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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평점 :


요즘 들어 책을 선택하는 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제목입니다. 이 책도 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읽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선택했어요. 도대체 이런 제목의 책은 무슨 내용일지 기대됩니다. 부제는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라고 되어있어요. 딸과 엄마의 반쪽만이 나온 사진이 검은 바탕에 실려 있는 표지는 쉽지 않은 내용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딸이자 엄마인 저는 약간은 긴장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칩니다.
저자 하재영은 논픽션 작가입니다.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8년부터는 논픽션을 쓰고 있어요. 개인의 미시적 서사가 사회에 대한 증언으로 확장하는 이야기, 공적 주제가 한 사람의 내밀한 삶으로 수렴하는 이야기, 그리하여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타자와 연결되는 글쓰기를 소망한다고 해요. 읽어도 언뜻 다가오지 않는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쓴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저자의 어머니의 결혼 전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뒤에 딸이 자신이 본 엄마와 자신의 이야기를 해요. 결혼 전에는 그래도 자신으로 존재했던 어머니는 결혼 후 있지만 없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딸을 키우는 이야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집에만 있던 어머니가 바깥일을 하게 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삶이 좀 안정적이라고 느꼈던 50대 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와 식사 이야기를 해요. 마지막으로 황혼의 어머니와 40대가 된 딸의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어요. 저자의 연배와 비슷한 저는 책을 읽으면서 어머니와 딸을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비슷하지만 아픈 시대를 살았던 어머니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머니와 며느리에 갇힌 그녀들의 삶 속으로 등불을 밝히듯 외롭게 걷고 있는 저자를 따라갑니다. 딸이자 어머니인 동지로서 해요.
대소사에 관여할 수도 없고, 상의할 상대도 아니고, 중요한 결정에 의견을 말할 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p65)
70년대 대학을 다닌 어머니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양가 아버지들의 주도하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는 아들과 딸의 차별을 두지 않는 분이셨고, 그로 인해 어머니는 대학까지 다니게 되지만 결혼에서만은 가부장적인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셨죠. 어머니는 결혼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며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있지만 없는 사람이고, 끊임없이 가사 노동으로 섬기지만 인정도, 고마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요. 어머니의 나이를 대략 짐작하건대 우리 어머니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6.25전쟁 후에 태어나 가족들을 위해 자라면서도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양보해 온 딸들은 결혼을 해서도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억울하다거나 힘들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말해요. 왜 그랬을까요? 왜라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시동생들 뒷바라지에, 집안일에 잠시도 쉬지 않으셨죠. 그 분주함으로 인해 정작 뒤로 밀리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어머니의 수고를 알았기에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한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죠. 먹먹하게 다가오는 지난 시간들이 책을 통해 살아납니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녀들이 그렇게 애쓰고 열심히 살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생각 없이 그저 그런 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덮칩니다.
여자에게 불리하거나 위험한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성별로 한계를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너희가 딸이라서 ‘걱정’스러웠고 늘 ‘조심’시켰지.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것 같아 (p92)
결혼 생활은 자유가 없는 시집 살이가 되었습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아버지의 수발을 위해 분가했던 살림을 합치게 되죠. 물론 이 과정에서도 어머니는 제외되어 그저 순종하는 것 밖에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공간은 거의 가져 보지 못하고, 가족들의 공공재로 살았다는 말이 어머니의 삶을 눈앞에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결혼 후 7~8년 후에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모두 내려놓고 포기했지만, 자녀들에 대한 것은 포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하죠. 자신도 여자로 자랐고, 여자라서 불리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으면서도 딸들을 걱정했고, 조심 시켰다고 말합니다. 어디서든지 튀지 않게, 보통으로 조용히 지낼 것을 요구했죠.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 있는 모순.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딸에게만은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들로 인해 조심시키고 딸의 본성을 억압하기도 하는 모순. 그 모순들을 과감하게 벗어나 하나의 인간으로 서는 일이 어머니가 없었다는 선언이라고 하죠. 저도 딸만 둘입니다. 세상은 전보다 더 위험하고, 여성이라는 한계와 약점은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내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감 있게 살라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 또한 사실입니다. 이 양가의 감정을 잘 양립시키는 것. 그것이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이 책의 제목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쓴 유명한 문장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의 해석은 디킨슨은 병든 생모와 고통받는 문학적 어머니가 옮기는 절망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현실의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의 원형이라고 말해요. 카를 구스타프 융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원형’이라는 강렬한 집단 무의식이 실제 어머니보다 내면에 더 깊숙이 침투해 자아와 관계 맺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현실 어머니와 무관하게 어머니 원형으로부터, 모성의 절대성으로부터, 자기 정체성과 대결하는 ‘어머니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려는 분투라고 하죠. 즉 생명을 이어 받는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여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한 인간이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요. 한 번도 어머니의 원형이라던가, 어머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간혹 분리되지 않은 부모 관계가 결혼 후 가정생활을 어렵게 한다는 말은 읽어 보았지만요. 신선한 충격이자 새로움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글들을 읽으면 페미니즘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봅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 관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여성을 가두고 재단하는 제도와 말들을 읽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인 것들을 문제로 보게 만들어 주죠. 마치 찌꺼기가 겹겹이 가라앉은 고요한 물속에 폭풍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찌꺼기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보이지 않게 얌전히 가라앉아 있을 뿐인데,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여성차별은 없다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 우리 사회에 거대한 폭풍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며 저자는 선언합니다. 결코 어머니는 없었다고.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모순도 모순이 아니게 되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하나의 문제가 풀리면 다른 문제들도 연쇄적으로 풀릴 것을 믿습니다. 딸이었고, 어머니였으며, 며느리인 모든 여성들을 응원합니다. 아니 그 이름 안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여성들을 응원합니다. 모든 여성들이 어머니는 없었다고 선언하는 날을 응원합니다. 가볍게 시작했다가 묵직하게 돌려받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민하게 하는 멋진 책입니다. 공간과 이야기 속, 텔레비전 안에 갇힌 그녀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꼭 챙겨야 할 책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