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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 - 그림의 길을 따라가는 마음의 길
장요세파 지음, 김호석 그림 / 파람북 / 2022년 11월
평점 :
그림의 길을 따라가는 마음의 길이라는 부제가 마음을 온통 채웠습니다. 희미하게 표현된 사람에게 음식을 먹이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표지도 왠지 눈길을 끌었죠. 제목도 너무 멋지게 다가왔습니다. 모자라고도 넘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책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까 기대하며 은은한 묵의 향이 풍기는 책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글을 쓴 장세요파 수녀님은 일본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서 입회해서 현재는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에서 수도 중입니다. 시집 <바람 따라 눕고 바람 따라 일어서며>와 그림 에세이 <수녀님, 서툰 그림일기>, <수녀님, 화백의 안경을 빌려 쓰다>, <그림이 기도가 될 때>가 있어요. 엄격한 수도회 생활 가운데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김호석 님은 깊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상에 대한 은유와 해학이 짙은 화풍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전통 초상화의 권위자로 성철 스님, 법정 스님 등의 불교계 큰 스님들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 작업으로 화제를 일으켰죠. 여러 상들을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가의 그림에 수녀님의 글이 짝처럼 실려 있습니다. 담백하고 단순한 수묵으로 표현된 그림은 화려한 채색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깊이를 더해 줍니다. 이에 더해 그림을 보고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을 때 살짝 참고하는 심정으로 읽는 글을 통해 그림에 대한 시선이 확대됨을 느낍니다.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사물, 아름다운 여자를 그리지 않는다는 화백의 그림은 그런 것들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벗어난 화백의 그림들은 어떤 것을 그렸을까요? 그 그림을 보고 화백의 마음을 보듯 깊이 있는 생각들을 풀어 놓는 수녀님의 글은 어떤 모습일까요? 궁금함과 기대함으로 색이 빠진 그림들 속으로 하나의 풍경처럼 들어가 봅니다.
그릇은 깨져야 커집니다. 실제 그릇은 깨지면 못 쓰지만 이 그릇은 터지면서 넓어집니다. 누군들 자신이라는 그릇이 터지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지요. 세상 많은 일은 이런 깨어짐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이 가치를 깨닫는 것, 부서짐과 깨짐의 가치를 깨닫는 일 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p97)
스마트폰의 폐해를 봅니다. 여백이 그림인 양 그림의 한쪽 구석에 작은 개구리가 있습니다.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아서 확대하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움찔합니다. 이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림인데 말이죠. 하지만 그림은 딱 보는 순간 느낌이 옵니다. ‘우물 안 개구리’ 그 작은 우물 안에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편안한 모습의 개구리입니다. 그 그릇을 깨야만 켜진다는 말이 더 잘 다가오죠. 자신이라는 그릇이 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통을 이기며 기꺼이 깨어짐을 감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변화한다고 합니다. 내 안의 나를 깨고 나오는 것. 늘 생각으로는 알고 있던 것이지만 그림으로 보니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저 작은 우물 안에 저렇게 편안하게 있다니. 익숙한 것들이 좋아지고 편안합니다. 새로운 것과 배우는 것이 전처럼 유쾌하지 않아요. 배우기를 멈추는 순간 늙는다고 했는데, 조금씩 늙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100세를 넘긴 김형석 교수님처럼 살고 싶다고 감히 욕심내면서도 일상에서의 변화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사람들은 귀하고 수가 많지 않은 모양입니다. 우물이 점점 좁아지는 것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해봅니다.
먹되 정도껏, 그래서 칼을 꿀 옆에 두었습니다. 칼끝까지 빨면 혀를 베일 것이요, 푹 뜨면 묻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p151)
화백의 할아버지는 서당을 하셨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꿀병 이를 보이는 곳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 꿀을 먹을 수 있는 도구가 칼입니다. 자신의 탐심을 다스리라는 훈장님의 교육이라고 해요. 본능대로만 살면 사람은 사람의 꼴이 아닐뿐더러 때로 짐승처럼 살 가능성이 있다고 수녀님은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요? 얼굴도 모르는 화백의 할아버지가 부럽습니다. 그 칼끝에 남은 꿀을 파리가 앉아 먹고 있어요. 그 파리는 혀가 베이지 않았을까요? 좋은 것을 옆에 둘 때 칼을 두는 심정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좋은 것이니 과하게 욕심내서 사람 꼴이 아닌 짐승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요즘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좋은 것, 외양으로는 슬쩍 보면 좋은 것이지만 속까지 좋은지는 모르겠는 스마트폰을 얼마나 가까이하고 있는지요. 스마트폰에 칼을 두는 심정으로 절제를 해야겠습니다. 스마트폰을 줄여 아이의 말을 좀 더 진심으로 들어주고, 남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여름 한낮 졸음을 방지하고 밝은 정신을 위해 가장 날카로운 칼을 갈았다던 법정 스님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이런 모습들이 단순히 수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도 스스로를 다듬어 가는 모습으로 보편화되었으면 희망을 가져봅니다.
북소리가 울리게 되지 않더라도, 북을 찢어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울리는 북을 찢어야 새 북을 만들 생각이라도 할 것입니다. (p253)
이국종 교수님의 사태를 보고 화백이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가자미눈이 되어서라는 인터뷰요. 이국종 교수님은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지요. 생각하고 소신대로 살아내는 삶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니 대리 만족을 느낀 것 일 수도 있고요.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 <골든 아워>이라는 책을 읽고는 가슴에 돌이 가득 얹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어떻게도 해 볼 수 없는데, 사람을 살려야 하고, 그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었죠. 이 사람들은 의료비를 낼 형편도 안 되고, 의료보험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 그래서 병원에서는 환자를 많이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국종 교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돈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그 돈이 자신의 소명을 그만두게 할지라도. 이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람을 살리던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북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북 삼아, 자신의 생명을 북 삼아 울리던 교수님은 기어이 북을 찢었지요. 누구도 이런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람의 생명에, 진심이 되기를 철없이 순진하게 믿어 봅니다.
화백의 그림에도, 수녀님의 글에도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묻어납니다. 아름다운 것을 그리지 않는 화백의 그림은 일상의 작은 것들이 크게 다가오는 경험을 줍니다. 색이 거의 없는 수묵화의 형식으로 그려진 그림이 도대체 모를 때는 수녀님의 글이 길잡이가 됩니다. 그림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소리 없이 전하는 화백의 힘을 느낍니다. 약하고 아픈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시선처럼 화백과 수녀님의 시선은 닮아있습니다. 책을 덮을 때쯤 제목을 깨닫게 됩니다. 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의 의미를요. 화백의 그림은 어딘지 모자란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치 여백이 주인공처럼 그림은 아주 작게 한쪽에 그려지기도 하고, 사실적이라 섬뜩한 욕망이 넘실대는 그림이 있기도 합니다. 모자라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넘치고도 남습니다. 일상적인 사물과 생물들을 있는 그대로의 생명으로 존중하며 인간의 시선으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화백의 그림도, 수녀님의 글도요. 모자라고도 넘치는 것들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같은 것들이 더 크게 넘치고 물결을 이루며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사회를 꿈꿉니다. 누구도 약하다고 없다고 아프거나 상처받거나 억울하지 않은 세상을요. 그 세상을 위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자신을 깨고 나오는데 큰 도움을 줄 책입니다. 책이 아니라 그림이고, 그림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 마음들이 온전히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기를, 고요한 책과 함께 바랍니다. 당신도 함께 하실 거죠?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