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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평점 :

중학교 때는 시를 외우며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는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내 뜻과는 다르게 상업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죠. 공부는 재미없고 낯설고, 열심히 하고 싶지 지도 않았어요. 그때 우연히 읽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는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일상에 빵빵한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말이 바뀔 것 같지 않은 일상과 상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랑을 생각하게 했어요. 이후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향수처럼 지나온 시간들의 이정표처럼 남았죠. 결혼을 하고 어린 딸아이의 유모차를 끌고 영주 부석사를 다녀왔고, 경주 남산의 노을을 쳐다보며 내 느낌이 그와 같지 않아서 부족한 사랑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오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어릴 적 친구를 보듯 그의 책을 가만히 펼쳐봐요.
저자 유홍준은 1949년 서울 서촌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어요.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습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고, ‘한국 문화유산 답사회’를 이끌었죠.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정년퇴임 후 석좌 교수로 있어요.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국내 편 1~12편, 일본 편 1~5편, 중국 편 1~3편), <국토 박물관 순례> (1,2), 평론집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미술사 저술 <조선 시 대화론 연구>, <화인 열전> (1,2) 등이 있습니다. 제18회 만해문학상(2003년) 등을 수상했어요.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으로 나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에 관해 실려 있습니다.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담은 서문으로 시작해서 그간 써온 글들을 모아 주제별로 묶고 시의성이 있는 글들은 빼고 다시 조금 수정하거나 보충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인생만사와 문화의 창, 답사 여적, 예술가와 함께, 스승과 벗이라는 주제의 5장으로 분류했죠. 예술가와 함께 와 스승과 벗은 시대의 지성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장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비법도 궁금하고, 답사기가 나온 얘기도 궁금해서 얼른 책을 펼쳐요.
백남준의 말을 빌리든, 한 중년 신사의 고함을 인용하든, 현대 미술을 일컬어 사기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기란 정치꾼이나 장사꾼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애교 있고 악의 없는, 그래서 우리 정서 함양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사기이되 이유가 있는 사기인 것이다. (P49)
제1회 광주 비엔날레의 대상 설치 미술을 술 취한 할아버지가 너무 오래 관람하고 있어 할머니랑 실랑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맥주병 바다 위에 나룻배를 올려놓은 것으로 쿠바 난민들의 처지를 은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술 취한 할아버지는 맥주병만 뚫어지게 보고 있고,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향해 보면 알겠냐고 타박을 하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인생이란 맥주병 위에 떠 있는 빈 배란 말이 시.” 이 할아버지의 감상평에 미술평론가인 저자가 무릎을 꿇었다고 해요. 어찌 보면 미술이란 사기라고 하면서요. 미술 작품은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봐도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모른다고 말하기엔 내 부족한 미술적 소양이 드러나는 것 같아 말도 못 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읽으며 따라가보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마음이 아주 편안해집니다. 미술이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요. 내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애교 있고, 악의 없는 사기를 즐기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나 평가를 내려놓고서요. 가을이 펼쳐 놓은 아름다운 풍경화를 나만의 방식으로 오롯이 즐깁니다. 발에 밟히는 낙엽 소리, 바람 소리,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정지된 그림 같은 오후에.

‘서여기인(書如基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올곧게 일생을 살아온 동농 김가진은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지조가 있었다. (P224)
글씨를 잘 쓸 일이 없는 요즘에도 글씨가 곧 그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봐요. 그러다가 반듯하고 멋진 글씨를 보면 글씨 주인에게 호감이 갔던 일들이 떠올라 웃습니다. 글에 관심이 많아서 글쓰기에 관한 책을 조금 읽었던 적이 있어요. 글이 작가 자신이라는 말이 많았죠. 멋진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멋진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멋진 사람이 되는 일이 멋진 글을 쓰는 일보다 어려워 풀이 죽었죠.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 자체라는 말도 많습니다. 그 사람의 태도도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하죠. 글씨도 그 사람이라고 하니, 어디 가서 글씨를 쉽게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3대째 독립운동을 했고, 올 곳은 삶은 산 서예가 동농 김가진을 만난 것이 큰 수확이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동농 김가진 선생님의 지조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세상이 혼탁할수록 서예가도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눈부신 발전이 단순히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 눈부신 경제 발전 뒤에 시대의 지성으로서 자신의 몫을 감당했던 예술인들이 있었던 거죠. 문사로서의 품격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선생님이 계셨고, 독재에 맞선 뜨거운 청춘들이 있었고, 밤새워 논쟁을 벌이며 서로의 스승으로 함께 성장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대학생들의 토론 장면들이 부러웠어요. 지금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논쟁을 벌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있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희귀했던 것 같습니다. 안정적인 직장과 노후가 보장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학점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죠. 지금은 대학이 취업을 위해 거쳐가는 과정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대학이 해야 할 일들이 있을 텐데, 대학에서 고민하고 부딪히고 치열하게 방황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낙오자나 실패자라는 기분을 느끼게 되죠. 우리 이렇게 빨리 달려가서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문화 예술인들과 지성들을 만난 뿌듯함이 들지만, 나는 그런 어른으로 살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자각이 몰려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의 인생 만사를 고민하게 됩니다. 남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다음 세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고민이 깊어집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