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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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어서 줄거리도 생각나지 않는 <흰 소가 끄는 수레>로 작가를 만났습니다. 번뜩이는 재치와 맞춤 맞은 문장들이 느낌으로만 남아있지요. 그 박범신 작가의 산문집이라니 아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작가의 근원 같았던 히말라야의 봉우리와 은은한 푸른색의 표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요. 순례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작가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펼칩니다.


저자 박범신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흉기>,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빈방>등이 있고, 장편 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촐라체>, <고산자>, <은교>, <외등>, <소금>, <소소한 풍경>, <당신>, <유리>등 다수가 있고 산문집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힐링>등이 있어요. 작가 데뷔 50년 차에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니 작품을 열거하는 것도 쉽지 않네요. 신들린 듯 쓰던 소설을 1990년대 절필 선언을 하기도 했죠. 그 후로 자연 속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채워 3년 만에 돌아와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책은 앞부분의 두 장 <비우니 향기롭다>와 <카일라스 가는 길>은 오래전 책으로 펴낸 적 있는 순례기를 삼분의 일로 줄이고 목차를 새로 만들고 군데군데 보완한 것들이죠. 뒷부분 2장 <산티아고 가는 길>과 <폐암 일기>는 비교적 최근에 쓴 원고들이라고 합니다. ‘순례’라는 주제를 앞세워 두 그룹의 원고를 합쳤더니 제목에 합당한 자연스러운 하나가 되었다고 해요. 글 쓴 시기는 다르지만 평생 그리워 한 걸음으로 걸어온 나날들이 맞춤하니 한통속이라 어색하지 않다고 하네요. 존재에 대한 갈급한 질문으로 길을 걸어온 저자의 길을 따라 히말라야로 가 봅니다.


정복하는 게 아니라 낮은 어깨와 고요한 걸음새로 그이의 품속에 깃들어 마침내 존재의 사원에 닿고자 하는 꿈이 순례의 본뜻이라 할 것입니다. (p21)

등산의 개념은 서양에서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본래 산을 정복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더불어 사는 것, 덕을 베푸는 것으로 보았다고 해요. 그러니 지금 우리의 등산은 본래 우리 문화와도 맞지 않습니다. 히말라야의 산길을 걸으면 정복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죠. 고소증에 시달리며 자신의 배낭을 메고 가는 길에서 속도나 정복을 말할 수가 없죠. 그 길을 오래 다녀온 저자의 순례에 대한 정의입니다. 낮은 어깨와 고요한 걸음새로 산의 품속에 깃들어 존재의 사원에 닿고자 그는 자주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존재의 사원에 닿고자 하는 소망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꿈이라고 표현했어요. 꿈처럼 닿기 어렵다는 것인지, 꿈처럼 계속 품게 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꿈으로 그는 자주 히말라야를 서성거렸습니다. 낮은 어깨와 고요한 걸음새로요. 히말라야를 걸을 수 없다면 동네 뒷산이라도 저자처럼 걸어볼 일입니다. 낮은 어깨와 고요한 걸음새로. 걸음을 통해 내 숨소리와 발작 소리에 집중하면서 존재의 사원에 다가가는 걷기를 해 봐야겠습니다. 작가처럼 치열하진 않더라도 혹시 내 존재의 사원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도에 따라 마치 음계를 짚듯 탁, 탁, 탁, 내려서는 태양빛의 하강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p109)

산들이 워낙 높아서 눈으로는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럴 때 아침 태양빛은 정확하게 음계를 짚듯이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밝히면서 햇빛의 화관을 씌웁니다. 음계를 짚듯 탁, 탁, 탁 이 글자에 모든 광경이 그려집니다. 문장이란, 묘사란 이러해야 한다고 느껴요. 구구절절 쓰는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상황에 맞춤 맞는 말들을 찾아내서 쓰는 것. 그 문장으로 인해 저저와 함께 그 경이롭고 황홀한 일출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고소 증도 없이, 따뜻한 방에서도 날카로운 히말라야의 바람과 일출을 경험해요. 해발 몇 미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문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눈앞에 펼쳐지는 일출의 광경에 마음을 온통 빼앗깁니다. 차라리 사진이 없는 것이 더 좋아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문장을 통해 상상한 히말라야의 아침은 햇살의 화관을 쓴 흰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왠지 입김이 날 것 같기도 해요. 이제 일출은 음계를 짚듯이 탁, 탁, 탁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나의 문장들은 꿈꾸던 대로 과연 생의 중심을 꿰뚫는 창이었던가. 세상에 소음을 더 보탠 것은 아니었을까. (p201)

해발 5,630미터 돌마라 정상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쓰여 있는 문장입니다. 돌마라 계곡은 해탈의 고개이면서 죽은 자의 업을 씻을 수 있는 고개로 알려 있어요. 그래서 죽은 자의 옷이나 유품을 놓고 가기도 하고, 병든 가족들의 옷과 신발, 머리카락을 가져와 놓고 가기도 하죠. 세월에 해진 신발과 옷가지들이 바람과 함께 스산하게 머물고 있는 돌마라 계곡을 지나면서 저자는 자신의 문장을 생각합니다. 생의 중심을 꿰뚫는 창으로 소임을 다했는 거던 것인지 아님 세상에 소음을 보탠 것처럼 돌마라 계곡의 유류품이었는지를요. 문장은 작가를 떠나는 순간 독자와 함께 새롭게 해석되는 해석의 장으로 들어간다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니 그의 문장도 독자들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날카로운 창이 되었을 거라 믿어요. 그러니 그렇게 오랜 시간 젊은 작가로, 현역 작가로 그를 살게 했겠지요. 하지만 본인 안에서 늘 놓지 않았던 끈질긴 질문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왔음을 믿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편하게 살지 않고, 늘 자신의 본질적 존재에 대해, 문장에 대해 고민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왔으니까요.


작가의 젊은 날의 순례길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있는 아내를 만납니다. 그가 그렇게 떠나 떠돌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돌아올 집과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면서요. 늘 길이고 바람이고 싶었던 사람을 그답게 살게 한 것도 아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를 본래의 그 자신으로 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이 생각났지요. 그는 그 사랑으로 오래 떠돌고, 죽을 만큼 힘든 고소의 증상도 이기고 자신이 가고 싶었던 길을 걷습니다. 그것이 정복의 희열을 주지는 않았지만, 돌아와 이야기를 쓰는 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50년을 작가로 산 사람의 문장은 수다스럽지 않아서 힘이 느껴졌어요. 요란한 묘사나 감정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쓴 문장들이 더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엉뚱하게도 히말라야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다가 이내 포기합니다. 1시간 이상 걷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무슨 히말라야냐고요. 책을 읽으면서 히말라야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그의 문장은 역할을 다 한 것 같습니다. 카일라스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는 사람들보다는 자기 자신을 만납니다. 더 깊이 자신을 만나고, 함께 걷지만 혼자 걷고 혼자 걷지만 함께 걷는 공동체를 말해요. 너무 부산스럽고, 함께라는 말에 맹목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들을 더 많이, 더 자주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잠시의 침묵이나 홀로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불안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봐요. 책을 읽으면서 고독하게 걸으면서 자신의 존재로 가닿는 저자를 따라 저도 제 내면을 들여다본 느낌입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잠깐의 용기만 있다면 굳이 히말라야가 아니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다고 생각될 때,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할 때, 혼자 조용히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 꺼내 보면 좋을 책입니다. 히말라야와 카일라스와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만나는 것은 보너스입니다. 맞춤 맞은 문장으로 만나보는 자연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줄 거예요.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가볍게 걷는 것이, 더 높이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말라야에서는 배낭의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10분의 1일이 적당하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의 배낭은 몇 킬로그램이나 돼 나요? 하나씩 비우며 나를 만나러 가는 길, 그것이 순례이지 않을까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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