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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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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보지만 에세이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은희경의 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나 주인공들이 있지만, 은희경의 수필이라고 하면 은희경이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은희경 작가의 책을 십여 권을 읽고도 정작 생각의 일요일들을 읽으며 낯설어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인의 에세이는 보다 특별하다. 시 한편은 자신의 향기를 오롯이 갖고 있다면, 시인을 보여주는 에세이는 어떤 시든 될 수 있는 풍부한 향을 지니고 있다. 시인에게서 아직 그가 쓰지 않은 시를 읽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시인의 말은 시인이라는 이유로 운율과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김소연 시인의 시집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사전을 끼고 몇 번이고 읽었다. 마음사전에서 시의 향기가 보다 짙게 났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구구절절한 애정을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에서는 단 한 문장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곧 봄이 오는데, 나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걸인의 팻말을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짧은 시 한 구절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곧 봄이 온다는 사실과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시인의 문장을 만드는 시선을 갖기란 어렵다.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르게 엮어낸다.

 

시인의 문장은 손끝이 아니라 눈에서, 가슴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는 시보다도 시인이 좋다. 시인은 세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와 같으면서도 얼마나 다를까. 그 상상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에세이이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제목처럼 겸손하고 따뜻한 나희덕 시인의 눈을 보여준다. 부딪치는 사건이나 지나가는 일상들에서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상상, 조금 아련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눈에 대한 반성. 나희덕 시인은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 시인 노릇 헛했구나. 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왔지만, 정작 문명화된 내 몸은 새의 부리나 발톱의 이물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더운 피가 도는 짐승의 등을 만져본 지도, 나무를 꼭 끌어안아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87, 새들아, 이리오렴

 

시인은 즐거운 허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떤 물웅덩이를 만드는 것 같다. 아주 짧은 글 만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생생한 감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보기만 해도 괜찮은 것을 안아보고, 만지기 두려운 것에 손을 데고, 느낄 수 없는 감정에 마음의 창을 낸다.

 

새의 발톱에 놀란 시인은 새에 대해 쓴 자신의 시들에 조금 부끄러워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다시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는 마음을 얻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들이 결국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시란 결국 시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서 손끝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결국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은 아직 손끝으로 옮겨지지 않은 한편의 시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산문이 주는 잔잔함이 언젠가 시인의 손끝에서 깊은 파문을 주는 몇 줄의 시가 되길 기대하게 된다.

 

표지에 담긴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드는 숲길을 걷는 상상을 한다. 나희덕 시인이 한 걸음씩 걸어서 시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 길 위에서 쓴 산문들이 여기에 적혀있다고, 분명하게 느껴진다.

 

아, 시인 노릇 헛했구나. 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왔지만, 정작 문명화된 내 몸은 새의 부리나 발톱의 이물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더운 피가 도는 짐승의 등을 만져본 지도, 나무를 꼭 끌어안아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87쪽, 「새들아, 이리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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