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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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포장을 풀어 본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예쁜 편지에 내 이름이 쓰여있었고, 내용도 따뜻하고 좋았어요. 생각을 해보게 하는 제목도 좋았고, 무엇보다 박완서라는 작가님이 좋았습니다. 띠지의 함박웃음 짓고 있는 작가님처럼 나도 웃으면서 책을 펼쳐요.


박완서 작가님은 1931년 개풍군에서 태어나 소학교 입학하기 전 서울로 상경했어요. 숙명여고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1953년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고,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불혹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어요. 이후 2011년 1월 담낭 암으로 타계하기까지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며 40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이ㅣ 장편소설을 포함, 동화, 산문집, 콩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각종 문학상을 받았고, 2011년 타계 후에는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어요.

책은 미출간 원고 포함해서 46편의 에세이가 3장으로 나뉘어 실려 있습니다. 미출간 원고는 님은 가시고 김치만 남았네라는 제목으로 박경리 작가님을 그리워한 작가님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어요. 오래전 원고라 시대 상황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글의 마지막에 글 쓴 연도가 쓰여있어요. 3부로 나눠있지만 46편의 에세이가 그냥 박완서라는 사람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고, 주위 사람들과는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왔는지를 모두 알 수 있어요. 미출간 원고라는 강력한 이끌림으로 책을 마중 나갑니다.


어둠은 탄(炭) 가루처럼 호흡을 압박하고 스며들어 깊이 모를 절망을 만들었다. (p45)

산속을 걸으면 겨울에도 쿠션을 밟는 것처럼 탄력이 있었고 봄에는 산이 아기처럼 새근새근 숨 쉬는 것을 닳아빠진 고무신 바닥을 통해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p67)

가끔씩 책을 읽을 때면 착각을 하게 됩니다. 문장이 너무 쉽고 잘 읽혀서 나도 써볼까 하는 착각이죠. 적확한 표현, 쉬운 문장과 흐름은 뛰어나게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건데, 잘 알지 못하는 아마추어는 쉽게 생각하고 덤비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런 문장들을 읽게 되면 감탄하면서 좌절하죠. 어둠을 한 문장으로 표현했는데, 감정까지 느껴지다니. 그리고 심지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어둠이 생생하게 잡힙니다. 말로만 듣던 내용을 실제로 발견해요. 좋은 글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쓰는 글이라는 말을요. 그리고 두 번째 문장도 느낌까지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닳아빠진 고무신 바닥을 통해서 느끼는 흙의 생명력이 마치 지금 내 발에도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검정 고무신을 딱 한 번 신었던 기억이 있어요. 가난한 산골의 아버지 없는 살림이었으니 고무신은 바닥이 구멍 난 채였습니다. 구멍 난 고무신을 신고서도 산골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신발을 신었지만, 땅의 모든 것들이 맨발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나 어느 날 물컹한 것을 밟았는데, 지나가던 뱀이었죠. 엄지발가락 쪽이 구멍 나 있어서 뱀을 밟았던 섬뜩한 기억이 떠올랐어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산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의 한 장편 같은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글을 통해서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언어와 글로 어린 시절을 그려낼 수 있기를 욕심내면서 밑줄을 세게 그어요.


우선 일과의 싸움, 어제의 노고를 무(無)로 돌리고 밤사이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와 쌓여 있는 여자의 일, 또 일. (p250)

작가님이 살았던 시대에는 더 가부장적이었겠죠. 결혼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에만 평생을 보낸 작가님입니다. 시어머니와 남편, 자녀들까지 식구가 모두 일곱입니다. 일곱 명을 먹이고 입히고 하려고 얼마나 많은 일들이 생길까요? 그러면서 밤잠을 아껴 글까지 쓰시다니, 존경스러워요. 글도 그냥 대충 쓴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다작하는 부지런함이 부러움은 감히 갖지도 못할 정도로 대단해 보입니다. 어제의 노고를 무로 돌리고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와 쌓이는 일들. 집안일이라는 것이 그래요. 분명 분주하게 매일매일 하지만 티는 나지 않고 바쁘기만 하죠. 그러다가 하루라도 건너뛸라치면 어김없이 존재를 드러냅니다. 오늘 치의 일을 하지 않았다고요. 이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날은 언제일까요? 아이들이 모두 결혼하고 난 후? 그때도 일은 줄어들 뿐 없어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해방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보다는 적당히 일과의 싸움을 무승부로라도 만들 수 있게 타협하는 것이 좋겠어요. 너무 깔끔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 끼 정도는 가볍게 먹어도 된다고, 빨래는 다른 가족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타협을 시도해 봅니다. 물론 혼자만의 타협이지만. 이 문장을 고른 것은 무릎을 칠 정도의 탁월한 표현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가에게도 집안은 똑같이 주어지는구나 싶은 위로를 느껴서입니다. 처음에는 위로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좌절이 되는. 가족도 많고, 가전제품도 지금보다 많지 않고, 좋지도 않았는데 아이들도 잘 키우고 글까지 잘 쓰는 사람이라는 현타가 왔기 때문이죠. 하!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지만 좋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책은 일단 제목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염두에 두고 편집된 것 같은 구성도 좋아요. 작가님이 직접 살아계셔서 지금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작가님 생존의 최근 것에서부터 과거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처음 부분에서는 작가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고,(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시대 상황을 잘 알 수 있어요. 연도를 표기한 것도 좋습니다. 50년 정도 과거의 이야기지만, 사람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때도 부자들의 모습은 지금이나 비슷하고, 먹고사는 이야기는 시대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죠. 다만 김장을 담그기 위해 며칠을 시장에서 발품을 팔아 배추를 사 오는 얘기는 시대를 느끼게 했어요. 장발족과 미니스커트 단속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도 좋아요. 자녀들에 대한 교육 철학도 좋습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모두 이루어 주고 싶은 과한 혼수 얘기도 지금 들어도 맞는 말씀이죠. 작가님이 싫어하는 여자의 유형이 나올 때는 바짝 긴장하면서 읽었습니다. 혹시나 제가 해당되는 것이 있을까 봐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자기 연민적인 내용이 없이 어른인 여성들이 조금 더 성숙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이라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서 더 당당히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멋져요. 페미니즘을 부르짖지는 않지만,(결국 페미니즘은 남녀의 구분을 두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간으로 동등한 것이죠)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생각하게 되죠.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에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읽어보고 싶다고요. 그래서 독서 모임에 추천할 생각입니다. 작가님의 생각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요. 좋은 책입니다.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여러분 모두 함께 읽어요. 그리고 느껴보고 생각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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