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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를 극복하는 법 -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치유의 심리학 ㅣ 오렌지디 인생학교
인생학교 지음, 신소희 옮김, 알랭 드 보통 기획 / 오렌지디 / 2023년 3월
평점 :


인생 학교의 첫 작품 <사유 식탁>을 읽었습니다. 요리책인 듯 요리책이 아닌 것 같은 기억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풍경처럼 남은 책이었어요. 그 기억으로 선택한 책입니다. 물론 분량이 많지 않다는 것도 큰 몫을 했지요. 어릴 때 한 번쯤은 꼭 이렇게 그려봤을 법한 그림이 실린 표지가 귀엽습니다. 공주와 왕자, 색색의 하트까지 6~7살이 그린 그림이 어린 시절로 소환하는 마법을 부립니다. 그때, 나는 어떠했을까요?
인생 학교는 알랭 드 보통이 주축이 되어 만든 프로젝트 학교입니다. ‘배움을 삶의 한가운데로’라는 모토 아래 2008년 런던에서 처음 문을 열었죠. 암스테르담, 베를린, 파리, 상파울루 등에 분교가 있습니다. 삶의 본질과 연결된 다양한 질문을 묻고 토론하죠. 공식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어요.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과거를 이해하는 실마리로 유년기를 다루고 있고, 2부는 유년기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다루고 있죠. 마지막으로 3부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또는 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냥 좋았던 것 같은 유년기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불안과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지금의 저를 보며 살짝 두려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깁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마음의 일부는 외부 환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지, 과거의 방어 수단으로는 막아 낼 수 없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날 상대나 상황 앞에서도 과거의 전략을 고수하려 한다. (P23)
우리는 모두 유년기를 건너 왔어요. 몸도 마음도 커졌다고 생각하고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이 내 몸에, 마음에 무의식처럼 남아서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어린아이처럼 반응해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내면 아이가 역효과가 날 상대나 상황 앞에서 강력하게 힘을 발휘합니다.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시간이 지나면 머리를 쥐어뜯을 행동들을 하는 거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채요. 물론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들여다 보기를 연습한 사람들은 조금 더 일찍, 자주 깨닫고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만 자신만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과거의 방어 수단이라는 것이 어린 시절의 것임에도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삐지거나 화를 내거나 말을 하지 않는 것들이죠. 얼마나 유치하고 어이없는 것입니까? 하지만 정작 본인 잘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패턴을. 그래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죠. 나를 사랑하듯 가까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소통하며 살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 시작이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겁니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은 서글픈 이유로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이 불쾌할까 봐 두려워서 거짓말을 한다. (P39)
지나치게 상대의 기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상대가 화가 나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됩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하고 싶은 말들을 많이 참아요. 남편이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치는 게 싫고 기분 상하는 게 두렵습니다. 기분이 상하면 상대보다 제가 더 힘들기 때문이죠. 남편의 눈치를 계속 살피고, 내가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척을 합니다. 그것이 서글픈 거짓말쟁이 같아서 밑줄을 긋고 몇 번을 읽었어요.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제 모습도 어린 시절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늘 큰소리를 내며 싸우시던 할아버지와 삼촌 때문이었는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의 보호자는 연약한 엄마밖에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이 분명하게 제게 남아 있음을 느껴요. 갈등이 될 만한 상황을 피합니다. 언쟁이 생겨 목소리가 높아지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가슴이 두근거려요.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인해 늘 약자가 됩니다. 관계에서도, 집안에서도. 이제 문제를 인색했으니 더디지만 힘겨운 나아짐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분명히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노란 속지를 품고 있는 책을 응원 삼아서요.
위로는 인간이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정다운 행위다. 위로는 사랑의 핵심에 가까우며, 죽고 싶다는 욕망과 그럼에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르는 차이를 만든다. (p106)
이 책을 통해 단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단연 이 문장입니다. 위로에 대한. 위로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책을 읽기도 했죠. 위로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 주는 것이다, 힘들 때 안아주는 것이다, 상대의 슬픔을 온전히 공감하는 것이다 등의 말을 들었지요. 하지만 이 문장이 최고입니다. 인간이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정다운 행위라는 위로 가요. 사랑의 핵심에 가까우며 죽고 싶다는 욕망과 그럼에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르는 차이를 만드는 위로. 이런 위로를 하고 살고 있었나? 이런 위로를 받아 봤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에게 이런 위로를 전하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욕심냅니다. 지나온 시간 엄마가 처음이라 실수하고 모자라고 상처도 많이 줬겠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위로를 건네는 엄마이고 싶다는 욕심.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말처럼 나를 먼저 위로하고 싶습니다. 괜찮다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어머니의 힘겨움을 들어주고 싶어 늘 동생들과 할아버지를 챙기며 집안일을 했던 어린 나에게도 고생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아픈 몸을 가진 채로 꿈을 꾸며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자신에게도요. 비록 그것이 성과도 없고, 소진되고, 몸도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으로 인해 삶이 더 다채로워지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크게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더 좋아질 거야’라고.
책은 생각했던 대로 불편합니다. 지나온 유년기와 제가 양육자로 놓쳤던 유년기가 생각났으니까요. 좀 더 혜택받은 사람으로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 또 잘하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은근히 조정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했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합니다. 일단 마음으로 인정이 되지 않아 글로 인정합니다. 말로 인정하고, 연습하며 인정하다 보면 인정하게 될 겁니다. 어느 날 선물처럼 아무렇지 않게. 저의 어린 시절이,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잘못된 저의 양육방식이.
말 잘 듣는 아이가 위험하다는 글을 읽고는 힘들었습니다. 아픈 손가락 같은 큰 아이가 말 잘 듣는 아이였고, 지금도 말 잘 듣는 아이이니까요. 늘 자신감이 떨어지고, 의욕도 없는 모습이 나로 인한 것은 아닌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책이 문제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비록 더디고 힘들고 어렵지만 분명히 나아질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거든요. 정서적 성장과 심리치료와 다정한 자기 위로를 통해서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주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지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자신을 어둠에서 구원하듯이 자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기 스스로가.
이해를 바라지도 말고, 효율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인 존재에 대한 긍정과 사랑이 나를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줍니다. 기억은 왜곡되어 온통 꽃밭 같지만, 그 꽃밭 속에 벌도 있었고, 심지어 뱀도 있을 수 있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얇고 작은 책 한 권이요. 여러분은 어떤 유년기를 건너오고 계시나요? 세상 다정한 위로를 품은 이 책을 들고 용기 있게 만나러 가보시길 바라요. 그 꽃밭에 무엇이 있을지는 가봐야 아는 거니까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