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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너머로 달리는 말 (리커버 에디션)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2년 11월
평점 :

신간으로 나왔을 때 김훈이라는 이름에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책을 빌려왔습니다. 그런데... 책을 펼치고 얼마 읽지 않아 큰 위기를 맞았지요. 말들이랑 사람이? 내용의 난해함과 이해할 수 없음을 참으며 읽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보고만 있다가 반납했던 것이 첫 만남이었죠. 이 책과의. 그리고 이번 서평단에 올라온 책을 봤을 때 약간은 운명 같은 걸 느꼈습니다.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는. 그 운명을 어떤 만남과 기억으로 가지게 될지 기대하며 푸른 말들이 달리는 초원으로 나도 따라 달려 봅니다.

저자 김훈은 말이 필요 없는 소설가입니다. <칼의 노래>로 대중들의 인기와 주목을 한몸에 받았고, 기행문 형식(지금은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지만)의 <자전거 여행>이 있어요. 기자 출신 작가로 기자들 사이에서는 김훈 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 문장력으로 이순신을 소환하고 이번에는 안중근도 살려냈지요.
책은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가 되는 지도가 처음 시작을 알립니다. 이어서 등장인물들이 소개되죠. 사람과 말이 간단히 소개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말입니다. 사람보다 먼저 초원의 주인이었던 말들이 사람과 함께 살면서 전쟁에도 나가고 등급도 매겨지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어쩌면 주인공이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의 난해한 내용을 뛰어넘을 문장들을 기대하며 틀에 박힌 고정관념들과 싸움을 시작합니다. 말과 사람이 구분이 되지 않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나는 이제, 문자로서 이루려 하는 것을 무력으로 이루려 한다. 문(文)과 무(武)는 본래 하나인데, 그 방편이 다를 뿐이다. 나의 문과 나의 무는 서로 의지해서 함께 나아간다. 무는 문을 힘차게 하고 문은 무를 아름답게 한다. 그대들은 나하 북쪽 대륙에 나의 뜻을 심어라 피어나서 무성하게 하라. (p96)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초와 단에 대해 설명합니다. 초나라는 문자를 쓰지 않고, 구전으로만 남기고 자연과 구분이 잘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단은 나하(큰 강)를 사이에 두고 초의 남쪽에 있는 나라죠. 문자를 쓰고, 땅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부족입니다. 그 초와 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싸움을 계속 이어오고 있어요. 초와의 전쟁을 나가기 전에 단의 임금인 칭왕이 하는 말입니다. 문자를 쓰는 것이 단의 가장 큰 특징이죠. 문과 무를 보는 창왕의 시선이 좋아서 선택한 문장입니다. 본래 하나인 것을 가지고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던가요? 인간의 역사에서. ‘무는 문을 힘차게 하고 문은 무를 아름답게 한다’ 멋진 말입니다. 하지만 멋진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얼마나 힘이 든지요. 실제로 이런 삶을 구현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귀한 것이라던 말이 생각납니다. 어렵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낸 사람이 귀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겠지요. 요즘의 정치 뉴스를 보면서 이 말을 곱씹어 봅니다. 무만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들이 치열하게 얽히고설키면서 벌이는 전쟁을 매일매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말들의 전쟁에 아름다운 문은 없는 것인지. 어쩌면 그 자유롭고 아름다웠던 초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란 종은, 사람이라는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람을 낳은 사람의 자식이고 부모지만 죽으면 인연은 흩어지고 혈연은 풀려서 뿔뿔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므로 누구나 누구의 자식도 부모도 아니며,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바람이 되어 백산으로 돌아가고, 인간 세상에는 그 인연 없는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난다고 월나라 사람들은 대를 이어서 이야기를 전했다. (p174)
이야기는 단사와(단나라의 기록) 시원기(초나라의 기록)를 인용하면서 추론하고 조합하여 먼 고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단사의 외전에 실린 월 나라의 장례식 풍속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김훈 하면 떠오르는 간결한 문장이 이 문장에서는 예외를 보입니다. 한 문장을 이렇게 길게 썼는데도 문장이 힘을 잃거나 뜻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장례문화가 한 문장에서 완벽하게 이해되고 눈앞에 그려집니다. 백산은 요(무당)가 총총(신월말 혈통)을 잃고 들어간 산입니다. 산이 높아서 꼭대기는 늘 하얀 눈이 덮어 있어 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백산에서 요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오랜 세월을 죽지 않고 살아 신령한 존재가 되지요. 장례식의 절차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면 우리의 장례식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부모나 자식이지만 죽으면 누구의 자식도 부모도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 형제의 아내 이야기를 하는 부분요. 큰 형이 아이 없어 죽어 형수를 둘째가 취했으나 그 둘째도 죽고, 그렇게 모두 죽어 천국에 가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인가를 물었던 부분요. 그때 예수님은 오늘 본문처럼 말씀하시죠. 부활 때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간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 부분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 문장을 읽고 나자 이해가 조금은 쉬워집니다. 죽으면 누구의 부모도 자신도 아니라고. 죽으면 누구의 부모도 자식도 아니니 살아 있을 때 부모 노릇 자식 노릇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생각합니다. 아직은 누구의 부모이며 자식이니까요.
마루턱에서 토하는 쓰러졌다. 쓰러진 토하의 몸에 걸려서 야백이 쓰러졌다. 말 두 마리는 일어서지 못했다. 백성들은 후미에서 말 두 마리가 쓰러진 줄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갔다.(p267)
토하는 초의 왕자 표의 말입니다. 야백은 단의 군독(군대장) 황의 말입니다. 두 말은 전쟁에서 서로 적이었지만 말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싸움에 개입하지 못했다고. 전쟁에 나간 말들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에 의해서 동원되고 이용당할 뿐이지요. 그 말들은 적이 없는 관계로 친구도 연인도 될 수 있습니다. 친구나 연인이라는 표현도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 것이지만요. 토하는 안개와 무지개를 토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신월마 혈통의 말입니다. 신월마는 초승달이 뜰 때마다 달리기를 계속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신월마이지요. 말을 향해 달리는 말이라는. 신월마의 순혈통 암말 토하는 계급이 높아 초의 왕자 표의 말이었습니다. 표를 태우고 전쟁에 나가 야백을 만났지요. 야백은 단의 군독 황의 말입니다. 야백은 숨이 턱까지 차게 달리면 목의 핏줄이 터져 피가 갈기와 함께 날리는 비혈마의 혈통입니다. 야백은 군독 황이 죽은 것을 목격한 후 자신의 어금니를 바위에 부딪쳐 빼낸 후 재갈을 풀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토하를 만나 홀레를 하지요. 이후 토하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순혈통을 지키지 못한 것을 추궁 받을까 봐 두려운 마의들이 독초를 먹여 유산을 시킵니다. 이 일로 토하는 몸이 아주 나빠져 회복이 불가능해지고 계급도 점점 낮아지고 나중에는 가장 낮은 곳까지 가게 됩니다. 가장 낮은 막사에서 야백을 다시 만나게 되죠. 야백과 토하는 말이므로 서로의 말을 사람은 알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냥 짐작만 할 뿐입니다. 두 말들은 사람에 의해 끝까지 이용당하다가 이렇게 사람들이 모르게 쓰러져 죽습니다. 모르는 것인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두 말의 쓰러짐과 함께 이야기도 끝이 납니다. 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도, 완전히 끝내는 것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이 소설은 읽는 동안 내가 생각하는 것들과 치열하게 싸움을 하게 했습니다. 말과 사람의 공존과 어울림. 말이 사람인지 사람이 말인지 구분이 어려운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책을 덮기도 했죠. 그러면서 얼마나 내가 고정관념으로 꽉 막힌 사람인가 깨닫기도 했습니다. 열린 사고 열린 마음은 말로만 떠들었던 것이고,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죠. 동물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도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대체 작가는 어떤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를 수없이 질문하면서 자작나무 숲을 거닐 듯 책을 읽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래도 야백을 쫓아 토하를 따라 책을 다 읽었습니다. 문장들이 좋지 않았다면 끝까지 갈수 없었을 여정입니다. 두 말들이 쓰러진 초원의 바람을 느끼며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서둘러 작가의 말을 읽습니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을 아직도 가지고요. 작가는 말합니다. 자신이 살았던 일산에서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면 자주 놀라고 문득 놀란다고 해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답답함이 책으로 나왔다고 설명해요. 이 설명을 듣고도 선명하진 않지만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주인이 없었던 초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작가의 마음과 주인이 없어도 잘 살았던 때의 말과 사람들을요. 그리고 주인공이 왜 말인가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여름에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지요.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장이 후이늠의 나라는 말이 주인공인 나라였습니다. 그 말들과 몇 년을 살다 돌아온 걸리버는 사람들의 냄새가 역겨워 혼자 지내게 되죠. 여기서도 말의 관점에서 사람들의 냄새에 대한 부분이 간혹 나옵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므로 그 몸 냄새와 똥 냄새가 역겨웠다고. 짧은 내 생각으로는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약간의 아련한 느낌은 남습니다. 자연과 동물이 금을 긋지 않고 살았던 초원을 고향을 바라보듯 하는 마음이 됩니다.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라 일상에서 전쟁을 하듯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그 치열한 일상의 전쟁 속에 푸른 밤을 달리는 토하와 야백을 소개합니다. 푸른 초원으로부터 오는 강인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말들과 함께 일상에서 조금은 여유를 누리시길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