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와 마고의 백 년
매리언 크로닌 지음, 조경실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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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약간의 모험이었다. 긴 호흡이 필요하고 김장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표지에서 자꾸만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서평단에 신청했다. 책이 배송되어 오고 나서는 마음이 바빠졌다. 500페이지의 소설을 별을 보는 심정으로 펼친다.


저자 매리언 크로닌은 1990년 워릭셔에서 태어나 자랐다. 랭커스터 대학교에서 영어와 문예 창작을 전공했고, 버밍엄 대학교에서 응용언어학을 연구해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첫 장편 소설인 <레니와 마고의 백 년>을 통해 ‘알렉스 어워드’를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옮긴이 조경실은 성신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후 산업 전시와 미술 전시기획자로 일했다. 현재는 번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제 나가서 사람 좀 만나려고요>, <오래된 지혜>, <일상이 예술이 되는 곳, 메인>등이 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메이 병동(시한부)의 환자 레니와 다른 환자 할머니 마고의 만남이 이어진다. 만남으로 인한 두 사람의 거대한 프로젝트도 시대와 이야기별로 이어진다. 2부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어 두 사람 사이에 나눈 이야기들이 제법 많아지고, 나눈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3부는 남편을 보낸 마고의 이야기와 프로젝트를 끝내고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레니의 이야기, 그 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이미 죽은 별이 우리 눈에는 빛나 보이는 것처럼 가장 어두운 밤에 별을 보는 심정으로 레니와 마고의 로즈룸으로 들어가 본다.


‘레니와 마고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한 해 한 해를 손으로 꼽아가며 우리의 이야기를 해나갈 것이다.(p102)

메이 병동은 시한부 병동이다. 그곳의 17살 여자아이 레니. 분홍색 파자마와 슬리퍼를 신고, 늘 허락받은 곳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하지만 레니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병동에서 우연히 만난 마고 할머니. 계약직으로 있던 직원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미술실을 만들었다. 그 미술 수업에서 마고와 다시 만난 레니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한 해 한 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을 시작한다. 레니 17세, 마고 83세.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100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미 다가온 죽음을 부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레니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삶과 죽음. 그것은 완전한 죽음이다. 그 완전한 죽음의 두려움을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는 것으로 극복한다. 그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한 해 한 해 손으로 꼽아가며 이어 간다. 두 사람의 첫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첫 그림, 첫 이야기. 지금 현재에서 내 이야기를 남기려면 어떤 장면으로 가야 할까? 어떤 장면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까 잠깐 고민해 보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 감사함으로 간절함으로 하루하루 레니의 심정으로 일상을 찬찬히 둘러본다. 매일이 똑같아도 살아 있음이 감사하다.


“전혀요. 마고. 밤을 두려워하기에는 나는 별을 너무도 깊이 사랑하는걸요.”(P344)

마고와 남편 험프리의 만남은 극적이었다. 깜깜한 도로 한가운데 검은 옷을 입고 꼼짝 않고 하늘을 쳐다보는 험프리를 마고는 차로 칠 뻔한다. 아슬아슬하게 멈추었지만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는 20분 동안 식혀주면 된다고 하면서 험프리는 마고에게 차에서 내려 별을 보자고 한다. 마고는 미심쩍었지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아 차에서 내려 밤하늘을 바라보고 도시에서 보지 못한 무수한 별들을 본다. 처음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 마고. 그런 마고를 향해 험프리는 별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아도 계속한다. 그런 험프리에게 마고는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섭지 않냐고 묻는다. 험프리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 별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사라 윌리엄스의 <늙은 천문학자가 그의 제자에게>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별을 너무 사랑해서 밤이 두렵지 않다는 말. 무언가를 너무 사랑해서 그 위험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남은 인생을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결혼도 사랑이 작동한 것이리라. 부모가 된다는 것도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출산의 고통과 육아의 고통도 잊고 뛰어넘게 된다. 생활에서 불이 꺼진 듯 밋밋하고 생기가 없는 나날들 속에서 모든 것들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일상을 단정하게 관리하며 운동을 쉬지 않는 것도 가족들을 향한 내 나름대로 사랑의 표현이겠지. 크게 대단한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을 작은 것들로 쪼개어 손에 잡히게 만들고 싶다. 아침마다 무거운 눈을 밀어 올려 몸을 일으키고 아침밥을 준비하는 것도 사랑이다. 퇴근시간을 맞추어서 저녁을 준비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장을 보는 것도 사랑이다. 상대가 모두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너무 사랑함으로 그 서운함을 이길 수 있기를. 험프리의 말이 내게도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녀는 내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슬픈 게 아니라 아름다운 거야. 별들이 얼마나 오래전에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별들을 볼 수 있잖아. 별들은 그렇게 계속 살아있는 거야.” 별들은 그렇게 계속 살아있는 거였다.(P410)

레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안 마고는 병원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마고와 레니 모두가 처음 시도한 일이었다. 쌀쌀한 겨울날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깜깜한 비상구 앞에서 레니와 마고는 이야기 속 마고와 험프리가 보았던 대로 별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마고는 험프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해준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별은 이미 죽은 별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레니는 슬프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고는 위의 대사를 말한다. 어쩌면 마고는 별들이 그렇게 살아 있듯이 레니도 사람들 마음속에 그렇게 살아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17세 소녀를 향한 마고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레니도 알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추억을 공유하고 남들보다 짧고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면서 사랑을 나누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어떤 의식도 호들갑도 없이 자연스럽고 조용히 레니와의 이별은 다가온다.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말이었지 않을까? 죽음이 자연스럽고, 누구도 비켜갈 수 없듯이 그렇게 두려운 것도 아니다. 삶과 죽음을 특별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별처럼 살아내는 것. 혹은 누군가의 별이 되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지 않을까? 밤하늘의 별을 무심히 쳐다본다. 그 별 속에 아버지도 계실 것이라 믿으면서.

책은 열일곱 살 레니와 여든세 살 마고의 이야기이다. 왜 두 사람의 나이가 열일곱과 여든셋일까를 생각하면서 읽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병원에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는 레니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기도 했다. 별처럼 발랄하고 엉뚱하지만 사랑이 넘치던 마고의 남편 험프리의 모습에 혼자 미소 짓기도 했다.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은 마지막 욕심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해낸 험프리. 마초가 장례식 후에 남편의 연기를 알아차리고 오열하는 부분은 큰 감동으로 남았다. 요양원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당연하게 거쳐야 하는 과정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안에서의 삶의 모습은 우리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다. 간혹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힘없고 아프고 나이 많은 사람들을 사람으로서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 많다. 평온한 듯하지만 영국의 요양원도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모습이다. 우연히 만난 전 남편의 동생과 마고의 대화에서 보듯이.

소설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어떤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도 않고, 시한부 환자인 레니의 고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듯 말한다. 그게 또 마음이 아프고, 그럼에도 담담한 레니의 마음이 단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죽은 별이 눈에 빛나 보이듯이 누군가에게 빛나는 별로 기억된다면 그 삶은 참 아름다울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겐 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을 더 잘 살아야지 다짐을 했다. 별이 되어 기억되는 나를 있게 한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래 더 열심히 마음과 사랑을 다해 주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살아가자.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감사하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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