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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4월
평점 :


벚꽃이 흩날리는 풍경도 글이 되면 딱딱하고 죽어 있는 느낌입니다. 어떤 단어를, 어떤 감정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고른 책입니다. 꽃보라 날리는 4월이 달포 가량 지났지만, 초록은 한물인 5월에 초록 바탕의 책이 인사를 건네듯 제게 왔습니다.
저자 박영수는 테마역사 문화역 구원 원장으로 30년 동안 동. 서양의 역사, 문화, 풍속, 인물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어 어원과 문화 관습 유래를 필생의 목표로 삼고 꾸준히 근원을 추적하고 있지요. 저서로는 <우리말 어휘력 사전>, <기억해야 할 세계사 50 장면>,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의 세계사>, <경복궁의 동물과 문양 이야기>, <어린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 <조선 시대 왕>, <색채의 상징, 색채의 심리>등이 있습니다.
책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날씨, 풍경과 관계된 말이고, 2장은 음식, 식욕과 관계된 말에요. 3장은 심정, 기억을 나타낸 말이고, 4장은 성질, 품성과 관련된 말입니다. 5장은 인체, 외모와 관련된 말이고, 6장은 움직임, 행위를 나타낸 말이죠. 7장은 말, 입으로 하는 걸 나타낸 말이고, 8장은 상태를 나타낸 말입니다. 9장은 생김새와 모양을 나타낸 말들이 10장에는 냄새, 소리를 나타낸 말들이 실려 있어요. 11장은 곳, 자리를 나타낸 말, 12장은 시간, 거리를 나타낸 말이, 13장은 물체를 나타낸 말이, 14장은 마지막으로 그 밖에 알아 두어야 할 우리말이 실려 있습니다. 점점 갓밝이(날이 막 밝을 무렵) 시간이 길어지는 요즘에 책을 만난 것이 감사합니다. 언어는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했던가요? 현상은 있으나 이름 없이 흘렸던 일, 감정, 시간들이 제 이름표를 달기 시작합니다. 준비한 이름표가 넉넉하니 마음이 부자가 된 것 같아요. 함께 이름표를 달러 가 보실까요?
“당면뿐인 잡채와 삶아 누른 돼지고기가 두어 자밤씩 올라 모양만 냈던 듯한데......”
-이문구, <우리 동네> p48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실제 그 단어가 쓰인 문학 작품이 함께 실려 있고, 이후에 해설이 실려 있죠. 자밤은 나물이나 양념 따위를 손가락 끝으로 집을 만한 분량이라고 합니다. 흔히 요리 프로그램에서 꼬집이라고 쓰는 양 정도라고 합니다. 꼬집보다는 자밤이라는 말이 왠지 따뜻하고 정감이 갑니다. 다물어지는 입모양이 발음하기도 쉽고요. 단어의 뜻을 알게 되면 소설 속 문장이 단번에 눈앞에 그려집니다. 겨우 흉내만 낸 돼지고기 몇 점이 올려진 잡채가 정성스럽지만 가난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자밤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면 이 문장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몰랐던 단어 하나가 눈을 밝혀주듯 문장 사이를 비춥니다. 당신의 하루에 한 자밤 정도의 웃음이 있기를 소망해요. 한 자밤의 웃음이 오늘을 행복으로 물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매우 어색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걸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 후자처럼 ‘남과 잘 사귀는 솜씨’를 가리켜 ‘너울가지’라고 한다. (p89)
너울가지는 한자어 사교성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포용성과 붙임성까지 담고 있는 우리말이라고 해요. 사교성보다는 너울가지 좋은 사람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품는 포용성과 상대를 적이 아니라 친구로 보는 붙임성까지 있다면 인간관계가 훨씬 수월하고,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너울가지 좋은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나도 너울가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도 했어요.
“잠깐 고개를 들고 방시레 웃었다.”
-채만식, <얼어 죽은 모나리자> p128
방시레는 소리 없이 입을 예쁘게 벌리고 밝고 보드랍게 살그머니 웃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왠지 설명이 없어도 ‘방시레’라는 세 글자에 모두 담긴 듯해요. 방시레 웃는 천사 같은 아기, 방시레 웃는 처녀의 수줍음 등이 생각나는 글자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웃음을 표현하는 글들은 틀에 박힌 듯 정형화되어 가요. 웃음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하하, 호호’ 등이 많이 쓰이고, 의성어를 빼고는 ‘크게 웃었다. 혹은 소리 없이 웃었다’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글에도 효율성이 크게 지배하는 것 같고, 우리 사회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글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은 많지 않거든요. 물론 저의 좁은 독서로 보편화하면 안 되겠지만, 사람들을 계속 무언가를 하라고 부추기는 자기 계발서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냥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위로서가 많으니까요. 방시레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뉴스에도 자주 나왔으면 좋겠고, 책으로 자
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이유 없이 방시레 웃어주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도 웃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적바림’은 나중에 보려고 간단히 적은 글이나 그런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p179)
다른 말들도 처음 들어 본 것이 많지만, 워낙에 메모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요즘 적바림은 정말 생소한 말입니다. 이 책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말이죠. 물론 저자의 깊은 독서와 연구로 인해 홍명희의 <임꺽정>의 한 예문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요. 굳이 찾아 읽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낱말입니다.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상인들 사이에서 비전이 통용됐는데, 돈을 한곳에 맡겨 두고 지급할 일이 있으면 돈과 바꾸어 갈 수 있는 적바림을 만들어 주는 것이 환 어음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주막의 외상 술값을 적바림하는 일이 많았고, 낯선 곳을 찾아갈 때 주소나 특징을 적바림하기도 했다고 해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적바림을 잘 해야 합니다. 순간 찾아오는 실 같은 생각을 잡아 글자로 묶어두어야 하니까요. 그 생각은 찰나에 흩어져서 연기가 되기 일쑤죠. 또 우리말 ‘찌’가 있어요. 찌는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글을 써서 붙이는 좁은 종이쪽을 가리키는 우리말입니다. 영어의 포스트잇이 있죠. 영어보다는 우리말을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간간이 들어 본 말이 있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낱말들이 상황에 따른 예시문과 함께 친절하게 실려 있습니다. 날씨, 음식, 시간, 상태, 움직임, 냄새, 소리 등 모든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말들이 나란히 줄 맞추듯이 실려 있어요. 순서에 따라 읽어도 좋고, 마음이 가는 대로 골라 읽어도 좋습니다. 비온 뒤 맑은 하늘과 바람을 느끼며 날씨와 관련된 말을 읽어도 좋고,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읽어도 좋아요. 콩켸팥켸 읽어도 좋고, 열심을 내서 애면글면 읽어도 좋지요.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우리말을 아는 만큼 나의 세계도 넓어진다.” 와우!!! 조금이라도 나의 세계가 넓어진다니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를 생각하며 우리말에게 미안하기도 했지요. 따로 정리해서 적고 외우고, 가지고 다니면서 외웠던 영어 단어들. 이 책의 낱말들도 그렇게 외우고 써 봐야지 하고 다짐했어요. 정리된 것을 눈으로 읽어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밭에, 머릿속에 심어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해그름(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때)에 퍼르퍼르(가벼운 물체가 바람 따위에 살짝 날리거나 떨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하게 날리는 꽃보라를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말 쓰기의 꽃등(일등)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이제 당신의 세계를 넓히는 일에 함께 도전해 보실래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