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선택한 것은 익숙한 이름 하나 때문이었다. 띠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름. 문학평론가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어서 그의 이름이 익숙했고, 그가 추천하는 시집은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송된 책을 받아 보고는 고민했다. 잘한 선택인지를.
시집과 함께 작품 해설집이 온 것이다. 시를 너무 만만히 보았던 것은 아닌지, 우리말로 쓰인 시도 아니고 번역된 시를 온전히 즐기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 고민과 두려움은 넣어두고 무작정 그림 앞에서 그림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감상을 포기하지 않는 심정으로 시 앞에 선다. 질문하는 시라는데 어떤 질문들을 던질까 기대와 두려움으로.


루이즈 글릭은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1943년에 태어났으며 202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8년에 시집 <맏이>로 등단했고, 1993년 시집<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현재는 예일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옮긴이 정은귀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미문학 문화학과 교수로 우리 시를 영어로, 영시를 우리말로 옮겨 알리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우리말로 옮긴 시와 우리 시를 영어로 옮긴 시집이 다수 있다. 옮긴이의 정성은 작품 해설에 실린 글로 인해 충분히 느껴진다.
시집은 제목이기도 한 야생 붓꽃을 시작으로 전체 54편의 시가 실려 있다. 꽃, 꽃나무, 풀 등의 목소리가 18편,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라는 제목으로 17편, 그 외 19편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주관하는 신의 목소리가 차지하고 있다. 처음에 실린 야생 붓꽃의 시를 읽고 잠깐 고민한다. 해설을 먼저 읽고 올까? 하지만 고지식한 원칙 주의자인 나는 시 그대로 읽어보기로 결정한다. 설마 읽다가 포기하기야 하겠어. 조금 뻔뻔함으로 보랏빛이 선명한 야생 붓꽃 앞에 서본다.
야생 붓꽃
그 고통의 끝자락에/ 문이 하나 있었어.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걸/ 나 기억하고 있다고.
머리 위, 소음들,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들,/그리곤 아무것 없어. 힘없는 태양은/ 메마른 땅 표면에 어른거리네.
끔찍해. 어두운 대지에 파묻힌/ 의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러고는 끝이 났지: 네가 두려워하는 것, 영혼으로/ 있으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대지가/ 살짝 휘어졌어.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내가 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빠르게 날고.
다른 세상에서 오는 길을 / 기억하지 못하는 너.
네게 말하네, 나 다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거라고:
내 생명의 한가운데서 거대한/ 물 줄기가 솟아났네, 하늘빛 바닷물에/ 깊고 푸른 그림자들이.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묘하다. 혹은 알 것 같은데 모르겠다’라는 독자들의 평가가 많다고 한다. 이 문장을 읽은 후 마음속이 시원해졌다. 그렇다 문장이나 단어가 어렵지는 않은데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혹시나 붓꽃의 생김새를 놓치고 있나 싶어서 네이버 검색을 해본다. 특별한 것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붓꽃이다. 자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 단어들을 어찌할지 고민에 빠진다. 읽는 데 채 2분이 걸리지 않는 시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 들여다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을 한다면서? 너는 누구고 나는 또 누구인 거지? 그럼 여기서 특기를 발휘해 본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읽어 보기에 도전한다. 고통의 끝자락에 있는 문 하나는 무엇일까? 그것이 희망의 출구인지, 아님 또 다른 고통으로 들어가는 분인지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언뜻 시의 분위기로는 죽음의 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억하는 나는 누구인 거지? 붓꽃인가? 붓꽃을 가장한 다른 어떤 것인가? 시의 다음을 읽어보면 천지 창조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머리 위 소음들, 흔들리는 나무 가지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은 왠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과 비슷한 이미지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자 이후로는 태초의 창조로 시를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혼자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이 시가 처음에 실린 것은 천지창조처럼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시의 매력은 하나의 시선으로 끝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어렵게 천지창조로 읽었다고 해도 다음 연에서는 그 시선이 유지되지 않는다. 천지를 창조한 이후에 식물이 말을 하는 건가? 그다음엔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이고? 루이즈 그러 락의 시가 어려운 것은 질문하는 시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옮긴이의 말을 백 퍼센트 이해한다. 머리가 뱅글뱅글 돈다. 하지만,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야생 붓꽃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시인도 있고, 그걸 읽고 좋은 비유고 문장이군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
개기장풀
뭔가가/ 엉망이야, 엉망이야 외치며/ 반갑지 않은 세계로 들어오네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나 끔찍이 싫어한다면/ 내게 애써 이름 붙여 주시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언어에/ 비방하는 말이 하나 더/ 필요한가요.
한 부류에도 모든 책임을/ 돌리는 또 다른 방식-
당신이나 나나 알잖아요./ 하나의 신을 섬기려면/ 하나의 적만 있으면/ 된다는 걸
내가 그 적은 아닙니다./ 이 화단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기 위한
하나의 핑곗거리일 뿐,/ 실패의 작은/ 모범 사례죠. 당신은 소중한 꽃들 중 하나가
여기서 거의 매일 죽고 있어서,/ 당신은 쉴 짬이 없는걸요.
그 원인을 처리해야 하니, 이 말은/ 뭐가 남든지, 그 어떤 것도/ 당신 개인의 열정보다
더 질길 거라는 뜻이지요-
세상에서 그게/ 영원히 계속될 것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왜 그걸 허락하는지, 당신은/ 늘 하는 걸 계속해 나갈 수 있는데,
애도하면서 동시에 탓하는 일./ 늘 함께 가는 그 두 가지요.
살아남기 위해서 당신의 찬사는/ 필요 없습니다. 내가 여기 먼저 있었으니,
당신이 여기 있기 전부터, 당신이/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말이지요
그리고 나는 태양과 달만 남게 되어도/ 또 바다, 그리고 이 드넓은 들판만 있어도
여기 있을 겁니다.
내가 그 들판을 만들 것입니다.
개기장풀로 번역된 이 풀은 정원 가꾸기가 일반적인 미국에서 잡초라고 한다. 키가 크고 빨리 자라기 때문에 정원에서 주인에게 속히 뽑히고 마는 잡초. 그 잡초라는 것이 지극히 인간 편의 분류임을 개기장풀은 말하고 있다. 그렇게도 끔찍이 싫어한다면 이름을 굳이 붙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끔찍이 싫어하는 것에 굳이 이름을 붙어 부르며 끔찍함을 상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들에도 이름을 붙여서 자신이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이름을 부르며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 부류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또 다른 방식’이 문장에 왜 지금의 정치가 생각나는 것인가? 상대를 향한 미움과 혐오, 싦어함을 이름 붙여 매일 매 순간 모든 책임을 돌리며 비난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가. 그 정치가 단순한 정치인들만의 문제는 아님을 본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상대를 향한 내 마음 또한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풀의 목소리를 빌려서 내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한 번도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단단한 다짐과 마음으로 읽혔다. 얼마나 자주 애도하면서 동시에 탓하는 일을 해왔던가? 안타까운 참사 가운데서도 애도하면서 동시에 탓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특성을 뛰어넘는 개기장 풀의 말을 듣는다. 살아남기 위해 당신의 찬사는 필요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래 내가 살아가기 위해, 좀 더 잘 살기 위해 누군가의 찬사는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인정에 목메는 어리석음을 또 한 번 깨닫고 개기장풀 처럼 당당히 버리고 설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다짐과도 같은 말. 태양과 달만 남게 되어도 여기에 있겠다는 선언. 자신이 들판을 만들 것이라는 굳은 다짐. 그래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찬사와 인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나만의 인생으로 나만의 들판을 만들자!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는 내가 늘 드리는 기도를 생각하며 읽었고, 양귀 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하며 시를 곱씹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 일상이라고 한다. 거의 일반적으로 집에 정원이 있고 철을 따라 꽃들이 피고 진다고 한다. 그 정원 가꾸기가 아직 우리에게는 낯설어 우리 식으로 바꾸면 텃밭 가꾸기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원과 텃밭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정원은 온전히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텃밭은 생존에 좀 더 가깝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즐기는 것, 삶의 여유를 느끼는 것은 아직도 낯설고 생소하다. 그 생소함으로 인해 시가 더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시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다고 해설에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해설을 보지 않고, 내 느낌과 생각만으로 읽은 후 해설을 읽으며 내 감상과 느낌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전혀 엉뚱하게 이해한 시도 있었고,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느낌을 느낀 시도 있었다. 왜 출판사에서 해설집을 함께 만들어서 세트로 구성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문학평론가의 말은 시인의 시처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보는 사물들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인의 탁월함은 조금 느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것을 다르게 만들고 뛰어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늘 보던 하늘과 계절과 꽃들, 정원에서의 일들이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읽은 후 어떻게 소화할지를 고민하는 시간도 괜찮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일상적인 나무와 꽃들이 어떤 말들을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럼 화단의 볼품없는 잡초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애씀으로 굳건히 지켜가는 자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익숙하지 않는 꽃들이 약간의 이질감을 주지만 데이지와 산사나무를 볼 때 시인이 떠오를 것 같다. 낙엽을 모두 떨 구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경험을 줄 것 같다. 작은 잡초 하나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힘이 들어가는 마음가짐을 갖는 멋진 시간을 주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