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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그림 읽기 - 고요히 치열했던
이가은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5월
평점 :

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선택했습니다. 고요하고 치열했던 사적인 그림 읽기라는 제목 아래 빌헬름 함메르 쇠이의 실내라는 작품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어요. 정말 고요히 책을 읽는 듯한 여성의 뒷모습에는 왠지 모를 치열함이 보이는 것 같아요. 남들이 보면 모두 고요한 인생이지만 내게는 치열한 인생이 되는 삶에 쉼표 하나 찍듯이 책을 펼칩니다.
저자 이지은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해요. 어릴 적부터 소통의 도구인 언어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고,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까지 마쳤죠. 이후 서양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역사와 미술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요. 현재는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어요. 1부는 외롭지 않은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고독이 꼭 외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죠. 시작은 비 오는 날부터 시작합니다. 2부는 아름답게 치열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경쟁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3부는 고요히 바라보는 시간을 주제로 남의 나라를 그리워한 모네의 런던 템스강 연작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요하고도 치열했던 그녀의 그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준비물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저 고요한 시간만 내어주세요.

‘어디로든 가보자’던 운전 선생님의 말처럼, 무조건 고삐부터 잡아든 샹젤리제의 여인처럼, 이 갑갑함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마차든 자전거든 롤스로이스든 일단 올라타 달리는 것뿐이었다. (p48)
장롱면허를 과감하게 꺼내들게 한 것은 한 드라마 속 대사였다고 합니다. 운전을 하면 다정해진다는... 왠지 그 말이 알 듯 모를 듯 다가왔어요. 저 역시 장롱면허를 아직도 가지고 있거든요. 자신의 공간을 확장하면 시야와 생각이 확장된다고 합니다. 물론 저는 경험해 본 적 없어요. 여행 작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지만, 간접경험일 뿐입니다. 여성이 거리로 나서는 것도 쉽지 않았던 19세기 초반을 지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파리는 도시 개조 사업을 통해 오늘날의 세련된 외관으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거리들이 정비되고 아름다워 지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산책이 붐을 일으킵니다. 여성들도 산책을 나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후 자전거의 발명과 대중화를 거쳐 여성들의 옷차림도 자전거를 타기 쉬운 바지 형태로 바뀌기도 하죠. 그림에 나오는 여성들은 마차를 몰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마차를 모는 것은 쉽게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뒤편에는 만약을 대비해 남자 운전수가 타고 있는 모습도 보여요. 하지만 그녀들은 자유롭고 진취적인 모습으로 마차를 직접 운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기 보다 올라타고 달리는 용기가 부러웠어요. 차가 있고(물론 남편의 차지만) 면허도 있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어디로든 가보자 하는 용기가 없어요. 그림을 보고 자신의 운전 연수를 생각한 작가는 이제 자가운전자가 되어 어디로든 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그림 속 여성들을 보면서 부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합니다. 저, 시작할 수 있을까요?

스캔들이나 트라우마의 그늘 아래 파묻혀 있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자신의 어두운 경험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시켰다. (p164)
아르테미시아 젠탈레스키는 17세기 초중반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흔치 않은 이탈리아 여성화가입니다. 그녀는 재능으로 인정받아 여성 처음으로 예술가 길드인 아카데미아 디 아르테 델 디세뇨의 높은 벽을 뛰어넘었죠.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작품에 화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성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죠. 그녀는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최초의 작가입니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스캔들로 얼룩지고, 긴 재판을 받은 후 도망치듯 결혼하고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오게 됩니다. 남성 화가들이 홍보 수단으로 그림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 경험들을 과감하게 작품에 개입시키죠.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담대한 그림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어요. 그중 그녀가 자주 그리고 인상 깊은 작품은 유디트에 관한 것입니다. 유디트는 조국을 정복한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 페르네스를 미인계로 유혹하고 그의 목을 칼로 베어버린 신화적인 인물이죠. 특히 젠탈레스키의 유디트는 과감하고 힘이 있는 동작들로 섬뜩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 유디트의 얼굴은 작가 젠탈레스키의 모습이죠. 그녀가 베어버리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적장을 목을 베는 것 이상의 결기가 그녀의 그림에는 흐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여성은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는 특히나 더 했겠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작가가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얼마나 치열하게 장애물들을 베어냈을까요? 오래전 그녀가 제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결연하게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물론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는 일상이지만, 일상에서 여성으로서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습니다. 단단하게 칼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보면서요.

당신의 봄도 눈을 맞으며 왔다. 당신의 겨울이 몹시 추웠던 만큼 그 봄은 유난히 더 따뜻하리라.(p 265)
삶이 비극적이었으나 사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고흐에 대해 나오는 부분입니다. 고흐식 화풍이 자리 잡기 이전에 그려진 그림이죠.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에서 반 고흐는 약 1년간 300점을 그리며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축했습니다. 자신의 공허를 가족과 친구들, 연인들에게서 찾으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신께 의탁하려 했으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텅 빈 마음을 그림으로 채워야겠다는 생각 없이 그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죠. 그러다 그림을 통해 잠시나마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아를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강렬한 태양을 찾아 떠난 것이죠. 하지만 때에 맞지 않게 따뜻한 지중해 연안 도시인 아를에 많이 눈이 내렸고, 그 눈을 그리며 고흐는 자신만의 봄을 기다리고 희망을 품습니다. 자신의 뒤틀린 내면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는 강렬한 붓 터치에도 보이죠. 또한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지만, 늘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동생과 나눈 편지글에서 작품에 대한 해석과 그림을 그리된 이유가 나오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이 눈 덮인 아를을 보면서 고흐는 자신의 봄을 기다린 것은 아닐까 하고 작가는 말합니다. 고흐의 간절함보다는 덜 하지만 자신도 겨울을 지나온 적이 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겨울이 힘들고 어렵고 춥지만 반드시 끝나고 봄이 온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적으로 견뎠다고요. 초기 우울한 색채는 강렬한 색채로 바뀝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해바라기나 밤의 카페테라스는 선명하고 밝아요. 고흐는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소망과 희망을 실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흐의 인생을 모른다면 그림은 아주 희망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이 힘겨운 가운데서도 그림을 통해 봄을 노래한 고흐를 조금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희망을 그리며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기를 원했던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행복했기를 바라봅니다.
책은 역사를 전공한 작가의 시선이 그림과 함께 어우러져 다양한 색채를 발합니다. 우산을 쓴 여인들을 그린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우산의 역사적 과정을 이야기해요. 어디서도 들어보기 힘든 사실이죠. 또한 그림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와 적절하게 연결하여 말하기도 하고, 사적인 자신의 감상평을 더하죠. 그림에 대해 잘 아지 못하는 저는 그림을 보면서 자전거의 발전상을 알게 되기도 하고, 밀로의 비너스상을 통해 담고 싶은 여성상을 보기죠 했습니다. <피아노 치는 리스트> 그림을 통해 원조 아이돌의 탄생도 재미있게 배우고, 실제로 얼마나 잘 생겼는지 그림이 왜곡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어요. 시대와 남성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을 드러낸 젠틸레스키는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아름다웠던 클로드 모네의 짝사랑이 묻어나는 런던 템스강 연작도 좋았어요. 코로나 시대에 주목받았다는 호퍼의 작품을 알게 되어 좋았고, 세밀한 영국 시골 풍경을 그렸던 존 컨스터블의 <플랫 토드 물방앗간>도 인상 깊었습니다. 무슨 설명이나 배경지식 없이도 그냥 그림만 봐도 이해되는 그림이었거든요. 생제르맹 성당의 <죽음의 무도>를 통해 일상 가까이 있는 죽음을 그림으로 만나기도 했죠. 사적이지만 깊이 있는 책이고, 무엇보다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갖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내 삶은 내게만 치열하죠.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평범함이 됩니다. 내게만 치열하고 고요한 삶을 이 책과 함께 건너보시길 권합니다. 아주 사적이지만 시대를 건너는 지혜를 발견하고, 웃음 지으며 희망을 보게 될 테니까요. 고흐의 강렬한 해바라기 전에 아를의 눈 덮인 들판이 있었음을 알게 될 겁니다. 오늘 보이는 것이 그것 하나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제의 고요하고 치열했던 누군가의 삶이 있었음을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될 거예요. 그림과 함께 이어지는 역사는 보너스치고는 꽤 두둑하지만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