습니다. 글에 관심이 많아서 글쓰기에 관한 책을 조금 읽었던 적이 있어요. 글이 작가 자신이라는 말이 많았죠. 멋진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멋진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멋진 사람이 되는 일이 멋진 글을 쓰는 일보다 어려워 풀이 죽었죠.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 자체라는 말도 많습니다. 그 사람의 태도도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하죠. 글씨도 그 사람이라고 하니, 어디 가서 글씨를 쉽게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3대째 독립운동을 했고, 올 곳은 삶은 산 서예가 동농 김가진을 만난 것이 큰 수확이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동농 김가진 선생님의 지조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세상이 혼탁할수록 서예가도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눈부신 발전이 단순히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 눈부신 경제 발전 뒤에 시대의 지성으로서 자신의 몫을 감당했던 예술인들이 있었던 거죠. 문사로서의 품격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선생님이 계셨고, 독재에 맞선 뜨거운 청춘들이 있었고, 밤새워 논쟁을 벌이며 서로의 스승으로 함께 성장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대학생들의 토론 장면들이 부러웠어요. 지금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논쟁을 벌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있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희귀했던 것 같습니다. 안정적인 직장과 노후가 보장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학점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죠. 지금은 대학이 취업을 위해 거쳐가는 과정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대학이 해야 할 일들이 있을 텐데, 대학에서 고민하고 부딪히고 치열하게 방황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낙오자나 실패자라는 기분을 느끼게 되죠. 우리 이렇게 빨리 달려가서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문화 예술인들과 지성들을 만난 뿌듯함이 들지만, 나는 그런 어른으로 살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자각이 몰려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의 인생 만사를 고민하게 됩니다. 남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다음 세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고민이 깊어집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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